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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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디오니시오 (Dionysius)
같은이름 데니스 , 드니 , 디오니시우스 , 디오니씨오 , 디오니씨우스 축일 12월 26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268년
그리스 사람으로 여겨지는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가 259/260년 7월 2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이미 로마(Roma)의 사제로 봉직하고 있었고 그 이전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 교황선거는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교황 성 식스토 2세(Sixtus II, 8월 7일)가 258년 8월 6일 순교한 후 거의 1년 이상 지체되었던 선거였다.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패해 살해된 후 그의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260~268년 재위)가 즉위한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칙령을 내리면서 교회는 한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성 디오니시오는 박해로 인해 파괴된 교회 공동체를 재조직하고 성직자단을 쇄신하고자 했다. 동시에 그릇된 가르침과 이단으로부터 정통 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260년경에 성 디오니시오 교황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인 성 디오니시오(4월 8일)에게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us)와 성자가 성부보다 하위에 있다는 성자 종속설(subordinatianismus) 문제에 관해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이는 성 디오니시오 주교의 글 중에 이런 신학적 문제가 발견된다는 리비아 펜타폴리스 지방 일부 주교들의 고발에 따라 로마의 주교회의를 통해 성삼론(聖三論)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재천명함과 동시에 편지를 보내 해명을 요구한 것이다. 그 후 성 디오니시오 주교는 자신의 새 저서 “반박과 변호”를 통해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성(homousios)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오해를 풀었다. 성 디오니시오 교황과 알렉산드리아의 성 디오니시오 주교 사이의 이러한 편지 교환은 아리우스 이단(Arianismus)과 니케아(Nicaea) 공의회(325년) 이전에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성삼론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성 디오니시오 교황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연대하고 돕는 로마 교회의 오랜 전통을 적극적으로 이어가며 동방 교회와의 접촉을 확대하였다. 페르시아인들과 고트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Cappadocia) 교회에 거액의 복구 자금을 보내어 격려하며 그리스도인 포로들의 몸값으로도 사용하도록 했다. 후대에 성 대 바실리오(Basilius Magnus, 1월 2일)는 성 디오니시오 교황의 이러한 행적을 전하며 동시에 그가 정통 교리를 지켰다고 칭송하였다. 성 디오니시오 교황은 3세기에 가장 뛰어난 교황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박해로 인해 쓰러질 듯한 교회를 성공적으로 재건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박해 시대에 순교자로 기록되지 않은 첫 번째 교황으로 268년 12월 26일 로마에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로마의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26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교회를 위해 많은 노고를 쏟았으며 교리 문헌으로 유명한 성 디오니시오 교황이 묻혔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 있는 칼리스투스 공동묘지에 묻힌 성 디오니시오 교황이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이후 편지와 자선을 통해 포로가 되어 고통받는 형제들을 위로하고 속량했으며,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가르쳤다고 기록하였다.♣
- 성 디오니시오 (Diony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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