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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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 (Gaspar Bertoni)
같은이름 가스발 , 가스팔 , 베르또니 축일 6월 12일 신분 신부 , 설립자 활동연도 1777-1835년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는 1777년 10월 9일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에서 부유한 법률가이자 공증인이었던 프란시스(Francis)와 브루노라 라벨리 베르토니(Brunora Ravelli Bertoni)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후 예수회와 베로나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학교에 있는 마리아회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11살에 첫영성체를 할 때 사제가 되리라는 환시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1796년 신학교에 입학한 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북이탈리아가 20년간 점령당했을 때 그는 병원사목을 위한 복음적 형제회에 참여하여 상처 입고 병든 이들, 혁명군의 점령으로 쫓겨나거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1800년 9월 20일 사제로 서품된 성 가스파르는 성 바오로 본당에서 젊은이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는 레지오 마리애의 형태를 빌려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단체는 1807년 나폴레옹의 법령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결국 그는 더 나은 시기에 그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연기하였다. 그는 또한 카노사(Canossa)의 성녀 막달레나(Magdalena, 4월 10일)가 성 요셉 수도원에 세운 공동체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그는 당시 수녀회의 지도신부와 신학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영성 지도자로서 활동하였고 또 잘 알려진 설교가였다. 1810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 피르무스(Pirmus) 본당으로 이동한 그는 주교로부터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부탁받은 후 자신의 사제관에서 잦은 모임을 통해 젊은 신학생들을 영적, 신학적으로 굳건하게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종 목표는 무조건적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한 사제들의 쇄신이었다.
그는 당시 교황 비오 7세(Pius VII)가 나폴레옹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교황을 위한 기도와 지원을 위한 전 유럽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은 언제나 교회의 ‘으뜸이자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이었다.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교회의 재건은 시작되었다. 그는 양떼를 다시 모아야 할 필요성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교우들에게 행해지는 설교를 통해 신앙의 근본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리교육과 설교에 투신하였다.
1816년 11월 4일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의 수도회’(Congregation of the Sacred Stigmata of Our Lord Jesus Christ)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학교를 세워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오상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참회의 공동생활을 했고, 주교의 요청에 따라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교육하고 사제를 양성하며 선교를 위한 설교의 사명을 수행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성모 마리아(Maria)와 성 요셉(Josephus)의 보호아래 수도회를 맡겼다.
성 가스파르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오른쪽 다리의 발열과 계속되는 감염으로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수술을 받으면서도 그는 병원 침대에서 지속적으로 상담자요 영성 지도자로서 봉사하였다. 1835년 6월 12일 그가 선종한 후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베로나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1975년 11월 1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가스파르 베르토니 (Gaspar Berto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