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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현대문화 트렌드: 패스트푸드에서 패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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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330

현대 문화 트렌드 - 패스트푸드에서 패스트로!

 

 

패스트푸드 문화와 미식 열풍 필자가 사는 아파트촌에서 가장 번화한 자리에 버티고 서있던 다국적 브랜드의 한 햄버거 가게가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다. 3년 전 이 동네에 처음 이사왔을 때만 하더라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늘 북적이던 이 가게가 없어졌다는 것은 자그마한 충격이었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늘 유리창 저편에 진열해 놓았던 캐릭터 인형을 두고 아이들과 치렀던 신경전이 없어져서 홀가분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듯했던 저 거대한 햄버거 가게가 문을 닫게 된 이유가 제법 궁금하기도 했다. 

 

작년 11월에 국내에서도 개봉된 <슈퍼사이즈 미(Supersize Me)>라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새삼스럽게 햄버거가 얼마나 우리의 육신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이 회사는 비만과 관련한 송사로 한때 모든 패스트푸드의 대부로서 톡톡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것은 국내에서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 열풍과 맞물려서 지속적인 매출 부진을 낳았고 상당수의 점포가 폐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 이제 패스트푸드를 제공하는 이 다국적 체인망은 전반적인 하락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당연히, 너무나 성급한 질문이다. 실제로 다른 패스트푸드 기업들의 매출은 오히려 늘어난 곳도 있고, 사업 확장을 공언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 질문이 더욱 우문인 것은 패스트푸드 문화가 우리 삶의 곳곳에 아주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세련된 마케팅 기법과 엄청난 광고비를 투입하면서 지속적으로 동일한 현실을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의 대중교통, 신문과 텔레비전의 매스미디어, 각종 인터넷 사이트 등 오늘 우리의 삶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패스트푸드를 소비하라는 권고와 유혹을 받고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이에 초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잠시도 거기서 눈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무차별적인 광고의 홍수는 우리의 의식을 점진적으로 장악하고 내면화해서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현대의 음식 문화에 자발적으로 적응하게 한다. 

 

패스트푸드는 당연히 빠르다. 그것은 아주 즉각적으로 우리의 식욕과 칼로리를 충족시킨다. 이미 패스트푸드에 알맞게 길들여진 우리의 미각은 더 나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맛을 보장함으로써 행복을 편재시킨다. 우리는 어떤 다국적 기업의 햄버거나 피자를 먹으려고 특정 지역의 특정한 가게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맛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즉각적인 욕구 실현, 동일한 행복의 선취는 능률과 효율성의 극한적 추구에서 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오늘날 햄버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전문적인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막 일을 시작한 아르바이트 학생이라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로써 고용주는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한 맛을 고객에게 선물하고, 값싼 노동력을 상시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맛만으로는, 그 제한된 메뉴만으로는 고객의 행복을 오래 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영악하게 알고 있다. 그리하여 어린이 고객의 눈을 잡아끌고자 다양한 장난감을 내걸고, 개별 메뉴보다 조금 더 비싼 세트 메뉴를 추천함으로써 더 높은 칼로리를 제공한다. 사람들의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몸무게만큼 이것을 치유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늘어만 가고 있다. 

 

웰빙 문화와 비만에 대한 염려로 패스트푸드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늘어나면서 최근에는 미식 열풍이 거세지고 있다. 불황임에도 경치 좋은 대도시 교외 지역의 모텔, 카페촌은 물론이고, 농어촌 구석구석까지 수많은 음식점들이 화려한 간판을 걸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과거에 신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전국의 맛집 찾기 시리즈는 현재 여러 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낳았고, 포털 사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요리 연구와 맛집 안내를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패스트푸드가 주로 매스미디어의 광고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전파되었다면, 오늘의 미식 열풍은 미디어의 본 프로그램 안에서 자발적으로 조성되고 있다. 

