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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5년 11월 24일 (월)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토마스 쩐 반 티엔 (Thomas Tran Van Thien)
    같은이름 도마 , 토머스 , 띠엔 , 트란
    축일 11월 24일
    신분 신학생 , 순교자
    활동지역 베트남(Vietnam)
    활동연도 1820-1838년

       베트남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533년경 중국으로 가던 유럽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선교 사업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615년에 예수회가 파견되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베트남의 사도’로도 불리는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는 1623년 성탄절에 이곳에 도착하여 1645년까지 추방과 재추방을 거듭하면서도 수많은 베트남인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645년부터 1886년까지 그리스도교 신자를 탄압하는 칙령이 53건 반포되었는데, 거의 3세기에 걸쳐 혹독한 박해가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약 13만 명이 희생되었다. 박해가 계속될수록 더 잔혹해졌는데, 뜨득 황제(Tu Duc, 1847~1883년 재위) 통치 중에는 선교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거액의 상금을 걸고 사제와 외국인 교리 교사들을 학살하였다. 베트남 출신 교리 교사들의 뺨에는 ‘거짓 종교’를 뜻하는 ‘타다오’(Ta dao)라는 글자로 낙인을 찍어 대중의 경멸을 받도록 했다. 신자들은 재판관 앞에서 십자가를 짓밟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과 떨어져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17세기에 시작된 박해가 계속 이어지고 19세기에도 더욱 잔인한 박해가 계속되자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1862년 베트남을 침략했고, 1883년에 베트남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박해를 종식하였다. 이때까지 박해를 받고 순교한 이들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어 1900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64위가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1906년 5월 20일에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베트남에서 순교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8위를 시복하고, 1909년 5월 2일 20위의 순교자를 복자품에 올렸다. 1951년 4월 29일 네 번째로 25위의 순교자가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88년 6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117위 베트남의 순교복자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안남(Annam) 또는 통킹(Tonkin)의 순교자들로도 불리는 117위의 베트남 순교자들은 출신별로 보면 96위의 베트남인과 에스파냐 출신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선교사 11위 그리고 프랑스 출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위가 포함되어 있다. 신분별로 보면 8위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주교들, 50위의 사제들(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13위와 베트남 출신 37위), 59위의 베트남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 토마스 쩐 반 티엔은 1820년 베트남 꽝빈(Quang Binh)의 쭝꽌(Trung Quan) 마을에서 신심 깊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에 한자를 배우고 교리문답을 공부했으며 미흐엉(My Huong) 본당에서 복사를 서며 미사를 도왔다. 그의 총명함 덕분에 케센(Ke Sen) 본당의 신부는 라틴어를 배우도록 했고, 18살이 된 1838년에는 후에(Hue) 북쪽에 있는 꽝찌(Quang Tri)의 디 로안(Di Loan) 신학교의 학장 신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삼촌과 누나와 함께 디 로안에 도착했는데, 서양 신부를 잡으려고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관리들은 성 토마스 쩐 반 티엔을 포함한 여러 신자를 체포하여 꽝찌 법정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그가 신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살고 싶으면 신앙을 포기하라며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였다. 신앙을 포기하면 관직까지 주겠다는 말에 그는 “저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천상의 권위를 갈망합니다.”라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감옥에서 그는 많은 신자가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금식과 기도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특히 성 토마스 쩐 반 티엔은 함께 갇힌 파리 외방전교회의 성 프란치스코 자카르(Franciscus Jaccard) 신부의 가르침과 조언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감옥을 마치 신학교처럼 만들었다. 민망 황제(Mihn Mang, 1820~1841년 재위)는 1838년 9월 17일 그와 성 프란치스코 자카르 신부의 처형을 승인하였다. 그들은 9월 21일 꽝찌 성벽 밖 탁한강(Thach Han R.) 기슭에 있는 낭비우(Nhan Bieu)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신학생으로서 사제직을 준비하던 성 토마스 쩐 반 티엔은 젊은 시절은 온전히 사랑의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두 순교자의 시신은 관리의 명령에 따라 돗자리에 싸여 강둑에 묻혔다. 두 순교자의 유해는 1847년에 발굴되어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2012년에 베트남 교회는 그들이 순교한 낭비우 처형장에 성 프란치스코 자카르 신부와 성 토마스 쩐 반 티엔 신학생을 기념하는 성지를 조성하였다.

       성 토마스 쩐 반 티엔 신학생은 1900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8년 6월 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116위의 동료 순교자들’의 일원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을 통해 혹독한 박해를 이기고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순교자들의 용기와 신앙심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며, 그들의 축일을 11월 24일에 기념하도록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21일 목록에서 오늘날 베트남 안남(An Nam)의 꽝찌 요새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인 성 프란치스코 자카르 신부와 성 토마스 쩐 반 티엔이 민망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투옥되어 매를 맞고 고초를 겪은 후 결국은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11월 24일 목록에서는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로, 이날 베트남 여러 지역에서 순교한 117명의 순교자를 함께 기념하는데, 이들 중에는 8명의 주교와 많은 사제와 수많은 남녀노소 평신도가 포함되었으며, 그들 모두 십자가를 모독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하기보다는 추방 · 투옥 · 고문 · 극심한 처벌을 선택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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