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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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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1 ㅣ No.1178

[복음살이]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성탄과 연말, 새해를 앞둔 요즈음 마음에 와 닿는 단어 중 하나는 “희망”입니다. 새해에는 올해와 다른 근본적인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희망을 갖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 대해 갖는 희망의 토대는 아직 불안합니다.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의 가치가 지켜지는 사회가 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기에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의 불의와 사회적 병리에 대한 경험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뇌물수수와 횡령 등 정치권의 부정과 공권력의 남용, 대기업의 횡포와 서민경제의 몰락,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 장애인?노인?빈민 등 복지 소외층의 고통,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비롯한 생명윤리의 실종, 청년들의 실업과 좌절, 아동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강력범죄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온갖 부정적인 사회 현상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악 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도 무너져 버린 지 오래입니다. 논문 표절과 학력 위조, 정치 고위층의 부당한 청탁과 압력, 입시문제 유출,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 및 정관계 뇌물 공여, 군 면제를 위한 병역 비리, 국제학교에 편법 입학을 위한 고위층 자녀들의 국적 세탁 등등 자신의 경제적 이익, 성공, 치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위 ‘총체적 도덕불감증’이 뿌리 깊이 퍼져있습니다.

국제투명성기구가 작년 12월1일 발표한 ‘2011년 부패인식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0점 만점에 5.4점을 기록해 183개국 중 43위를 차지했습니다. 10점에 가까울수록 부패가 적은 것인데, 우리나라는 2008년 5.6으로 최고점을 찍은 뒤 3년 연속 하락하는 추세입니다. 더구나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34개국 가운데 27위로 경제력에 비해 청렴도가 여전히 낮은 등급에 머물렀습니다.


불의와 부패에서 빠져나오려면 ‘회개’ 요구돼

이처럼 절망적이고 부끄러운 모습을 지닌 우리 사회의 변화와 구원을 위해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과연 새해에는 개개인과 우리 사회 전체의 전도된 가치관이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과연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는 우리나라를 공정하고 정의롭고 공동선이 실현되는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참된 정치를 기대하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런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칠까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불의와 부패와 비리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즉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을 구원해 주실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회개는 곧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주신 참된 가치관, 곧 정의, 자유, 진리, 평화, 사랑 등과 같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7, 31-33). 이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과 쾌락, 권력에 집착하여 결국은 헛되게 사라질 거짓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가치와 하느님께서 올바르게 여기는 일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더 “희망적”인 사회가 되고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과 성공을 따른다 하여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의 기준으로 손해 보고 바보 취급을 받더라도 하느님의 법과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과 영적인 충만함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 실천적 믿음이 우리 사회에 구원을 가져다 줄 희망입니다.


‘희망’은 ‘신앙’과 똑같은 의미

2007년 11월 30일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은 ‘사랑’에 관한 첫 번째 회칙에 이어 ‘희망’을 주제로 한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반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우리의 현재가 비록 고달파도 희망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그 어려운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든든한 희망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고 나서 교황님은 ‘희망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희망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교황님은 이 ‘희망’이 ‘신앙’과 똑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가진 이후의 삶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황님은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희망을 얻는 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잘 알고 계신 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은 세상의 어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지니게 하기에, 그 희망으로 ‘구원’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교황님은 사회 혁명, 진보와 기술, 과학 같은 물질적 요소나 현세적인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거기서부터 오는 희망은 거짓이라고 단언합니다.  교황님은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내적 변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참된 희망이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교황님은 현세에 고통 받는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신앙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과 친교를 이룬다는 것은 곧 ‘모든 이를 위하는’ 그분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가라고 당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기적인 불의와 부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그리스도를 닮아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교황님은 이런 삶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합니다. “흔들리는 이들은 바로잡아야하고, 소심한 이들은 위로해야하며, 약한 이들에게는 힘을 주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잘못을 지적해주고, 간계한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지한 이들은 가르쳐야 하고 게으른 이들은 독려해야 하며,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은 다독여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자기 분수를 지키게 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은 일으켜 주고, 다투는 이들은 화해시켜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도와주어야 하고, 억눌린 이들은 해방시켜야하며, 선한 이들은 격려해야하고 악한 이들은 참아주어야 합니다. [휴!]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4세기 혼란 속에 있었던 로마령 아프리카의 심각한 현실에서 이렇게 희망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이시며 정의를 이루시는 분

교황님은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올바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과 또 우리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을 여는 내적 정화의 과정을 겪게”되며,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내 양심은 일깨워지고 더 이상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애쓰지 않”게 됩니다.

둘째는 활동과 고통입니다. 작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사랑의 힘으로 굳건히 지탱하며 주어진 과제에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활동이 다른 이들을 위한 희망을 낳습니다. 한편 우리가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을 줄이려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피하는 데서가 아니라 고통을 수용하고, 그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며, 고통당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고통의 참된 의미를 찾는 능력을 얻고 결국 치유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심판입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전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 삶을 바로 잡는 기준으로, 양심의 소리로, 또한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한 희망으로 날마다 삶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하느님은 정의이시며 정의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위안이고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희망’에 관한 가르침은 지금 불의와 불안과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적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새해에는 그리스도인이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구원의 참된 희망을 확고하게 지니면서 우리 사회를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존중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2년 12월호, 
박정우 후고(신부, 서울 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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