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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6년 4월 13일 (월)부활 제2주간 월요일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마르티노 1세 (Martin I)
    같은이름 마르띠노 , 마르띠누스 , 마르티누스 , 마틴 , 말딩
    축일 4월 13일
    신분 교황 , 순교자
    활동연도 +656년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토디(Todi)에서 6세기 말경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Roma)로 온 뒤에 부제품을 받았고, 탁월한 학덕과 신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교황 테오도로 1세(Theodorus I)의 대사 자격으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파견되어 그 도시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동시에 그곳에 널리 퍼진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us) 이단을 접하게 되었다. 단의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단지 하나의 의지와 거기서 나오는 하나의 행동만 있다는 이단이다. 그는 649년 5월 14일 테오도로 교황이 선종한 후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교황 선출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승인받던 관행을 지키지 않고 같은 해 7월 5일 교황좌에 올랐다. 그럼으로써 종교 문제에 관한 한 황제로부터 독립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황제가 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교황이 된 후 가장 먼저 단의설 이단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의를 확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즉위하고 몇 달 후에 라테라노(Laterano)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해 단의설 이단을 단죄하고, 단의설 이단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며 교회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자 한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년 재위)의 칙령 엑테시스(Ecthesis)와 콘스탄스 2세 황제(641~668년 재위)의 칙령 티포스(Typos)를 거부하고 단죄했다. 아울러 교회 회의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바오로(Paulus)와 그의 선임자들을 파문했다. 그리고 정통 교의를 담은 20개의 규정을 발표했다. 아울러 결정문 사본을 콘스탄스 2세 황제에게도 보내 이단을 배척해 주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자신의 종교 정책에 대한 교황의 반대와 저항에 대해 격분하였다.

       성 마르티노 1세 교황의 결정은 아프리카와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의 주교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의 주교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부터는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미 파문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바오로 총대주교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티포스 칙령에 서명하도록 더욱 강력한 정책을 사용할 것을 황제에게 요구했고, 황제 또한 자신의 종교 정책에 도전한다고 생각해 즉시 교황을 체포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하도록 라벤나의 총독인 올림피우스(Olympius)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올림피우스는 교황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황제의 명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신임 총독 테오도루스 칼리오파스(Theodorus Calliopas)를 군대와 함께 로마로 파견하며, 교황이 비합법적으로 선출되었기에 파문되어야 한다며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해 오도록 명령했다.

       당시 병중에 있던 교황은 라테라노 대성당에 은신했으나 653년 6월 17일 총독과 군인들이 대성당까지 들어오자, 자신 때문에 로마의 대중들이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 항거하지 않고 황제에게 간다고 선포했다. 그는 6월 19일 병든 고령의 몸을 이끌고 에게해를 출발해 길고도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했다. 낙소스(Naxos)에서 거의 1년 정도 머물렀지만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654년 9월 17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오랫동안 대중의 조롱과 모욕을 받았다. 감옥으로 이송된 후에도 거의 3개월 정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그해 12월 19일에 그는 정통 교의에 대한 심문이 아닌 올림피우스 총독의 반역에 동조했다는 반역죄 혐의로 심문을 받고, 갖가지 정치적 죄목들을 부과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뒤로 감옥에서 다시 3개월 정도 지낸 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간청으로 황제에 의해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크림(Kyrm)반도에 있는 케르소네소스(Chersonesos,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인 헤르손[Cherson])로 떠났다.

       유배지에 도착한 교황 성 마르티노 1세는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잔혹한 대우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656년 9월 16일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다. 선종하기 전까지 그는 로마의 성직자들이 황제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이 유배 중일 때 성 에우제니오 1세(Eugenius I, 6월 2일)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한 것에 대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교회를 참된 신앙 안에 머무르도록 지켜주시며 새로운 목자를 이단과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시신은 유배지 인근 성모 성당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로마의 성 마르티노 성당(San Martino ai Monti)으로 이장해 모셨다. 로마 교회는 정통 교의를 지키다가 유배지에서 온갖 수난을 겪고 삶을 마감한 그를 순교자로서 공경했는데, 그는 교황 중에서 순교자로 공경받는 마지막 인물이다.

       그의 축일은 과거 11월 12일에 기념했으나,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동방 교회와 함께 4월 13일에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2일 목록에서 교황이자 순교자인 성 마르티노가 로마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해 이단자를 단죄했는데, 그로 인해 이단을 옹호하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유배형으로 감형된 후 케르소네소스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 고난의 시간을 보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고, 그의 유해는 나중에 로마로 옮겨져 성 실베스테르와 성 마르티노 성당에 안치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13일로 목록으로 옮겨 교황이자 순교자인 성 마르티노 1세가 라테라노 교회 회의에서 단의설 이단을 단죄했고, 단의설을 지지하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명령으로 총독이 라테라노 대성당을 공격했을 때 교황직에서 쫓겨난 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가 엄중한 감시 아래 감금되었고, 결국 케르소네소스 감옥에 갇혀 약 2년 동안 고난을 겪은 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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