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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전례와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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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361

전례와 관상1)


옛 영성저술가들은 기도를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라는 말로써 정의하곤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반드시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기도는 하느님 앞에 머무는 단순한 태도를 뜻하며, 원칙적으로 그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Fiat voluntas tua.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신약성서의 첫 기도는 청원의 기도가 아니라 수락의 기도였다. Fiat mihi...,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그러므로 기도는 하느님께 “예”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예”라는 그 짧은 말조차 꼭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떠나지 않고 제단 가까이, 신비의 식탁 앞에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범이신 성모님처럼 십자가 아래 머물러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기도라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안에 영접하려는 원의인 만큼, 그것은 동시에 기다림이요 기대이며, 추구요 갈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더욱이 무엇보다 먼저 그분 자신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기도를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로 뚜렷이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소론에서 소위 “기도의 단일성”에 관한 것만 다루려 한다. 먼저 이 단일성의 근본적 이유를 상기시킨 후에, 이어서 전례와 관상이라는 기도의 두 가지 기본적 형태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밝히려 한다.


1. 신비로서의 기도

가장 단순한 실재들이 가장 풍요롭다. 하느님은 지극히 단순한 분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느님과 함께 하는 활동도 한없이 단순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활동은 한없이 다른 형태를 지님으로, 한없이 서로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개성적인 일이므로 하느님의 교회 안에 있는 영혼의 수만큼 많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같은 영혼이 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똑같은 기도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같은 모양으로’ 창조하시지도 구원하시지도 않으신다. 즉, 우리 각자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개별적이고 고유하며,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역시 그와 같은 친교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따로따로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신적(신적) 공동체, 한 몸, 신비체가 되게 하신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바로 교회이다.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혼자서 전체 교회를 이루지는 못하나, - 비록 우리 개개인이 교회의 직분을 모두 이행하지는 못할지라도 - 교회의 모든(구원의) 신비는 우리 개개인 안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불가피하게 교회의 기도요, 교회 안에서 함께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기도가 하나의 신비가 되는 때는 바로 이 순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도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개성적이고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적인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는 어떤 고립된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자 기도할수 없으며, 또 하느님의 현존 안에 홀로 있을 수도 없다. 하느님과 나, 둘만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 우리의 모든 형제들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 자연 우리는 그들 안에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가 지닌 개성적이고 우주적인 양상간의 이 이율배반이야말로 하나의 커다란 신비이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려 하기보다 차라리, 이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이를 생활화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기도는 신앙의 신비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은총을 은총으로, 죄라는 것은 우리에게서 은총을 빼앗는 것이라고 그냥 믿는 것처럼, 기도는 하나의 신비라고 우리는 그냥 믿는다. 그러므로 때때로 기도의 큰 신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쇄신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기도는 하나의 신비이므로 그것을 안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기도 중에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중단하고픈 유혹이 들 때, 이 기도의 신비에 대한 믿음은 기도를 계속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이기 때문에 신비이다. 중요한 것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분은 우리 안에 사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기도이다. 예수께서 성부의 모상으로서 이 세상에 사셨던 것처럼, 지금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성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신다. 그분은 성부를 받아들이고 성부를 흠숭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셨으며, 또 보내고 계시는 성령은 기도의 성령, 기도하시는 성령이시다.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단순한 상태요, 필연적으로 침묵의 한 형태인 것이다.

성 바오로는 계속해서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라고 말하고 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탄식’ : 우리가 아무리 기도에 대해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기도의 본질적인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도는 언제나 초월적이고 탁월하며 고매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성자께서 성부를 받아들이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받아들임이 곧 사랑이다. 사랑이란 두 의지가 서로 동의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성 베르나르도가 “동의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하느님께 동의하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는 결코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며, 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구원이 신비이므로 기도도 신비이다. 기도는 구원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처럼 기도를 믿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실 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우리가 구원을 믿는 것처럼 기도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 하느님과 그분의 신비에 대한 동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동의, 우리를 위한 구원사업에 대한 동의라는 기도의 이러한 개념들은 기도의 여러 국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도는 구원의 은총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바로 감사행위(gratiarum actio)이다. 또한 기도는 이 은총을 보다 풍부히 받기를 갈망하는 것이므로 청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 바오로는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98,22-23)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목적은 충만한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제사로 이루어졌으며, 이 제사는 성찬 안에 현존한다. 따라서 모든 기도는 성찬의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기도는 성찬을 지향하고 성찬으로부터 그 가치를 지니며, 성찬과 영성체에서 그 절정과 의미 그리고 완전한 면모를 지니게 된다.

