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약력, 그 짧고도 긴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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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의 ‘나눔’] 약력, 그 짧고도 긴 이야기
교구에서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장례미사를 봉헌하게 되면, 고별식에서 돌아가신 분의 약력을 소개합니다. 약력은 한 사람의 일생을 요약한 것을 의미합니다. 선종하신 신부님의 상본 뒷장에 실린 약력을 읽다 보면, 한 사람이 살아온 한 평생의 삶을 어떻게 몇 줄로 다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서울대교구는 관례에 따라 홍보담당 사제가 선종 사제의 장례미사 중 고별식에서 약력을 소개합니다. 제가 이 임무를 맡게 된 이후 많은 신부님이 선종하셨고, 그만큼의 고별식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약력을 읽을 때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단 몇 줄로 읽어버리고 마는 것이 늘 죄송스러웠습니다. 세상을 떠난 어느 젊은 신부님은 단 두 줄의 약력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상본 한 면이 차고 넘칠 만큼의 긴 약력을 지니셨던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또한 고별식의 약력 소개는 “00월 00일 선종하셨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삶이 마감된다는 것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특히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님의 고별식에서 약력을 읽으며 울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도 선합니다.
사랑이 넘치시던 장홍선 요셉 신부님
1939. 12. 3 황해도 장연 출생 / 1967. 12. 12 사제수품 / 1967. 12. 종로본당 보좌 / 1970. 1. 아현동본당 보좌 / 1971. 1. 교도소 사목(현, 사회교정사목위원회) / 1972. 6. 군종 / 1977. 1. 미아동(현, 길음동)본당 주임 / 1980. 5. 휴양 / 1980. 7. 대방동본당 보좌 / 1981. 3. 영등포동본당 주임 / 1984. 2.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신학교) 사무처장 / 1987. 2. 묵동본당 주임 / 1992. 10. 도림동본당 주임 / 1997. 10. 이태원본당 주임 / 2000. 9. 제2지구(현, 제2 서대문-마포지구) 지구장 겸 연희동본당 주임 / 2005. 9. 원로사목사제 / 2019. 1. 19.선종
이 날도 약력 낭독의 마지막 문장이었던 “… 1월 19일에 선종하셨습니다.”를 읽으면서 제 목소리가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니 장 신부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저에게 “수고했어, 고마워. 허 신부”라고 말하시는 듯 했습니다. 사실 장 신부님과 자주 만나거나 마음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꼭 오래 만나야 잘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두 마디만 나누어도 그 분의 인격을 알 수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장 신부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장 신부님은 어린 나이에 한국 전쟁을 겪으시고, 황해도 장연에서 홀로 내려오셨습니다. 가까운 친척이 없어 늘 외롭고 고독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외로움과는 달리,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장 신부님은 차가 막히는 서울에서 기동력 있게 움직이기 위해 일부러 오토바이를 배우셨다고 하셨습니다. 본당 구역 내 골목을 빨리 다닐 수 있고, 봉성체도 여러 번 더 할 수 있다고 뿌듯해 하셨습니다.
또한 후배 사제들에게도 애정이 많으셨습니다. 연희동성당에서 지구장으로 사목하실 때에는, 아침 미사 후 오토바이를 타고 구역 내 본당 신부님들을 찾아가 환담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젊은 시절 군종 신부로 사목하셨을 때에도 훈련 중인 까마득한 후배 사제들을 데려다 미사를 봉헌해주시고, 먹을 것을 준비해 주린 배를 채워주곤 하셨습니다. 이렇듯 신부님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의 모범 보여 주셔
한 선배 신부님이 장 신부님을 이렇게 회고하셨습니다. “장 신부님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흙속에 묻혀 있는 보물 같아. 어떤 사람들은 장 신부님을 ‘무색무취’한 분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대나무처럼 강직하고 소나무처럼 항상 변함없고, 느티나무 가지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분이셨어. 아주 화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알면 알수록 깊은 영성과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제 중의 사제였지.”
이러한 장 신부님의 사랑과 인품은 약력 몇 줄로 전할 수 없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후배 사제로서 이런 선배 사제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은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장 신부님의 장례미사는 더욱 더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좀 더 우리 곁에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선종하신 신부님들의 상본을 다시 한 번 찾아 찬찬히 살펴봅니다. 짧고도 긴 약력 안에 수많은 희로애락의 사연이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그분들이 남기고 가신 사랑, 그 사랑을 받았던 우리의 몫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주님, 사제 장 요셉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그 분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3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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