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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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피니아노 (Pinian)
같은이름 삐니아노 , 삐니아누스 , 피니아누스 , 피니안 축일 12월 31일 신분 자선가 , 수도자 활동연도 +431년경
성녀 멜라니아(Melania minor/the Younger)는 383년경 로마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Valerius Publicola)와 이교 사제의 딸인 체이오니아 알비나(Ceionia Albina)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할머니인 성녀 멜라니아(Melania Maior/the Elder, 6월 8일)는 로마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로 간 최초의 그리스도인 여성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성녀 멜라니아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세속적인 야망을 지닌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후손을 원했고, 그래서 그녀의 뜻과는 상관없이 14살의 성녀 멜라니아를 부유한 조카이자 그녀의 사촌인 성 피니아누스(Pinianus, 또는 피니아노)와 결혼시켰다. 성녀 멜라니아는 성 피니아노에게 금욕적인 삶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남편은 두 명의 아들을 원했는데, 첫째는 딸이었고 둘째는 아들이었는데 그마저 조산으로 어렵게 낳았으나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도 사망하여 16살의 나이에 두 아이를 잃었고, 성녀 멜라니아의 생명도 위험한 지경이 되었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성 피니아노는 성녀 멜라니아가 살기만 하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순결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삶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그들이 지닌 막대한 재산과 유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의 결정을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405년 임종을 앞두고서야 모든 재산을 성녀 멜라니아에게 물려주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반대했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성녀 멜라니아는 남편과 함께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며 막대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많은 교회와 수도원에 기부하기 시작하였다. 성녀 멜라니아가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방대한 재산 일부를 매각하자 집안 친척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심각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녀는 호노리우스 황제(395~423년 재위)에게 호소하여 그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처분하고, 남편의 동의하에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을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만들고, 노예들을 해방한 후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로마를 떠나서 놀라(Nola)에 있는 친척인 성 바울리노(Paulinus, 6월 22일)에게 갔다.
그곳에서 성녀 멜라니아와 성 피니아노는 자선사업과 봉헌 생활에 헌신하며 아퀼레이아(Aquileia)의 루피누스(Rufinus)를 만나 그의 지도를 받았다. 408년경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할 때 성녀 멜라니아와 성 피니아노는 어머니 알비나와 루피누스와 함께 시칠리아(Sicilia)에 있는 자신들의 영지로 피신하였다. 그 후 고트족이 메시나(Messina) 해협 바로 건너편까지 오자 메시나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이주하기로 하고 배를 이용해 카르타고(Carthago)를 향해 출항했다. 가는 도중 폭풍으로 인해 리파리섬(Lipari Is.)에 좌초했는데, 그 섬은 막대한 몸값을 요구하는 해적들에게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성녀 멜라니아는 해적들에게 막대한 금화를 주어 주민들을 구한 후 루피누스가 사망한 410년경 누미디아(Numidia, 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의 타가스테(Tagaste, 오늘날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Souk Ahras])로 가서 정착하였다. 성녀 멜라니아 부부는 이곳에서 7년을 머물며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와 타가스테의 주교인 성 알리피오(Alypius, 8월 15일)를 만나 격려를 받고 우정을 쌓았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이들 부부를 ‘교회의 진정한 빛’이라고 칭송하였다.
북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성녀 멜라니아는 자신들의 영지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을 해방한 후 그들을 위해 남녀 수도원을 각각 하나씩 세우고 스스로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철저한 금욕과 금식 등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417년에 성녀 멜라니아는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가서 성 치릴로(Cyrillus, 6월 27일) 주교를 만나고, 이집트의 여러 수도원과 사막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후 팔레스티나(Palestina) 성지로 가서 예루살렘(Jerusalem)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녀는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을 만나 그녀의 소개로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나기도 했다. 그 후 성녀 멜라니아는 성 예로니모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성녀 멜라니아는 남편과 함께 올리브 산 위에 남녀 수도원을 짓고 철저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이미 그곳에는 그녀의 할머니인 성녀 멜라니아가 설립한 남녀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녀는 더 엄격한 은수자의 삶을 원해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고행의 삶을 살았다. 성녀 멜라니아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회원들과 기도와 자선의 생활을 나누며 특히 주요 서적을 필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430년경 어머니 알비나가 선종하고 이듬해에 남편인 성 피니아노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영적 형제’인 그들을 올리브 산에 나란히 묻고 그들 무덤 곁에 지은 작은 움막에 들어가 더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녀 주위로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지만, 성녀 멜라니아는 원장직을 사양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녀는 마지막 소원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로마 대사로 파견 나와 있는 볼루시아누스(Volusianus) 삼촌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436년 어느 날 병환 중인 삼촌의 연락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해 삼촌의 세례를 도와준 성녀 멜라니아는 439년 성탄절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성탄 대축일 전날 베들레헴을 여행하여 추운 날씨 속에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와 수도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해 12월 31일 선종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2월 31일 목록에서 성녀 멜라니아가 남편인 성 피니아노와 함께 로마를 떠나 예루살렘 성지로 가서 수도 생활을 받아들였고, 성녀 멜라니아는 하느님께 헌신한 여성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성 피니아노는 수도승들 가운데에서 지내다가 두 사람 모두 평화롭게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하였다.♣
- 성 피니아노 (Pi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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