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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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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2-23 ㅣ No.778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1) 글을 시작하며


‘원리’ 체득해 주님 향한 형성 실현해야

 

 

이번 주부터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와 최인자(엘리사벳) 선교사가 함께 쓰는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이 독자분들을 찾아갑니다. 영성생활에 관심 있는 많은 독자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정영식 신부

 

1985년 서품.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에서 영성지도신부 역임. 1993년까지 미국 듀케인대학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했다. 2002년까지 수원가톨릭대학 심리학 영성신학 교수로 재직, 안양 중앙본당 주임을 거쳐 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최인자 선교사

 

안양 중앙본당 교육분과장. 소공동체 여회장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신자 재교육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평화방송TV강의, 전국 본당 순회 강연 등을 통해 평신도의,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영성 교육에 힘쓰고 있다.

 

 

테니스장에 자주 간다고 해서 테니스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테니스를 잘 하려면 그 원리를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손님이 몰리는 음식점은 정해져 있다.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원리가 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무턱대고 암기한다고 해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의 원리를 터득해야 공부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세상 모든 일에는 ‘원리’가 중요하다. 무슨 일이든, 근본 원리를 터득해야 달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성인(聖人) 영성에 대한 접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성인들의 영성을 이해하고 그 영성을 삶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 원리가 ‘형성(形成)의 원리’다. 하느님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떤 방향을 향해 형성되어 가도록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미리 하느님께서 초청하신 형성에로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신 형성에 대한 초대가 ‘선형성’(先形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형성을 실현시켜 가는 형성의 장이다. 이 형성의 원리(하느님의 뜻)를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 ‘반형성’(反形成)이다. 때론 무너지고 쓰러지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형성’(再形成)해 나가야 한다.

 

문제는 이 세상에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값비싼 물건을 잃어버리면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받는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큼 물질적 고통보다는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고통이 더 크다. 이렇게 우리는 넓은 세계와 이웃, 그리고 관계성 안에서 나 자신을 성장시켜 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특별히 인간 간의 관계에서 생기는‘상호형성’(相互形成)은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생활하면서 변화되어가는 상황에 늘 놓여있다. 남들이 모두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혼자서만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른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기에 크게 보면 장소들(places) 사물들(things) 사건들(events) 관계에서 생기는‘상황형성’(狀況形成) 역시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과 영혼으로 이뤄져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육신과 정신과 마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늘 관찰하고 있어야 한다. 얼굴에 고추장이 묻으면 우리는 급히 휴지로 닦아낸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렇게 민감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면형성’(內面形成)이다. 이러한 형성을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속적형성’(持續的形成)이다. 이러한 노력은 또한 세계적 테두리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이 ‘세계형성’(世界形成)이다.

 

‘형성’과 관련한 이러한 용어들은 일반 신앙인들에게 어렵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테니스를 배우려면 테니스의 원리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성인의 영성을 가슴으로 느끼려면 우선 그 원리를 배워야 한다.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원리만 터득하면 “아하~ 영성의 진수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며 무릎을 ‘탁’ 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가능한한 쉽고 편안한 말로 성인들의 영성을 풀어가려고 한다.

 

이번 작업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동 작업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집필 방식이 교회 언론에서는 최초라고 들었다. 성인들의 영성은 성직자 수도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신도 스스로가 이 영성을 이 세상 삶을 통해 실현해 내야 하기에 평신도의 참여는 불가피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번 작업이 공의회 정신을 이 땅에 토착화 시키는데 작은 밀알이 되었으면 한다.

 

각 성인의 삶에 대한 간단한 요약과 정리는 평신도가, 성인별 영성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는 성직자인 내가 진행할 것이다. 이번 연재가 성인들의 영성을 세상에 좀 더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4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 글을 시작하며


내면의 영적 성향 파악하고 가꾸어 나가야

 

 

요즘 많은 사람들이 ‘웰빙’(well-being)을 이야기한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웰빙을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어떤 말은 풀어 설명하면 더 어렵게 들리는 경우가 있다. 웰빙도 그렇다. 그저 말 그대로 ‘잘 존재한다’라는 의미로 들으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웰빙, 즉 ‘잘 존재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웰빙을 육체적·정신적 의미로 이해한다. 신앙인 중에도 신앙의 목적을 육신적·정신적 편안함에 두고 있는 이들이 많다. 물론 육신적·정신적 편안함도 중요하다. 육체가 편하지 않고 정신이 평화롭지 않으면 행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목적으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냉담하기 쉽다. 신앙은 육신적·정신적 편안함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 편안함이다. 영적인 차원의 편안함이 없다면 자아 완성이 불가능하다. 성덕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닮은꼴로는 더더욱 살아갈 수 없다.

 

성인들의 삶은 육신과 정신을 영(靈)의 지배하에 둔 삶이다. 영의 인도를 받는 정신, 영의 인도를 받는 육신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영이 중요하다.

