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9)
문학하는 분들과 백두산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백두산 천지를 오르고 난 뒤 숙소로 내려와 큰 식당으로 옮겨 저녁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우리 일행 주변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들이 7~8명 줄을 서서 손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시골스런 옷차림의 소녀들이 가여워 용돈을 건넸습니다. 아이들은 수줍게 제 용돈을 받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우리 일행 중에 대학에서 영문과를 나왔고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교편을 잡고 계시는 자매님이 그 소녀들을 손짓으로 오라고 부르더니 유창한 영어로 무언가 시켰습니다. 그러나 소녀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며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러자 영어 선생님인 자매님은 소녀들에게 영어를 모르냐며 짜증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백두산 꼭대기 시골 마을에서 여느 소녀들과 같이 공부하고 있어야 할 나이에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식당에서 잔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불쌍한 소녀들이 어찌 그 유창한 영어를 알아듣고 대화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 그토록 쉬운 일들이 납득되지 않고 짜증까지 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고, 조금만 배려하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문제들, 더 친절한 사랑의 언어가 나올 수 있고, 따뜻한 다독임을 베풀 수 있었을 텐데…. 왜 상처의 화살을 쏘고 자신도 상처를 입을까요?
요나는 아주까리가 죽은 것 때문에 크게 화를 냅니다. 그렇다면 제게 있어 그 아주까리가 무엇이었는지 성찰해 보게 됩니다. 키 작은 열등감으로 남과 비교하여 화를 내고 질투했던 외모와 신체의 아주까리였는지, 아니면 도시 출신이 아니고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난 세련되지 못함 때문에 가졌던 출신 아주까리였는지, 유명 대학을 다니지 못한 짧은 배움을 탓했던 학벌 아주까리였는지, 동창들은 재주도 좋아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음악과 미술의 특기도 있는데, 난 왜 그러지 못하는지 푸념을 늘어놓은 탤런트 아주까리였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그 모든 아주까리들이 발단이 되어 화를 내었던 옹졸함이 참으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작은 아주까리로 화를 냅니다. 식당에서는 청결함과 반찬 문제로, 음식이 짜고 맵고 싱거워 자기 식성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공공장소에서도 기다리는 문제로, 옆 사람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날씨가 덥다고, 춥다고 씩씩거리며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성당에 와서도 크고 작은 아주까리로 분을 참지 못합니다. 미사 시간이 길어진다고, 사제의 강론과 공지사항의 여러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옆 사람의 미사 참례 자세와 성가대의 목소리 때문에 짜증을 냈습니다. 집안에서도 여러 아주까리들로 인하여, 때론 자녀들 문제, 때론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때론 재산 문제로 화를 내거나 격노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정의를 위한 분노에는 눈을 감았거나 못 본 체 넘어갔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혀야 할 때, 여러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어갔으며 아주 비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가장 큰 권력이며 실세이고 최고 기득권자들인 율법학자, 바리사이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대놓고 지옥에 갈 것이라 으름장을 놓으셨고, 겉은 깨끗해 보여도 속에는 썩은 시체들과 구더기가 득실대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족속들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나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동포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겨우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속죄 제물을 바치려 할 때 성전의 악덕 상인, 장사꾼들, 그들과 결탁한 더러운 사제들에게 속아서 가져온 재산을 다 털리는 광경에 예수님은 참으로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고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마태 21,12-17; 마르 11,15-19; 루카 19,45-48; 요한 2,13-22 참조)
예수님의 분노는 지극히 정의로운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까리와 같은 작은 일에는 쉽게 분노하면서 정의와 환경과 인권과 공정에는 눈을 감았고 비겁했고 때론 동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더구나 자주 핑계를 대며 교묘히 힘든 일에서 손을 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아주까리로 큰 교훈을 얻은 인생의 대선배인 요나가 말을 건네옵니다.
“아주까리는 내 마음속에 들어있는 좁디좁은 담이었습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의 담, 나만 편하고자 하는 편리주의의 담, 성찰도 침묵의 기도도, 희생의 십자가도 없는 지극히 개인주의의 담이었습니다. 이 같은 아주까리의 담장을 허물어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속 아주까리를 치우고 진정 넓은 평화를 살아야 합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