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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모동굴에 스며든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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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모동굴에 스며든 마음 그런데 거대한 성당 건물도 사실은 신자들의 작은 정성과 노력이 모여져서 이룩된 것이다. 1948년 『경향잡지』 통권 999호에는 하양성당의 소년소녀들이 힘을 모아 성모굴을 짓는다는 기사가 있다. 즉 남시몬, 김도마 등 소년 50여 명이 “러시아와 조선을 구원하는 뜻으로 성모당을 만들어 드리자.”라는 결심 하에 매일 학교를 파하고 성체조배를 하러 오는 길에 돌 한 개씩을 주워오기로 했다. 또 그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매일 미사참례와 성모경 다섯 번 외우기를 계속했는데, 과연 미구에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때 전루시아, 이안나 등의 소녀들도 성모동굴이 완성되고 조선의 총선거가 천주의 의향대로 성취되도록 날마다 미사 끝에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했다. 일제말엽 천주교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공소를 방문하거나 전교를 위해 움직일 때는 일일이 주재소에 신고를 해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선교사들은 적성국의 첩자로 간주되었고, 몇몇 신부들은 경찰에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평신도들조차 ‘요주의’ 인물로 지목됐다. 그러던 중에 8.15 광복이 왔다. 이때 교회는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과 함께 관할하던 만주교구, 그리고 원산교구가 공산치하에 들어가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교회매체에 세세히 보도되었고, 신자들은 기도로 함께 극복하고자 했다. 1948년 하양본당 주임 강찬형 신부는 시국을 걱정하며 공산 러시아의 회개를 예언한 파티마 성모의 메시지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소년소녀들의 순수한 마음은 나라를 걱정했고 성모께 의지했다. 위 기사의 남시몬은 현재 미국에서 사목하는 남해근 신부이다. 하양성당은 남해근 신부 외에도 그의 사촌들인 남해윤 신부와 남순자, 남봉자 수녀들을 배출했다. 남귀희 수녀도 이곳 출신이다. 한편 전달출, 전석재 신부도 하양성당 출신 성직자들이다. 따라서 기사에 실린 전루시아도 두 전 신부의 친척으로 보인다.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1918년 교구청 내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장소에 성모당을 지었는데, 성모님이 발현했던 프랑스 루르드의 동굴을 본떠 만들었다. 이곳의 벽돌 구조물은 교황 레오 13세가 로마 바티칸에 재현했던 루르드 동굴과 같았다. 성모 석상은 성모께서 베르나데타에게 당신 성명을 가르쳐 주실 때의 모상이다. 동굴 정면의 글씨는 드망즈 주교가 직접 새겼다. 드망즈 주교는 현재 성모당 옆에 동상으로 다시 태어나 성모동굴을 마주보고 있다. 드망즈 주교는 “교황의 분부를 모시고 조선 남방 주교 지방으로 작정되어 올 때에 요긴히 세울 것이 많되, 재정이 없는 것을 보고 대구에 온 후 첫째 주일인 1911년 7월 2일 루르드 성모를 조선 남방 주보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을 세우게 되면 성모동굴을 지어드리겠다고 약속드렸다. 주교는 이 약속에 따라 성모당을 지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처음의 약속을 이룬 곳이며, 은혜의 표징이고 살아있는 신심의 표현이 되었다. 이날 드망즈 주교는 “이 세상에서 성모를 열심히 공경함으로 영혼과 육신의 은혜를 많이 받은 후 천당에 가서는 성모의 석상이 아니라 베르나데타와 같이 성모를 친히 뵈옵고 성모와 한 가지로 영원히 있기를 바라노라.”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모신심은 뿌리 깊은 나무의 열매였다. 드망즈 주교는 다블뤼 안돈이 주교를 존경하여 안세화라는 한국명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의 성모신심은 그야말로 지극했다. 1846년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참수치명했던 병오박해를 겪으면서 공주 수리치골로 피신해 갔는데 이곳에서 ‘성모성심회’를 창설했다. 또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구 안에 있는 사목구역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일련의 명칭을 부여했다. 경상도에는 ‘성모 취결례 구역’과 ‘성모 승천 구역’이 있었다. 이 바탕은 바로 다블뤼(1818~1866) 주교의 신앙체험이 구체화된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신학교 시절, 수위가 그를 찾다 없으면, 아마도 지나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성모님의 성화 앞에 그냥 머물러 기도하고 있을 거라고 추측할 정도였다. 그는 1841년 사제서품을 받고 신학교 지하경당에서 첫 미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특별히 ‘승리의 성모성당’의 경당에서 미사를 올렸다. 또 다블뤼 신부는 선교지 조선으로 떠나기 전 고향인 아미엥으로 가서 자신이 첫영성체를 했던 성당 내 성모 칠고(七苦) 경당에서 고향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그의 아버지가 복사를 서고 남동생만 참여한 조촐한 미사였다. 이 경당은 아미엥의 첫 번째 선교사제로 순교한 파르미노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져 있었다. 성모당의 동굴에 모실 성모상이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을 떠나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80여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다행히도 얼굴과 손 부분은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드망즈 주교는 깨진 조각들을 제자리에 다시 붙이고 시멘트로 수선하도록 애쓰셔서 완벽하게 복원했다. 이처럼 시작부터 시련을 이긴 이곳의 성모님은 특별히 대구대교구의 간청을 들어주고 있다. 6.25 한국전쟁 등 국가나 교회적으로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신자들은 이곳에서 성모께 전구를 청해 왔다. 신자들은 오늘도 이곳에서 성모님의 손을 잡고, ‘복음 전체의 요약’인 묵주기도를 올리며 늘 칭얼거리는 아이가 되고 있다. 교구 여러 본당에 있는 성모동굴은 그 오랜 성모신심의 역사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도움 : 하양성당, 『성 다블뤼 주교의 생애』)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8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0 2,418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