또한 기도는 단순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태도를 포용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분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기도의 완전하고 근본적인 개념을 상기해야만 우리는 기도가 지닌 상이한 형태의 단일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 안에 두 개의 똑같은 기도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각기 독특하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참여하시는 모습(곧, 은총)도 사람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도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는 놀라울 만큼의 단일성을 지닌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시요 절대무한이시기 때문에 다양성을 지니시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 3위가 한분이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단일성을 지니시는 것과 같이, 결국 같은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모든 이 안에서 기도하시므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개인적 상태에서 동일한 구원을 받는다.

기도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기도의 본질에는 놀라운 단일성이 있다. 그러므로 “아빠! 아버지!”라는 말로 이루어지는 특유하고 단순한 신비가 인간적인 양식 즉 보통의 말마디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말마디가 결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될 수 없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실천하는 사람이어야 들어간다.”(마태 7,21)라는 말씀을 상기하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를 지니고 사는 동안 아직 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기도가 지닌 상이한 형태와 표현의 단일성, 즉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 신비로운 단일성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무엇보다도 ‘하느님 자신의’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서는 기도의 전형적 출처요 원천이 되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 사용될 모든 말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성서가 있기 때문에 기도는 감사의 제사(an eucharistia)가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그분께 다시 돌려 드리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으로 그분께 말씀드리는 셈이다.

나는 이제 전례와 관상이라는 근본적이고 전통적인 기도의 두 가지 형태 안에서 이 사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려 한다. 먼저 전례에 대해 잠시 고찰한 다음에 관상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2. 성서적 기도인 전례

전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집전하는 것이다. 꼭 전례는 어떤 표상들이나 이론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였고 구원하고 있는 사건, 곧 구원의 사건들을 집전하는데 이 사건들이 바로 신비인 것이다. 그중 가장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사건이 빠스카,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이며, 다른 것들은 이 신비를 준비하고 계속케 하거나, 이 신비의 내용, 결과 및 그것의 풍요함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이다.

이 모든 신비가 이루는 것은 신학적 논제의 어떤 체계나 연속이 아니라 역사이다. 전례는 거룩한 역사를 포함하고, 쇄신하며,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이 거룩한 역사의 은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유리를 통하여 희미하게 드러나는 신앙에 의해서, 또 성찬이 그 첫 자리를 차지하는, 거룩한 표지인 여러 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전례는 신비의 집전인 동시에 그 자체가 바로 하나의 신비이다. 신비는 우리를 능가하고 초월하는 것이므로 신비인 이 집전 역시 말을 초월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적 인간이고 사회적 인간이므로 우리에겐 표현이 필요하고 또 말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신비를 그대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께 우리는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하느님 자신의 말로 말씀드릴 수 있다. 전례가 성서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무진장의 내용이 담긴 성서에서 적합한 것들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행동과 문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예절이라 할 수 있는 이 교회의 전례는 거의가 성서에서 영감을 받았거나 성서에서 취한 것인 만큼 성서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전례는 성서에서 취한 독서와 찬가의 연속이다. 이 둘은 - 그 중에서 특히 독서는 - 신비의 내용을 가르치며 또한 - 특히 찬가는 - 우리의 감사, 우리의 열정, 사랑을 표현한다.

이러한 전례적 표현의 두드러진 특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詩이다. 성서가 시적(詩的)이며 또 신비는 우리 인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이 그 이유이다. 우리는 신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똑똑히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그것을 암시하고 환기시킬 수 있을 뿐인데, 시는 신비를 회상시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Paul Claudel은 “모든 것은 암시이거나 환상”이라고 말했다. 사실 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암시, 하느님의 표지가 될 수 있고 또 되기 마련이다. 즉 각 사물은 하느님과 그분의 신비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례의 목적이다. “성사는 바로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례 안에서 어떤 표징은 충분한 효과를 낸다.”

우리는 성서의 언어가 어떤 이유로 전례적 신비에 완전히 적합한가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건대 전례는 신비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이다. 시에서 말은 언제나 그 말마디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실재를 암시하고, 말 자체와 말이 지닌 일반 내용을 훨씬 초월하는 영적 체험들을 (시)자신의 표현양식으로 표현 가능케 한다.

