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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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베케트 (Thomas Becket)
같은이름 도마 , 베켓 , 토머스 축일 12월 29일 신분 주교 , 순교자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1118?-1170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1118년경(자료에 따라서 1119년 또는 1120년) 12월 21일 사도 성 토마스의 축일(오늘날은 7월 3일에 기념함)에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런던(Londo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와 마틸다(Matilda)는 노르만족 출신의 부유한 상인이었다. 10살 무렵 그는 런던 남부 서리(Surrey)의 머튼 수도원(Merton Priory)에 들어가 공부한 후 캔터베리 대성당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20세쯤 프랑스 파리(Paris)로 가서 공부하던 그는 이듬해에 어머니가 선종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영국으로 돌아와 사무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도왔다. 24살 때 그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테오발트(Theobald)의 서기가 되었고, 그의 신임을 얻어 부제품을 받은 후 대주교의 명으로 로마를 오가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테오발트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 부제를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로 보내 로마법과 교회법을 공부하도록 했다. 1154년 그는 캔터베리 교구의 대부제가 되었고, 탁월한 능력과 재치 있는 성격으로 인해 왕실과 교구 사이의 교섭자로 활동하였다.
21살의 젊은 나이에 영국 왕이 된 헨리 2세(Henry II)는 테오발트 대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1155년에 성 토마스 베케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였다. 대법관으로서 그는 모든 권력을 자기 수중에 넣으려는 국왕의 편에 서서 행동하며 대부제로서 교회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의 루이 4세(Louis IV)와의 전쟁에 참여했고, 툴루즈(Toulouse) 원정 때는 부대장을 맡아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왕의 동반자이자 친구로서 신임을 얻은 성 토마스 베케트는 1161년 테오발트 대주교가 선종한 후 공석이 된 캔터베리 주교좌의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헨리 2세 왕은 교회를 왕권에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 성 토마스 베케트를 이용하고자 했고, 그런 이유로 적극적으로 그를 추천하였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왕의 계획을 알고 나서 완강히 거부했으나 왕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1162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성 토마스 베케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꿔나갔다. 예전처럼 언제나 국왕 편에 설 줄 알았던 헨리 2세의 뜻과는 달리 그는 규칙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며 대주교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교회의 자율권과 캔터베리 관구의 소유권과 특전에 대한 왕실의 모든 침해를 거부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는 점점 악화하였다. 한편 헨리 2세는 1164년 1월 클라렌든 궁전에서 고위 성직자 모임을 주재하며 교회와 국왕의 관계를 규정한 16개 조항의 ‘클라렌든 헌장’(Constitutions of Clarendon)을 제시하고 이를 수용하도록 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다른 주교들과는 달리 이 헌장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 헌장에 따르면 왕의 동의 없이 로마에 상소할 수도 없고, 교회 법정에서 행해져야 할 성직자의 제재가 왕의 권한 밑으로 들어가고, 주교들이 왕의 지배를 받을 뿐 아니라 주교 선거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이 왕에게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레고리오 개혁(Gregorian Reform)으로 시작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국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주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국왕은 1164년 10월 노샘프턴(Northampton) 교회 회의에 그를 소환하여 징계를 요구하였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러한 사실을 교황에게 탄원했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성 토마스 베케트는 11월 초 프랑스로 도피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퐁티니(Pontigny)의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교회법 연구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 상스(Sens) 교외의 성 골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성 토마스 베케트와 헨리 2세와의 화해를 위해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중재를 호소한 루이 7세 왕의 노력으로 둘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졌다. 결국 성 토마스 베케트는 1170년 12월 2일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캔터베리 주교좌로 돌아왔다.
캔터베리로 돌아온 뒤에도 성 토마스 베케트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며 국왕에게 협력한 주교들의 파문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의 결정에 분노한 헨리 2세는 신하들에게 그가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을 했다고 한다. 국왕은 네 명의 기사들을 캔터베리로 보내면서 “아무도 나를 이렇게 사납게 날뛰는 사제로부터 구해줄 사람이 없습니까?”라며 그를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12월 29일 캔터베리에 도착한 기사들은 성 토마스 베케트를 협박하며 국왕의 뜻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결국 기사들은 밖에 숨겨두었던 무기를 갖고 다시 대성당으로 들어가 제단 앞에서 저녁 기도를 바치던 성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를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나는 예수님의 이름과 교회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전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고, 즉시 순교자로 공경받으며 그의 무덤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의 무덤에서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3년 성 토마스 베케트를 성인품에 올렸다. 헨리 2세는 이듬해에 그의 무덤을 찾아 용서를 빌고 교회에 대한 자신의 법안을 무효로 했다고 한다.
성 토마스 베케트의 유해는 도난을 막기 위해 캔터베리 대성당 동쪽 지하 바닥에 모셨었다. 그리고 1220년 7월 7일 대성당 내에 새로 마련한 삼위일체 경당으로 이장하여 모셨는데, 그의 무덤 경당은 점차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가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혼과 재혼 문제로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수장령(首長令)을 반포해 영국 국교회를 설립한 헨리 8세 국왕이 1538년에 그의 무덤 경당을 파괴하였다. 국왕은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유해를 불태워 강에 뿌렸으며, 모든 기도서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고 그에 대한 공경 예식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그에 관한 그림도 모조리 없애버렸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공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이 여럿 건립되었고,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년)은 성 토마스 베케트의 순교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성당의 살인”(Murder in the Cathedral)이란 시극을 발표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2월 29일 목록에서 캔터베리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토마스 베케트가 정의와 교회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많은 고통을 겪고 돌아왔으나 대성당에서 헨리 2세가 보낸 신하에 의해 칼에 찔려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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