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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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이콘산책3: 단 하나의 얼굴은 말씀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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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23 ㅣ No.1042

[김형부 마오로의 이콘산책] (3) 단 하나의 얼굴은 말씀과 빛


‘그리스도 모습의 이콘에 신성 표현 될 수 있나’ 수백 년간 논쟁

 

 

 

- (그림3-1) 예수 그리스도: 밀랍, 84 x 45.5cm,  6세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이집트. 

헬레니즘 색채가 깃든 초기 이콘, 코를 중심으로 엄위한 얼굴과 인자한 얼굴로 표현한 듯 보인다. 오른손을 들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신다.

 

 

박해 받던 초대 교회엔 예술 작품 거의 없어

 

당시 그리스에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 넘쳐났고, 예술은 신을 표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교회에는 하느님에 대한 예술 작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2코린 6, 16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울릴 수 없다’는 유다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때에는 교회 자체가 작고 가난했으며, 그리스도에 관해 설명할 사도가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지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년경부터 교회 상징물 등장

 

200년경부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때에 이르러 도장 반지에는 비둘기, 물고기, 배, 닻 등이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카타콤바에 여러 가지 상징물들과 초기의 이콘 형태가 나타나게 됩니다. 죽음과 관련한 풍습에서 유다인은 시신을 매장했는데, 그리스도인들도 유다인의 관습에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가까운 시일 언젠가 육체와 영과 결합해 부활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마태 24,29-31; 루카 21,25-28) 따라서 무덤은 부활의 장소였기 때문에 잘 가꾸었으며, 적당한 상징물을 새겨 넣었습니다. 당시에는 종말이 곧 오고, 부활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림 1-1, 1-2, 1-3)

 

 

- (그림1-1) 팔마 가지: 돌 비석, 2세기, 아피아 카다콤바, 로마, 이탈리아. 

초대 교회 신자의 무덤 비석에 죽음에 대한 승리의 표시로 팔마가지를 새겨 넣었다. 십자가 표시와 더불어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아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그림1-2) 배 모습: 돌 비석, 2세기, 노렌조 카타콤바, 로마, 이탈리아. 

배는 그리스도와 다른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와 개개인의 삶을 평화로이 저어가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비둘기는 그리스도라는 문자적 상징을 바라보고 있다.




- (그림1-3) 물고기 모습: 돌 비석, 2세기, 성 세바스티안 카타콤바, 로마, 이탈리아. 

묻힌 사람의 이름 양옆에는 닻과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닻은 희망을 붙잡아 두는(히브 6,19 참조) 뜻이며, 물고기 익투스(Ichthys)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들의 첫 글자의 조합이다.

 

 

관에 그려 놓은 밀랍화, 초기 이콘에 영향

 

이집트 파이윰 지방에서 발굴된 관 중에 본인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이집트 지역까지 점령했던 때가 있어 그 시대의 회화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훗날 본인의 무덤을 위해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두었습니다. 안료에 밀랍을 개어 그렸고, 이것을 밀랍화 또는 엔카우스틱이라 부릅니다.

 

이 밀랍화들은 현대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화와 같은 느낌을 주며 당시 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이콘은 이 밀랍 회화 작품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그림 2)

 

 

- (그림2) 파이윰 초상: 밀랍, 55 x 21cm, 프쉬킨 박물관, 모스크바, 러시아. 

파이윰(이집트) 지방에서 발견되는 밀랍화 중 하나로 황금 올리브 가지를 쓴 젊은 사람의 모습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

 

그 후 온 인류를 구속하실 분은 누구인지 신학적 해석과 논의를 거쳐, 죄의 용서와 구속의 개념을 확립하게 됩니다. 즉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분은 하느님 자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 결과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심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포하게 되었습니다.(그림 3-1) 그러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림3-2) 성 베드로: 밀랍, 93 x 53cm, 6세기,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이집트. 

앞의 그리스도의 이콘과 함께 헬레니즘 색채가 있는 초기의 이콘이다. 따라서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위쪽의 초상화는 메달 형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확실하지 않지만, 성 스테파노로 추정하고 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 표현

 

라틴-비잔틴 시대에 하느님의 현현(顯現)¹)을 느끼기 위해 서방 교회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교회 내부의 아름다움, 거룩함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거기와 비교해 동방 교회에서는 성인 성녀와 천사들을 표현한 모자이크, 프레스코, 이콘으로 벽면을 장식함으로써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그림 3-2)

 

 

- (그림4) 세 교부: 템페라, 90 x 58cm, 17세기 중반, 빈 미술사박물관, 빈, 오스트리아. 

촛대를 들고 있는 분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긴 수염은 대 바실리우스, 둥근 수염은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다.

 

 

이콘 둘러싼 찬반양론

 

그런데 하느님에 대해 너무 두렵고 경건해서일까요?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이콘을 가정이나 교회에 걸어두는 것에 대해 반대해온 신앙인도 많았습니다. 초기의 교부 중에도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누스는 히브리적인 금기의 영향으로 이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²)와(그림4)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는 찬성하는 편이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미온적이었습니다.

 

그 후 찬반양론에 의해 많은 이콘은 파괴되고 다시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핵심은 그 인성만으로 보여지는 그리스도 모습의 이콘 안에, 과연 하느님의 신성이 표현될 수 있을까 하는 논란이었습니다. 이콘으로 표현된 ‘단 하나의 얼굴’이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논리는 수백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이콘을 보호하려는 이콘 옹호론자(주로 수도원)들은 나름의 타당성을 주장합니다. 그 타당성은 뒤에 나오는 ‘이콘의 타당성의 논란’ 장(章)에서 설명하기로 합니다.

 

각주

1) 보이지 않으나 실제로 나타남, 또는 있다는 것을 느낌

2) 대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월 21일,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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