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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6년 2월 22일 (일)사순 제1주일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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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가타리나 (Catherine)
    같은이름 까따리나 , 카타리나 , 카테리나 , 캐서린
    축일 4월 29일
    신분 수녀 , 교회학자 , 신비가
    활동지역 시에나(Siena)
    활동연도 1347-1380년

       성녀 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는 1347년 3월 25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시에나에서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23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성격을 지녔으며,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살 되던 해에 도미니코 수도회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 마리아 ·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한센병(나병) 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 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해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 수도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복자 라이문도(Raymundus, 10월 5일)가 그녀의 고해 사제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영적 친구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성녀 가타리나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도시에서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아 돌봤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튀르키예에 대항하고자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375년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聖痕, Stigmata)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오상은 생전에는 잘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피렌체(Firenze)와 로마(Roma)의 그레고리오 교황 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대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고 우르바노 6세(Urbanus V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 교황(클레멘스 7세)으로 선출하는 사건이 발생해 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났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성녀 가타리나는 단호히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지함으로써 분열을 종식하고 교황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고행과 희생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그녀는 결국 1380년 4월 29일 33살의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선종한 후 오상 성흔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시신은 로마 판테온(Pantheon) 근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sopra Minerva)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기적이 많이 일어나면서 곧 성당 안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 후 성녀 가타리나의 유해 일부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큰 공경을 받았는데, 그녀의 두개골 유해는 출생지인 시에나의 산 도메니코 대성당(Basilica di San Domenico)으로 성대한 행렬을 통해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성녀 가타리나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그녀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PI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866년 교황 복자 비오 9세에 의해 로마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1939년에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 10월 4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이는 그해 9월 27일 아빌라(Avila)의 성녀 데레사(Teresia, 10월 15일)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 학자로 선포된 데 이은 두 번째 경우이다. 1999년 10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 성 메토디오(Methodius, 2월 14일)와 성 치릴로(Cyrillus, 2월 14일) 형제,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 8월 9일)와 함께 유럽의 여섯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지명하였다.

       성녀 가타리나의 축일은 처음에 선종한 날인 4월 29일이었으나 1628년에 베로나(Verona)의 성 베드로(Petrus, 현재는 4월 6일) 순교자의 축일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루 뒤로 옮겨졌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30일 목록에서 로마에서 선종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도미니코 수도회 동정녀로서 삶과 기적으로 유명하며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동정녀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전례력 개정 이후 그녀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4월 29일로 되돌아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29일 목록에서 동정녀이자 교회 학자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알아가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힘썼다고 했다. 또한 평화를 위해, 교황의 로마 귀환을 위해, 교회의 일치를 회복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투쟁했고 탁월한 영적 교리를 담은 유명한 저작을 남겼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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