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27)
“우리 성당, 좋은 성당”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이유는 결코 소공동체,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것이 소공동체의 목적이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함이다.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교회를 먼저 복음화해야 하고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자기 복음화’이다. ‘자기 복음화’를 이루기 위하여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해야 하는 것이 가장 필연적인 선결 과제이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것을 필자는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란 어떤 성당인가? ‘좋은 성당 이란 ‘다니고 싶은 성당’이라고 필자는 지금까지 말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 해는 소공동체 사목을 하면서 본당 사목 지침을 “우리 성당, 좋은 성당”이라고 정한 때가 있었다.
사제 생활 동안 필자를 가장 슬프게 만든 것은 “저는 신부님 때문에 이 성당을 떠납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필자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저는 신부님께서 저희 본당 주임사제라는 것이 참으로 행복합니다.”는 고백을 들을 때였다. 실제로 본당은 주임사제의 역할에 따라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주일헌금이 달라진다. 물론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주일헌금 정도가 그 본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성당이 복음화 되고 신자들이 열정과 생기를 느끼고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성당은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되면서 주일미사 참례자 수와 주일헌금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당은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성당이 되어야 하는가? 소공동체를 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본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공동체를 한다. 그 말을 어려운 말로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화 된 성당을 일컫는데, 복음화 된 성당이란 어떤 성당을 말하는가? 필자는 앞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교회를 어불성설의 교회가 되게 했단 말인가? 복음화는 교회의 여러 가지 어불성설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어불성설의 첫 번째가 바로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그리고 ‘복음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사목하거나 가르치고 또한 신자들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 나머지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면서 심각한 사실이다. 그리고 냉담자가 교적상 신자들의 3분의 2 수준에 이르면서 교회는 자꾸만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 대구대교구 본당의 90% 가량이 고령화 본당이다. 이유는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혹은 말씀이 없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7-1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회는 끊임없이 식별하여, 일부 관습들이 복음의 핵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관습은 비록 오랜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이제는 예전과 똑같이 이해되지 않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일부 관습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러한 것들을 재고하여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43항)
어불성설의 둘째 이유는 아직도 우리 교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성직자들이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래서 본당은 본당신부가 꽉 잡아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머물러 있는 사제들이 많아 보인다. 만일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지 않으면 본당은 엉망이 되거나 황폐된다고 걱정하고 있는 사제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실시한 교황 방한 후속 심포지엄에서도 “사제가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다 하는 구조로는 교황님의 권고를 이행할 수 없다. 신자들도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교회가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갈 때 생기는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가톨릭신문, 2014.11.2)며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질을 개선하여 ‘평신도의 의사결정권 확대’가 필요함을 말했다. 하루 빨리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벗어나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됨으로써 평신도들로 하여금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들이 결코 주임신부의 심부름꾼이나 보조자로 소극적이며 피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미숙아 수준의 평신도가 아니라 사목의 동반자이며 복음화의 주역임을 깨닫고 평신도로서의 자발성을 찾아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가장 큰 숙제이다.
지금까지 연재해 오면서 소공동체가 안 되는 교회, 즉 어불성설의 교회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면서 우리 교회가 소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위기의 교회’를 말하였다. 여전히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열심히 읽어 주었고 많은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외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를 펴낸 배경민 신부는 저서에서 말했다. “시대적 요구 상황에 대처하도록 힘쓰면서, 교회는 지금까지의 선교관과 교회론을 보강하고, 성령의 참신하고 새로운 말씀과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고 따르며, 전통적으로 실행하여 오던 교회의 존재 역할의 지평을 새롭게 추구하고 확장시켜 가야 할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지금까지의 존재 범주를 훨씬 넘어, 시대의 표징을 간파하면서, 새로운 지평과 경계를 찾아 가야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움에의 도전 정신을 보다 심도 있게 체득해야 함을 당면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 7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예수님의 첫 기적도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었다. 이는 ‘내가 세상을 바꾸러 왔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성전으로 가셔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2,19)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셨다. 소공동체는 미래의 새로운 교회됨의 유일한 답이 틀림없다. 레지오 마리애도 좋지만 미래 교회의 답이 되기에는 부족함과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미래 교회의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새 패러다임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장래성이 없는 상품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소공동체로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우리 성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 “특별기고 - 왜 소공동체인가?”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연재해주신 제2대리구장 박성대 교구장대리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월간빛, 2014년 12월호, 박성대 요한(대구대교구 제2대리구장, 교구장대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