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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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 (Maria Clotilde Angela)
같은이름 글로틸다 , 글로틸드 , 끌로틸다 , 끌로틸디스 , 메리 , 미르얌 , 미리암 , 앤젤라 , 엔젤라 , 클로틸드 , 클로틸디스 축일 10월 23일 신분 수녀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발랑시엔(Valenciennes) 활동연도 1739-1794년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3일 목록에서 프랑스 북부 발랑시엔에서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Franciscus Borgia)의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Maria Clotildis Angela, 또는 클로틸드-조세핀 파이요[Clotilde-Josephine Paillot])와 하느님께 봉헌한 다섯 명의 동료 동정 순교자들이 1794년 프랑스 혁명 당시 신앙에 대한 증오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감탄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단두대에 올라갔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다섯 명의 동료 순교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르술라회(Ursulines)의 성 야고보(Jacobus)의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Maria Scolastica Josephina, 또는 마리-마르그리트-조세핀 르루[Marie-Marguerite-Josephine Leroux])와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Maria Cordula Josephina, 또는 잔-루이즈 바레[Jeanne-Louise Barre]), 다음으로 클라라회(Poor Clares) 출신의 복녀 요세피나 르루(Josephina Leroux, 또는 안-조세핀 르루[Anne-Josephine Leroux]), 끝으로 비르지타회(Birgittini) 출신의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Maria Francesca Lacroix, 또는 마리-리에빈 라크루아[Marie-Lievine Lacroix])와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Anna Maria Erraux, 또는 마리-오귀스탱 에로[Marie-Augustine Erraux])가 그들이다.
이들은 1794년 10월 17일에 먼저 순교한 다섯 명의 수녀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1789~1799년) 중에 발랑시엔에서 순교한 11명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로 불린다. 우르술라회는 수도회의 소명대로 발랑시엔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서 발랑시엔의 수녀들도 수도회와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서 1792년에 인근 국경을 넘어 벨기에 몽스(Mons)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발랑시엔을 정복한 1793년에 몽스로 피신했던 수녀들이 돌아와 학교 문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1794년 6월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발랑시엔은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당시 발랑시엔 수녀원에는 모두 32명의 수녀가 있었는데, 1794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에 혁명군이 입성하면서 모두 체포되었다. 그들은 혁명정부의 법령에 따른 선서를 하고 수녀원을 떠나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는데, 21명의 수녀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혁명군의 요구대로 선서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겠다고 남았고, 정부의 승인 없이 가톨릭 학교를 운영해 법령을 어겼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먼저 10월 17일에 다섯 명의 수녀들이 자신들은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고 당당히 진술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아 단두대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를 포함한 여섯 명도 같은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재판관과 사형 집행인을 비롯한 모든 박해자를 용서한다는 말과 함께 기쁜 얼굴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는 1920년 6월 13일 11명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다. 그들은 순교한 날에 따라 10월 17일과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마리아 클로틸다 안젤라는 1739년 11월 25일 프랑스 북부 모뵈주(Maubeuge) 근처 바베(Bavay)에서 태어나 같은 날 세례를 받았다. 우르술라회에 들어가 수도 서원을 한 후 1790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어렵게 수도회의 소명을 이어갔지만, 어쩔 수 없이 벨기에의 몽스 수녀원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활동을 재개하다가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는 1749년 7월 14일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에서 태어나 발랑시엔의 우르술라회에 입회했고, 혁명의 광풍 속에서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코르둘라 요세피나는 1750년 4월 3일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 근처 사이앙오스트레방(Sailly-en-Ostrevent)에서 태어나 우르술라회의 수녀로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1747년 1월 23일 캉브레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함께 순교한 복녀 마리아 스콜라스티카 요세피나의 언니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하다가 1769년에 발랑시엔의 클라라회에 입회하였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고 수녀원에서 추방되어 친척 집에서 얼마간 지냈다. 그 후 동생이 몽스의 우르술라회 수녀원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원장을 허락을 받고 동생과 함께 지냈다. 복녀 요세피나 르루는 우르술라회 수녀들과 함께 발랑시엔으로 돌아온 후 정식으로 우르술라회의 수녀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발랑시엔을 재점령한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동생과 함께 순교하였다. 복녀 마리아 프란체스카 라크루아는 1753년 3월 24일 모뵈주 근처 퐁쉬르상브르(Pont-sur-Sambre)에서, 복녀 안나 마리아 에로는 1762년 10월 20일 퐁쉬르상브르에서 태어났다. 둘 다 비르지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혁명정부에 의해 수도회가 해산된 후 몽스의 우르술라회로 피신했다가 발랑시엔으로 되돌아온 후 우르술라회에 수녀로서 단두대 위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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