A. Bermond는 “기도와 시(Priere et Poesie)”라는 훌륭한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도와 시의 고유한 역할을 심미적 체험에 의한 영적정화 - 그가 Catharsis라 일컫는 것을 불러일으키고 고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는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탁월한 영적 능력을 자유롭게 한다. 또 우리를 들어 높이고 우리 자신을 초월케 한다. 기도, 특히 전례적 기도도 그렇다. 미사경과 성무일도는 이에 견줄 다른 문학이 없을 정도로 문학적 아름다움을 집약한 걸작품이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전례는 신비의 초월적 미를 표현하기 위해 성서의 모든 아름다움을 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의 공현 축일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공현을 기념하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때 전례의 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우주성의 개념을 단조롭게 전개하지 않는다. 즉 그때의 사건들을 시적으로 서술하며, 어떤 사람이나 말이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사건들을 장엄하게 환기시킨다.

이날 층계송은 이렇게 노래한다. “타르시스와 섬나라 왕들 예물을 바치고 사바와 세바의 임금들이 봉물을 바치리니, 세상의 임금들이 모두 다 조배하며 만백성이 그이를 섬기리이다.” 그러고 나서 복음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온 사실과 아기를 하느님으로 경배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세히 말해 준다.

이 층계송의 시편과 복음의 근사성은 사변적 방법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예수의 우주적 왕권의 신비를 신자들에게 충분히 암시해 주고 있다. 또 이날의 미사는 전례 중에 사용하는 말로써 매일의 성찬례에서 실현되는 신비를 설명해 준다.

교회의 예배가 시적인 이유는 예배의 대상인 신비와 예배의 표현인 성서의 언어가 인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양자는 우리를 초월하고 능가한다. 이 때문에 전례는 매우 어려운 것이며, 또한 전례가 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올바르고 탁월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보물처럼 보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우리가 너무 많이 이해하려 하는데서 어려움이 생기는 것 같다. 실제 우리에겐 이해보다는 오히려 참여가 필요하다. 성 베네딕도는 이에 관해서 놀라운 말을 했다. 성무일도를 위해 상세한 규정을 제시한 다음 그는 성무일도 중에 수도자가 취할 태도를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 Mens nostra concordet voci nostrae”(RB 19장)라고 말했다. 그는 전례를 묵상기도(Mens nostra 우리 정신이 바치는 기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묵상기도는 우리가 성서 안의 하느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그것에 동참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요구하는 것에 우리의 정신을 조화시켜야 한다. 교회가 우리를 위해 말씀을 선택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동의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전례는 바로 이런 것이다. 따라서 전례는 순종이고 포기이며, 그것이 완전한 제사이기에 예배인 것이다. Henri Gheon은 “우리 자신이 택한 말은 버리고 하느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찬가에 순종하자”고 말했다.

전례는 겸손이다. 전례에서 우리는 기도와 교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뒤로 사라진다. 하느님께서 전례의 주례자이시므로 우리는 “예, 아멘” 하고 대답하거나, 계시록에 나오는 하늘의 성인들처럼 “알렐루야”라고 노래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 정신과 우리 혀의 이 조화는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교회 정신과의 조화이다.

