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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의 군종 사목1: 전쟁에서 평화를 찾고 돌봄의 문을 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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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군종 사목 · 1] 전쟁에서 평화를 찾고 돌봄의 문을 열다 (1)
전쟁과 분쟁은 죽음과 파괴의 씨앗을 뿌리면서 여러 형태의 집단 이기주의,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증을 독버섯처럼 창궐하게 하여, 애덕과 연대로 지탱해 온 평범한 생활과 일상적인 사회를 무참히 파괴한다. 비상식적인 상황 전개는 지역과 국가, 경제와 문화 모두에 나침반 없는 항행을 강요한다. 적과 동지의 구별도 어려운 수많은 사람들까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잃고, 일자리마저 잃는다. 뿌리 뽑힌 삶으로 인해 모든 사회관계에서 돌봄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군인 이상의 군인을 찾는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군인이 우리에게 절실해진다. 국가도 신자 군인을 찾게 된다.
모든 군인이 ‘정의와 평화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경제를 생각해 전쟁을 축소하고, 외교 수단으로 분쟁의 원인을 찾아내어 평범한 생활을 되찾고 일상적인 사회로 되돌아가 이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어린이들이 보호되고 청소년들의 교육이 지속되며 행복한 가정, 경제적 독립, 인간적 존엄이 일상화된다. 그렇게 되면 애덕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고, 연대로 소외되고 배척되어 온 ‘불편한 손님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
이 어려운 일을 신자 군인들이 앞장서 감당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참된 군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신자 군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과 조직들을 우리가 도와야 한다. 군인 아닌 사람들이 신자 군인들의 노고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신자 군인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일은 쉬워진다. 무장을 하고 전투 훈련을 하며 폭력적인 수단들을 관리하는 군대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영적 지원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 교회의 도움이 커질수록 전략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군대의 효율성은 올라가고, 효과적으로 자원을 관리해야 하는 국가 경제의 성장성과 안정성은 위축되지 않는다.
이 글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이 땅에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외국인 선교사와 수도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꾸어 온 그들의 신앙과 복음 정신을 한반도의 사회적 억압 · 폭력적 전쟁 · 패권적 분단 지속 · 전쟁 위협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왜, 어떻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생명력을 키워왔는지 네 차례의 짧은 글로 살펴보고자 한다.1) 이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한반도 주변 상황을 고려한 가치 중립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히브리 역사와 복음적 통시성을 성경 중심 인사이트로 비추어 보려 한다. 올리브 산에 앉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재난의 시작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맞닿아 있다.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마태 24,6).
1. 전쟁과 분단의 벽에 갇혀 길을 찾는 한반도
대한민국이 가진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과 기업가 정신, 그리고 북한의 학습 노력과 광물자원이 제대로만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면, 한반도는 실크로드보다 길게 펴진 러시아 · 중국 · 인도를 넘어 유럽과 아프리카로 연결되어 산업을 일으키고 일자리를 더 많이 나눌 수 있다고 꿈꾸어 본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과 분단의 벽을 남·북한 교류와 협력의 문으로 바꾸면 간단한데. 두 국가와 국민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잠재적 이익이 왜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영화 「한산」의 이순신 장군 독백이 생각난다. “만약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 큰 용기로 나타날 것이야.”
올해로 맞는 한국 천주교회 240년, 수난과 갈등의 역사가 사실, 380년 굳센 보편교회 수용 전통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아쉬움에 그늘져 있다. 명·청 교체기에 광해 임금이 펼친 등거리 중립 외교가 1623년 인조반정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뭉개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이어 1636년의 병자호란은 볼모로 잡힌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무너진 명(明)과 부흥하는 청(淸)나라를 국제 외교 현장에서 지켜보며, 외국어를 배우고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게 하였다. 독일인 예수회 신부 샬 폰 벨( 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은 중국교회의 성직자 부족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당당하게 조선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천문과 역법 실력으로 조선을 놀라게 하여 1651~1664년 기간에 청나라에서처럼 자유롭게 전교하고 중국인 신자 10만 4,980명2) 대신 같은 수의 한국인 신자를 만들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상상은 자유다. 1645년(인조 23, 청 순치 2) 6월 26일에,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갑자기 숨을 거두고, “몸이 전부 검은 빛”이라고 『인조실록』(제46권)은 기록한다. 조선의 한반도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날 기회를 잃는다.
