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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9월 19일 (금)연중 제24주간 금요일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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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가타리나 (Catherine)
    같은이름 까따리나 , 카타리나 , 캐서린 , 카테리나
    축일 3월 24일
    신분 과부 , 수녀
    활동지역 스웨덴(Sweden)
    활동연도 +1381년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1331년 또는 1332년에 스웨덴 남부 외스테르예틀란드(Ostergotland) 지방의 울바사(Ulvasa) 농장에서 아버지 울프 구드마르손(Ulf Gudmarsson)과 어머니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의 8명의 자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1335년경 어머니가 친척인 스웨덴의 왕 마그누스 에릭슨(Magnus Eriksson)과 막 결혼한 나무르(Namur)의 블랑쉬(Blanche) 왕비를 도와주러 스톡홀름(Stockholm)의 궁정에 시녀로 들어갈 때 시토회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와 함께 갔던 막냇동생인 구드마르(Gudmar)가 죽은 후 그녀의 부모는 궁정을 떠나서 성지를 순례하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다녀왔다. 순례 중에 병에 걸려 고비를 넘긴 그녀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후 하느님의 은총을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며 인근 알바스트라(Alvastra)의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1344년 2월 12일 선종하였다.

       성녀 가타리나는 14살 때 아버지가 맺어 준 키렌(Kyren)의 귀족인 에가르트(Eggard)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순결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며 남편을 설득해 정결 서약을 했다. 한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어머니인 성녀 비르지타는 재산을 정리해 자녀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고 시토회 수도원 근처로 가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수많은 환시와 계시를 체험한 성녀 비르지타는 1346년 베테른호수(Lake Vattern) 옆 바드스테나(Vadstena)에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Ordo Sanctissimi Salvatoris)를 세웠다. 이 수도원이 일반적으로 비르지타회(Birgittini)로 부르는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1349년에 성녀 비르지타가 교황으로부터 수도회의 설립 허가를 받고 이듬해에 맞이하는 성년(聖年)을 지내기 위해 로마(Roma)로 갔을 때, 평소 어머니의 거룩한 삶을 동경했던 성녀 가타리나도 남편의 허락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길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로마의 일곱 성당을 순례했다.

       희년 대사를 얻기 위해 정해진 성당을 모두 순례하고 스웨덴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성녀 가타리나는 로마에서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에 앞서 성녀 비르지타는 사위의 죽음에 대한 계시를 듣고 딸에게 전해주었고, 이어 남편의 부고를 들은 성녀 가타리나는 어머니와 함께 로마에 머물기로 했다. 그 후 성녀 가타리나는 1373년에 어머니가 선종할 때까지 어머니의 항구한 동반자로서 활동하였다. 로마에서 교회의 개혁과 유럽의 평화를 위해 애쓰던 어머니가 1370년 교황 복자 우르바노 5세(Urbanus V, 12월 19일)로부터 수도회의 설립 인가를 받고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날 때 성녀 가타리나도 동행하였다. 팔레스티나 순례 중에 병을 얻은 어머니는 1373년 3월 로마로 돌아온 후 그해 7월 23일에 선종하였다. 성녀 가타리나는 어머니의 유해를 모시고 10월 7일 스웨덴에 도착했고, 이듬해 7월 4일 평소 어머니가 소망했던 대로 바드스테나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로 운구해 수도자들의 열렬한 환호와 기도 속에 안장하였다.

       그 뒤로 성녀 가타리나는 어머니가 설립한 수도회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수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모두의 요청으로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어 비르지타회를 돌봐야 했다. 동시에 스웨덴 왕실을 대신하여 로마에서 성녀 비르지타의 시성 절차를 추진하였다. 1378년에 그녀는 어머니가 작성한 수도 규칙을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승인받았다. 어머니의 시성 절차는 당시 교회의 혼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1391년까지 지연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살아서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성녀 가타리나는 1380년 바드스테나 수도원으로 돌아와야 했고, 그 후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다가 1381년 3월 24일에 선종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Innocentius VIII)는 1484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허락했고, “로마 순교록”에서 3월 22일에 그녀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했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2일 목록에서 스웨덴에서 성녀 비르지타의 딸인 성녀 가타리나를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녀가 선종한 3월 24일로 축일을 옮겨 스웨덴 바드스테나의 동정녀인 성녀 가타리나가 성녀 비르지타의 딸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 반하여 결혼했으나 남편과의 합의에 따라 동정을 지켰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며 독실한 삶을 살다가 어머니의 유해를 스웨덴으로 옮겨 바드스테나 수도원에 모시고 그녀 자신도 수도자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스웨덴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8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가타리나는 암사슴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녀가 로마의 한 타락한 귀족으로부터 희롱을 당할 때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보호해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웨덴의 성녀 가타리나는 바드스테나의 성녀 가타리나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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