우리는 옛 저술가들이 예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왜 그렇게도 경외심을 가지고 말했는지 이제 이해할 것 같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에는 “기도할 때 가질 경외심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장이 있다. 이 경외심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일반적 태도요 놀라움과 두려움(사랑과 겸손이 내포된 성서적 의미로서의 두려움)의 일반적 태도이다. 긴 예절동안 완전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존경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전례를 이루는 동작 및 행동에 결합하는 것은 훌륭한 기도의 분위기, 시적인 분위기, 육체와 영혼을 지닌 전 인간을 포용하는 영의 높은 경지 같은 훌륭한 분위기를 만든다. 전례는 심리적 분위기보다는 영적 분위기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계속해서 참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어렵지만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Georges Goyau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큰 분심”이라 일컫는 기도의 한 형태가 있다. 역설적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말이다. 사실, 전례에 요구되는 것은 정성어린 태도이지만, 어떤 때 적어도 어떤 참석자들(예절 담당자, 성가 지휘자 등)은 말마디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을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시적인 말마디와 표징 및 태도의 결합은 교회기도의 걸작이며 동시에 인간적 및 신적 문학의 걸작이다. 이것은 시편에서 잘 나타난다. 시편은 항상 어려운 문제, 어려운 기도로 여겨졌었다. 그래서 성경소구, 요약, 주석, 주해, 시편, 기도서, 특별히 시편제목, 현존하는 여러 교부 편집 등, 그리스도교 초세기부터 시편집과 관계있는 많은 준성서 문학이 있어왔다. 시편의 제목들은 각 시편에 대한 주석의 윤곽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그리스도교적이고 시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인 주석 - 예를 들어 Vox Christi 그리스도의 소리, 혹은 Vox Ecclesiae 교회의 소리 등 - 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시편의 머리글에 있는 몇몇 제목들은 시편들이 기도로 쓰이기에는 언제나 난해한 것으로 여겨졌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아직까지도 교회는 이것들을 보존하고 있으며 주제의 정신을 바꿀 생각을 하는 것 같지 않다. 만일 시편이 기도의 완전한 방법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시편은 교회가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들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기도의 형식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시편찬가(Laus Psalmorum)에는 위대한 문학전통이 있다. 그것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는 Cassiodorus로 그의 책은 중세기에 자주 복사되었다. 시편은 실로 문학의 걸작이요 기도로 존속한다. 교회는 모든 이들과 모든 상황에 시편보다 더 적합한 기도의 형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러 시편을 연달아 낭송할 때, 그것은 우리의 영을 더 높이 들어 올리고 기도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와 비슷하게, 시편 덕분에 전례는 기도와 시의 기적적인 더 나아가서 카리스마적 조화를 이룬다. 성서 없는 전례가 어떠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될 때 전례가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전례가 단순히 신심 행사의 집합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이해하기 쉬울 것이나 감상적인 것이 되어, 영적으론 별 도움을 주지 못 할 것이다. 더욱이 한 시대나 한 사람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어 훌륭한 가톨릭 전례가 지닌 시적이고 우주적인 특성을 잃게 될 것이다.

역시 전례 없는 성서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성서는 살아있는 책도, 살아있는 가르침도 아닐 것이고, 교회가 성무일도와 성찬 중에 우리에게 주는 참다운 음식도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집회에서 간혹 냉랭함과 공허감, 비애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 집회에서도 어떤 책을 몇 페이지 읽기는 하지만 그것이 활기찬 독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전례가 없기 때문에 행동도 성사도 또 실재도 없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 되도록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례 중에 교회가 우리를 통해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과 우리의 정신이 조화되게 한다.

말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말마디를 발음하는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다음과 같은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말을 했다. “Sola quae cantataudit, 노래하는 영혼만이 참으로 듣는다.” 그렇다면 우리도 교회의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노래하자. 하느님의 말씀을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3. 성서읽기와 묵상

우리가 만일 잠정적으로 이른바 “묵상”에 관한 전통적 견해를 참작한다면, 우리는 Mens nostra concordet voci nostrae라는 말을 이미 전례적 기도에 적용한 것처럼 묵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전례는 행위에 참여하는 육체와 함께 마음, 정신 및 온 영혼이 입술로 발음하는 말, 즉 하느님의 말씀과 조화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로써 우리는 전례가 어떻게 묵상기도가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묵상은 입술이 발음하는 말과 정신이 일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이 논거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기 위해 몇 가지의 정의를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묵상에 대하여 “잠정적으로” 논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잠정적”이라는 말마디가 기도의 행위 중에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세 가지 다른 실재, 더 나아가서는 세 가지의 다른 국면 혹은 계기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lectio 독서, meditatio 묵상, oratio 기도이다.

1) Lectio : 독서

관상기도 때 기도행위의 기본적 국면은 lectio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독서, 즉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lectio divina 혹은 거룩한 독서라 일컬어졌으며 또 그 대상이 성서이기 때문에 divina 신적 독서라고도 불렸다.

중세나 고대 교회에서도 한결같이 성서는 주석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lectio divina는 성서 뿐 아니라 expositores(해설자)라고 불린 교부들의 성서주석도 포함한다(교부들은 성서를 설명한 이들이다).

중세기에 와서 이 lecto divina라는 용어는 카롱링 시대의 성 베르나르도 등 소위 “현대” 저술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예를 들어 Bouyer 신부나 de Lubac 신부, 그리고 근본적으로 성서만을 설명하는 다른 많은 이들의 저서에도 같은 용어가 적용될 수 있다.

2) Meditatio : 묵상

묵상은 독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독서의 방법에 관한 한, 아주 근대까지 눈보다 입이 독서하는데 더 큰 역할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서는 쓰여진 것을 봄으로가 아니라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신체의 행동은 혀와 입술의 움직임으로써 시작되었고,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문장을 알아들었다.

정확히 말해서, 묵상은 단어들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의인의 입술은 지혜를 묵상하고 그 혀는 의를 이야기하도다”라는 미사의 아름다운 입당송을 보라. 지혜를 묵상하는 것은 입술이다.