1) 용과 여인
한반도가 전쟁과 분단의 벽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자 군인이 늘어나게 되면, 한반도는 길을 찾고 해방된다. “어린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 17,14).
2) 로즈 장학생들
냉전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구 소련을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진영 간의 이념 대결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제질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소련이 공산주의를 포기한 199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이다.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깊게 경험한 지역 중 하나다. 광복 직후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임시로 주둔했고, 1946년까지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타협적인 방식으로 통일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1947년 3월 미국이 위협적인 소비에트 공산주의 확장에 맞서 싸우는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냉전(cold war)은 공식화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냉전 시기 최초로 벌어진 열전(hot war)이었다.
한국전쟁은 냉전 시기 내내 양 진영의 대리전이었다. 평화 협정이 없어 아직까지도 진행되는 전쟁이다. 한국전쟁이 열전으로 시작되자마자,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함께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규모로 참전했고, 공산 진영에서는 중국의 대규모 파병 및 소련의 배후 지원이 이루어졌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양 진영 모두 원하지 않아 전쟁은 한반도 안에 묶였고, 38선을 넘어 서로의 땅을 뺏으려는 치열한 공방이 전쟁의 잔인성과 폭력성을 통제 불능으로 만들었다. 현재에는 용서도, 화해도, 참회도, 속죄도,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 남북한의 분단선 철조망이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파고 살점을 찢어 낸다. 그래서 분단의 아픔과 어리석음을 표현한 어느 예술가는 ‘철조망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지도 못하고 74년째 신음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우리의 아픔을 묘사하였다. 한국과 북한은 아직도 십자가 위에서 철조망 가시관을 쓰고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형국이다. 냉전체제를 유독 한반도에서만은 미국과 소련 모두 풀어주지 않고 있다. 이들 모두를 역사의 법정에 세워 남북한 스스로 해방의 권리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 뿌리는 전쟁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책상물림 전쟁 기획 엘리트들이었다. 증거가 있다. 지도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가 2015년 4월 3일, 『주간조선』에 기고한 「38도선을 그은 로즈 장학생 세 사람」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 운명의 방향은 1945년 8월11일 새벽 2시에 결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하와이가 피격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1944년 11월 29일, 전시 작전의 효율과 속도를 높이고자 국무성과 전쟁성, 해군성에서 중견 엘리트 관료를 차출하여 3성 조정위원회(State-War-Nary Coordinating Committee)라는 비상 기구를 만들었다. 그 첫 글자를 따서 SWNCC(swink, 애칭 ‘스윙키’)라고 불렀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국무성 대표 던(James C. Dunn, 국무장관 대행), 전쟁성 대표 맥클로이(McCloy, 전쟁성 차관), 해군성 대표 바드(Raph A. Bard, 해군성 장관 부관)였다. 던은 유럽 외교가에서 잔뼈가 굵은 직업 외교관이었고, 맥클로이는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지금의 CIA 전신인 해외전략국(OSS)을 창설하고 국가안보회의(NSC)의 책임을 맡은 실세였다. 바드는 전직 은행가로서 해군성에 투신하여 차관 직책을 맡고 있는 원폭 전문가였다.
이 협의체가 전시에 필요했던 모임이기에 여기까지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세 부서에서 유능한 인재를 차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로즈 장학생들을 중심으로 3성 조정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같은 또래의 조지 링컨(Geoge A. Lincoln, 1907~1975),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1909~1977), 딘 러스크(Dean Rusk, 1909~1994)가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이 곧 학설이었다. 그들은 ‘괴벽스럽고 까칠한(off beat and eccentric)’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자만이 너무 쉽게 분단과 전쟁을 만들었다.