 

각종 미디어들이 앞 다투어 식도락을 전파하고, 이것이 다시 수많은 음식점을 낳는 이 악순환의 상황은 전국을 온통 음식점으로 뒤덮고야 끝날 것이다. 이제 음식점 순례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맛 지도에 의지해서 자가용을 타고 나선 미식 탐험가들의 보물찾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음식점들은 어느 미디어에 소개되었다는 것을 간판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음식점들 가운데 많은 수가 패스트푸드의 전략을 적극 받아들여 체인점을 여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신만의 독특한 맛과 향을 자랑하던 음식점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맛을 낼 수 있는 체인점을 추구하다니. 

 

이런 면에서 보면 기존의 패스트푸드 문화와 현재의 웰빙·미식 열풍 사이에는 차이점보다는 유사점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심지어 반패스트푸드 운동의 성격을 지닌 슬로우푸드라는 이름이 웰빙이라는 이름의 상업주의에 이용되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한번쯤은 정말 진지하게 우리 사회의 외식 문화 전반에 대한 성찰적 문제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가정 밖에서의 외식을 강제하는 사회 시스템과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식, 기도, 자선

 

앞에서 살펴본 대로 패스트푸드 문화와, 그것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미식 열풍은 현대적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속도와 효율성의 숭배, 채움에 대한 강박, 말초적이고 가시적인 행복 추구 등은 바로 이런 경향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은 사회적 비만의 창궐이다. 현대의 비만 현상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예방의학자와 사회학자들의 말대로 사회적 질병이다. 한 사회와 개인에게 적절히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음식을 생산하고 있는 거대 음식 산업과 그에 공모하는 미디어들은 엄청난 광고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과도한 영양 섭취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 그 산업을 계속적으로 가능케 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엄청난 규모의 환경 파괴 행위와, 천문학적 다이어트 비용은 이미 어떤 한계를 넘어선 느낌이다. 

 

그러나 얼마 전 결식 어린이들에게 부실 도시락을 제공해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듯이, 이 풍요한 음식 세상의 한편에서는 아직도 적절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해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텔레비전 속에 등장하는 제3세계의 현실 이외에도 ‘지금 여기’, 온갖 다국적 패스트푸드 기업과 국내 식료품 대기업들이 해마다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화려한 미식 열풍이 미디어를 중심으로 몰아치고 있는 우리 사회 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날 비만과 그 반대편에 있는 결핍은 모두 이와 같은 사회적 죄의 결과는 아닌가 하는 어떤 암울한 징후를 느낀다. 

 

이런 징후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치인 단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단식은 사회적으로 어떤 저항과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또 비만에 따른 치료 요법으로, 그리고 뉴에이지 계열의 수련 형태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외적인 형태가 유사하다고 그 본질마저 같을 수는 없다. 단식은 본래 그리스도인의 내적 참회 양식이다. 성서와 교부들은 기도, 자선과 함께 단식을 강조하였다(토비 12,8; 마태 6,1-18). 단식, 기도, 자선은 각각 자신에 대한 회개, 하느님께 대한 회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회개를 나타낸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34항 참조). 특히 교회는 사순시기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과 하느님, 그리고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필요한 단식과 자선을 기억한다. 

 

이 사순시기에 우리의 인식과 실천은 패스트푸드(fast`-`food)적인 것에서 패스트(fast, 단식)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채움의 쾌락’을 능가하는 ‘공복의 기쁨’이다. 미각을 통해 즉각적으로 매개되는 만족감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 조건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인간의 참 행복은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고, 더 궁극적으로 나아갈 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식’을 통해 진실로 자신과 맞대면하고, ‘기도’를 통해 비로소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뵙고, ‘자선’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는 이웃을 만난다. 오늘날 지나친 미각의 만족이 비만이라는 사회적 질병을 낳았다면, 단식과 기도, 그리고 자선은 스스로와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삼중적 차원 아래서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궁극적 대안이 될 것이다.

 

[사목, 2005년 3월호, 엄재중(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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