교부시대와 중세시대 때처럼 성서시대에 있어서도 묵상은 기억의 훈련이었다. 즉 성서구절을 반복하여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감상하고 맛보는 것이 묵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Sapientia, id est cognitio vel lectio sapida”(지혜는 체험적 지식이며 깊이 음미한 독서의 내용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권장함으로써 보존되는 이 묵상방법은 다시 말해, 성서를 최대한 반복하여 그 말마디 하나하나를 숙고하고 반추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언어의 역할과 시각의 역할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그냥 소리 내어 읽는다. 우리가 사고할 때나 독서할 때 비록 무의식일지라도 우리 자신들도 근육의 기초적 운동, 심리학자들이 “laringo-vocal(후두음)”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드러낸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으로 볼 때 미리 읽어 두거나 동시에 읽는 lectio divina없이는 묵상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나 성서주석 없이는 묵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3) Oratio : 기도

기도는 앞의 두 행동이 있으면 으례 또 저절로 이루어진다. 옛 사람들의 경우, 묵상은 독서를 하거나 성구의 뜻을 생각하는 중에 생기는 반응과 대답에서 나왔다. 그리고 lecto divina의 모든 과정은 심리학의 규범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기도(Oratio)에 관하여 말하는 고대의 여러 많은 자료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중 몇 개만 인용하겠다. 성 베네딕도는 기도가 짧고 순수(brevis et pura)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한 까시아노와, 또한 성 베네딕도 사상의 원천이 된 전통 저술가들에 따르면, 순수하다는 것은 “분심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옛사람들에게조차도, 분심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도가 순수하려면 그것은 짧아야 한다.

6세기 아일랜드의 성 골롬바노는 이렇게 기록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방법은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에 지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적 힘과 물리적 조건과 더불어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야 한다. 즉 자신의 제한성을 고려해야 하며, 필요한 정도와 열성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현실화해야 한다.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가장 옛 주해자인 힐데마르(Hildemar)는 9세기 때 동방과 서방 전통의 주해를 썼다.

동방에는 기도를 자주 그리고 짧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헛된 생각에서 해방될 수 있을 때만 기도에 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을 당하고 있거나, 기도 중에 기쁨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바로 일어나 다시 독서나 시편암송 혹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Lectio, Meditatio, Oratio, 곧 독서, 묵상, 기도라는 세 가지 영적 활동의 자연적이고 평이하며, 자발적이고도 즐거운 연속이다. 독서, 묵상, 기도에 따라오는 즐거움은 각기 자신의 방향을 지닌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감이 oratio를 마련할 때까지 lectio와 meditatio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을 성 안셀모의 “Meditations” 서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서하는 이는 어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고 서두를 필요가 없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거나 어떤 즐거움을 주리라고 판단되는 것만을 읽으면 된다.

독서의 목적은 기도를 불러일으키는 젓이다.

이러한 증언들은 역시 성서 없이는 전례도 없고 묵상도 없다는 것을 전통적으로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의 모든 양식이 지닌 통일성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기도의 모든 양식에 통일성이 있음은, 모든 기도가 같은 책, 곧 성서에 의존하며 또 이 성서를 하느님의 이 말씀에 조화시킴으로(Men nostra concordet voci nostrae) 성립되기 때문이다.


4. 기도의 상태

전례와 묵상이라는 기도의 두 양식을 현대의 영성저술가들은 “기도의 상태”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lectio divina는 주님과의 개인적 친교를 준비하고 이 친교를 마련한다. 어느 때 우리는 영혼을 하느님께 열어 놓고 대화하기 위해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이 대화는 침묵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몇 마디 말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성 베네딕도는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non in clamosa voci,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대화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읽고 맛보고 맛 들였으며 또 사랑하는 말씀과 단순한 조화를 이루는데 있다. 그리고 대화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친교에 이르는 것이다. 이 영적 친교는 그 자체로 인격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어떤 책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친교로 간주된다. 순수한 기도는 체험으로 간주되므로 순수한 기도의 순간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있어야 하고 또 실상 존재한다. 우리는 이 체험적 순수한 기도를 알고 믿어야 하며, 또 기다리고 바라야 하고 갈망하고 청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거절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 은혜는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만큼 인격적인 것이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이 은혜는 마치 어떤 이가 공식기도를 하는 것처럼 공동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은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 정도로 주어질 뿐이다.