38도 선에서 분할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10초의 시간이 걸렸다. 이 분할안은 합동참모본부(UCS)와 3성 조정위원회를 거쳐 3개 부처 장관인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 스팀슨(H. Stimson) 전쟁성 장관, 포레스털( J.V. Forrestal) 해군성 장관에게 보고된 후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으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한반도를 분할하면서 왜 하필이면 38도 선이었을까? 분단선이 39°만 되었더라도 한국전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중요하다. 38°선 분할의 피해 당사자인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미국 청년 장교 2명의 경솔함과 오만이 개탄스럽다. 한반도는 둘로 찢겨나가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 영토에 편입되어 통일국가의 정체성은 유린되고 말았다.
3) 전쟁 공포
![]() 황해도 신천(信川)에서의 비극은 해방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신천은 이북 지역 제일의 곡창지대인 재령평야에 맞닿아 있다. 신천의 어러리벌과 재령의 나무리벌은 조선시대부터 왕실 산하 궁방전의 일부로, 하급 관료나 마름 계층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 사업을 거친 후에는 토지 대부분이 총독부와 일본 기업 소유가 되었다가 이들에게 불하되거나 판매되어 관리나 마름 출신 지주 부농 중농 계층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지형적 · 지리적 · 경제적 · 산업적 고려가 없는 38°선에 따른 이북 지역의 소련군 진주가 교육열과 기독교 세가 강한 신천에서 저항을 받으면서, 외세에 의존하는 무산 계급과 천주교 교단과 개신교 교회와 학교에 뿌리를 둔 유산계급의 갈등은 전쟁 공포로 증폭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은 것이다.
신천군 학살사건은 한국전쟁이 벌어진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에서 민간인 35,538명이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끔찍한 신천 학살이 과거에는 신천 10·13 반공 의거라고도 불렸으나,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이라고 부르며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엄연한 민간인 학살 현장은 주검과 기억으로 존재하였으나, 학살의 주체를 두고 북한 정부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대한민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북한 정부는 신천군 사건의 주체를 미군으로 지목하며, 학살 현장에 신천박물관을 건립하고, 자국 체제 유지를 위한 반미(反美) 교육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쓰고 있다.
4) 변화된 사람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유엔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 죽음을 강요하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승리를 목표로 하는 전쟁의 의미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상대가 살육에 지쳐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무조건 밀고 들어오는 죽음과 죽임만 남는 전쟁은 끔찍하다. 1950년 12월 15~24일 열흘간 동부전선 함흥시 흥남항(興南港)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을 피난민과 함께 구출시킬 목적으로 실행된 대규모 철수 작전이 흥남 철수 작전이다. 이 작전은 큰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도 불렸다.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 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Leonard P. LaRue, 1914~2001)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워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절박한 피난길이었지만 사람들이 많아 비좁은 그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보았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 …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 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신앙 체험으로 1954년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 수사로 2001년 10월 14일, 87세로 선종할 때까지 평생을 봉헌하였다. 2019년 5월 25일, 뉴저지의 패터슨 교구장 아더 요셉 세라텔리 주교는 ‘하느님의 종’ 라루 선장 마리너스 수사의 시복 재판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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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후 연재될 세 편의 소제목은 “2. 생명의 길을 만들어 준 미국 군종 신부들의 영웅적 헌신, 3. 희망의 빛이 된 천주교 군종 사목 사업과 군종후원회 활동, 4. 전쟁 인내 체험을 성화하는 해외 파병 평화 유지 영적 투쟁”이다.
2) 정수일,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3.
[교회와 역사, 2024년 4월호, 정진호 프란치스코(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경쟁력평가원 원장)] 0 13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