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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4년 12월 12일 (목)대림 제2주간 목요일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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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가에타노 카타노소 (Gaetano Catanoso)
    같은이름 가에따노 , 가에타누스 , 가예따노 , 가예따누스 , 가예타노 , 가예타누스 , 가이따노 , 가이타노 , 가이타누스 , 까따노소 , 카예따노 , 카예따누스 , 카예타노 , 카예타누스 , 카예타누스
    축일 4월 4일
    신분 신부 , 설립자
    활동연도 1879-1963년

       성 가에타누스 카타노소(Gaetanus Catanoso, 또는 가에타노 카타노소)는 1879년 2월 14일 이탈리아 남부 메시나(Messina)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 레지오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의 작은 마을인 코리오 디 산 로렌조(Chorio di San Lorenzo)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8명의 자녀를 둔 부유한 지주이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가에타누스 카타노소는 1902년 9월 20일에 사제품을 받고 1904년부터 1921년까지 펜티다틸로(Pentidattilo)의 시골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예수의 거룩한 얼굴에 대한 지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안’(聖顔)이란 회보를 만들었고, 1920년에는 ‘성안회’(聖顔會)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안은 나의 인생이고 그분은 나를 강하게 한다.”고 말했다.

       1921년 2월 2일 그는 산타 마리아 데 라 칸델라리아(Santa Maria de la Candelaria)의 큰 본당으로 이동하여 1940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으로서 부정적인 본당의 현실에서 평화롭고 부지런히 봉사하여 사람들로부터 성성(聖性)을 인정받았다. 그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한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항상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사목적 배려에 맡겨진 모든 이들의 선익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하였다. 사실 그는 펜티다틸로의 시골 본당에서 사목하는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칸델라리아의 큰 본당으로 발령받았을 때에도 그는 전혀 우쭐하지 않았다. 그는 칸델라리아의 본당신부로서 신앙의 활력을 주는 성체성사와 성모신심을 통해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또한 교리교육을 장려하고 신성모독과 축일들의 남용에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가에타누스 신부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는 모범이 되는 사람을 찾지 못해 타락할 위험에 처한 어린이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노인들과 별도의 지원 없이 외로움에 놓인 사제들을 돕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폐허가 될 때까지 방치된 성당과 감실들을 복구하였다. 간단히 말해 그는 고통 받는 모든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버림받은 고아들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 모든 활동을 합시다. 도처에 너무도 많은 위험과 비참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버림받은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우리의 시선을 돌립시다. 오늘날 인간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윤리적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는 종종 감실 앞에서 여러 시간 또는 하루 종일 보내기도 했고, 본당 안팎에서 성체조배를 장려하였다. 또한 전문적인 사제모임을 구성하여 강론과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며 본당사목을 돕도록 하였다. 1921년부터 1950년까지 그는 종교 기관과 레기오 칼라브리아의 교도소에서 고해신부로 활동했다. 그리고 병원 원목신부와 대교구 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서도 봉사했다.

       1934년 가에타누스 신부는 ‘성 베로니카 딸들 수도회(성안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항구한 보속의 기도, 겸손한 봉사, 교리교육 그리고 어린이 · 젊은이 · 사제 · 노인들에 대한 원조를 그 사명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수도회는 레기오 칼라브리아의 리파로(Riparo)에 세워졌다. 교구의 대주교가 수도회의 활동에 대해 제한을 가했을 때도 그는 모든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결국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1958년 3월 25일 교구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는 1963년 4월 4일 모범적인 삶을 마치고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그는 1997년 5월 4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카예타누스 카타노소(Cajetanus Catanoso)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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