이 체험은 독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례에서도 얻게 된다. 전례에 이어 혹은 전례 중에 내적 침묵과 참된 잠심 및 하느님과 친교하는 순간이 있다. 이와 같은 순간은 독서 후에도 있게 되는데 이 때야 말로 성 베네딕도가 말한 순수한 기도를 맛보는 때다. 고대 수도 관습서를 보면 수도자들은 이 침묵의 기도를 보통 저녁, 끝기도 이후에 했다고 한다. 하루의 일과 책임 및 중요한 일을 마친 후 비로소 잠심 중에 지내고, 평화 중에 기도하며 주님과의 개인적 친교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래서 수도자들은 장상의 지시에 따라 잠시 동안 혹은 은총의 힘으로 오랫동안 (성 베네딕도가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가대에 머물렀다. 오늘날, 관습이나 지역에 따라 이것은 다른 시간에 이행되지만, 대개 개인적으로나 공동으로 아침에 행해진다.

이 순수한 기도의 순간은 하늘나라의 침묵을 미리 맛봄이요 우리에게 완전한 즐거움이 될 하느님과의 친교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이 없다면, 현세생활은 무미하고 공허할 것이다. 옛 사람들이 일컬은 바 짧은 화살기도는 자발적으로 정상적인 행동이 되어야 하고, 또 말하자면 우리의 정상적인 분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특수한 일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당신 자비로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와 같은 주님께 드린 말씀이나,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와 같은 주님께서 용납하신 말씀을 주님께 아뢰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영혼을 스스로 자유롭게 해야 한다.


5. 고대와 현대의 방법들

이제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기도방법과 묵상에 관한 현대적 체험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 충분히 밝혀야 하겠다. 도리어 전통은 현대적 방법과 수단에 생기를 불어넣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전통적 설명에 의하면, 기도로 이끌어 주는 lectio는 교육, 더 나아가서는 신학 교육을 위한 독서와 같은 유도 아니고, 어떤 이의 사상을 배우거나 혹은 어떤 지혜가 담긴 책이나 신심서적을 속독하는 유의 독서도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읽고 묵상하는 그러한 독서이다. 그것은 고요히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이를 확신과 순수한 마음으로 반복하며, 그러는 중 자신을 잊어버리고 짧은 관상을 통해 즐거움을 발견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였음을 보여주는 복음(마태 26,44)에서도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의 예와 형식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사상이나 성서구절을 회상하거나 거창한 추상적 이론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거룩한 말씀으로 살아가기 위해 말씀 속에 편안히 머물러 쉬기 위함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수월하고 천천히 또 끈기있게 되씹고 속삭이는데서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께 아뢰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를 바친다.

이러한 lectio divina는 참으로 성찬의 독서, 감사의 메시지, 성찬의 기도가 된다. 겸손과 존경심을 갖고 읽는 거룩한 독서가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제사, 즉 그분이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유일한 제사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와 그분의 복음에서 나오는 기쁨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성사를 통해 먼저 체험했던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파고든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동의와 수용의 태도이며, 기도하는 이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전 존재로써, 또 우리의 인간조건 안에서 구원의 신비를 받아드려야 한다. 성찬은 신비의 완성이다. 그것은 어떤 형식이나 실례가 아니라, 바로 신비의 실현이다.


6. 단순성

결론은, 전례적 기도와 묵상의 공통된 특성은 단순성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심리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사랑,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또 기도를 위해서 우리에게 말들을 제공하는 교회에 대한 사랑, 같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기도하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만을 요구한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가 받은 성령께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신비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생각하거나 우리 자신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강생, 그리스도의 생애 등 하느님의 신비를 숙고하는 것이며 -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생애와 죽음과 영광을 통해 실현한 구원신비의 신학적 의미를 숙고하는 것이며 - 성령과 교회와 성찬과 동정 마리아를 숙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놀라운 우리의 신앙과 신조는 모두 참되고 깊고 무진장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중창(duet)이다. 기도는 문제를 제기하고 대답을 듣거나 우리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간의 교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하느님의 소리에 조화시키고, 우리의 소리를 그분의 소리에 일치시키는데 있다. 오직 노래하는 영혼만이 참으로 듣는다.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RB 19.7)

(코이노니아 제8집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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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nastic Studies 10호(Easter 1974) (Mountain Saviour Monastery, Pine City, N. Y.)에서 번역한 글임.
2) 룩셈부르그의 끌레르보 수도원(the Abbey of Clervaux, Luxembourg)의 수도승.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글 
Jean Leclercq, O.S.B2), 이 마르띠노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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