 

성인들의 삶에선 내 뜻만 고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성인의 삶은 이웃의 뜻과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개방된 삶이었다. 초월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습성들에 메여있다. 이것을 과감히 떼어내야 한다.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에서 일정부분 거리를 유지할 때 초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의 삶은 어떻게 하면 영과 함께할 수 있을까.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이야기 해 보자.

 

우선 하느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느님과 합치(일치, congeniality)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쉽게 말해 합치란 ‘계속해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과 계속해서 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소명이 무엇인지, 나의 삶의 궁극적 소임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융화(compatibiliyt)가 일어난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합치의 성향이 없으면 인간은 금방 욕심 부리게 되어 있다. 소유하고 싶고, 내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융화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도 이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의 가치관을 확고하게 합치와 융화로 정립하였다면 이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선 연민(compassion)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한계성이 있으니 언제나 서로에게 연민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합치, 융화, 연민이 있어야 세상을 향한 참된 인간 역량(competence)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하위성향 (보조성향)으로써 인정 개방성 · 초탈 · 순명 · 단순함 · 외경 · 확고함 · 부드러움 · 사밀함 등의 성향들을 가꾸어 갈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향들이 깨달아 지고 체험될때마다 우리는 ‘경외’(Awe)를 체험하게 된다. 경외는 우리가 가진 모든 영적인 에너지들이 발휘 되는 절정의 순간이다. 경외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음에 대한 경탄이다. 동시에 하느님 뜻에 어긋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성인성녀의 삶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앞에서 말한 이러한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인성녀들의 삶은 왜 우리와 다른가. 왜 그분들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그분들이 앞에서 말한 형성의 원리에 따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성인 성녀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형성해 놓으신 내면의 영적 성향들을 파악하고 가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성인성녀의 삶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적 모범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성인성녀들의 내면에 있었던 영적 흐름들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었던 삶의 원리들을 보아야 한다. 앞으로의 작업은 이런 구도 속에서 진행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18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 글을 시작하며


천국에서 영원불멸의 행복을 받고 계신 

 

 

성인(聖人)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교회 안에서 성인이라고 부를 때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존시에 극히 신앙이 두텁고 덕망이 많음으로써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사후에 하느님과 같이 있으면서 영원한 행복을 받고 계시는 분들. 특별히 성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천당에 확실히 계시다는 것을 판정선언(判定宣言)받은 분들.’

 

따라서 아무리 덕행이 뛰어난 이라도 성교회의 선언이 없는 한 결코 공공연하게 성인이라 부를 수 없다.

 

성인이라 함은 천국에 들어간 분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후 영혼의 거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직접 이것을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성인을 결정하고 인지하는 것도 간접적인데,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계시(啓示)에 의해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신앙도덕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계시로 가르쳐주었다.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요한 세례자 등이 이러한 분들이다. 물론 예수의 제자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나머지 대부분의 성인은 하느님의 대리자인 성교회가 매우 엄격하고도 세밀한 조사를 하고서 판정선언(判定宣言)한 분들이다. 여기에 시복과 시성 두 가지가 있다. 시복된 분을 복자라고 하고, 시성된 분을 성인이라 칭한다.

 

라틴어로는 성인을 ‘상뚜스’(Sanctus)라고 한다. 상뚜스란 처음에는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자’라는 의미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영세로 인하여 죄의 사함을 받으며 하느님께 봉헌된 신자들이나, 신품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께 봉헌된 사제들, 신자의 가정 안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어린아이들도 모두 ‘상뚜스’(거룩한 자)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상뚜스는 차츰 천국에 계시는 분들만을 지칭하게 됐다. 아무리 신분이 거룩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행위나 생활이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성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또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변하기 쉬우므로 잠시 덕을 닦는다 하더라도 돌연 심한 유혹이 닥쳐오면 언제 어느 때 범죄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을 성인이라 부르지 않고 죽어 천국에 들어가 영원불변의 행복을 받고 계시는 분들에게만 성인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른다.

 

성인을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초상에 그려진 후광 혹은 윤광이다. 성인 초상의 전신 혹은 머리 위에 광채를 그리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습관이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말씀을 광명에 비유하고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46).

 

그리스도는 또한 빛의 자녀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루카 16,8 요한 12,36 참조). 이런 이유로 선에 힘쓰는 성인의 상징으로 빛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이나 보살의 초상에 후광을 그려 넣었다. 동서양을 떠나 후광은 영광이나 권능 있는 자를 표시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화가(畵家)가 성인의 초상에 빛을 그리게 된 것은 5세기 무렵부터지만, 이 방법이 널리 사용된 것은 중세 이후다. 빛을 그리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초상의 전신을 빛으로 둘러싼 것이 ‘이우레울라’(후광)고, 머리 주위만 빛으로 두른 것이 ‘님부스’(윤광)다. 또 윤광도 원형(圓形)으로 하는 때도 있고 타원형(墮圓形)으로 하는 때도 있다.

 

또한 머리를 두르는 것도 있고, 머리 위에 좀 떨어지게 그리는 때도 있다.

 

후광이나 윤광은 아무리 성인이라는 소문이 떠돈다 하더라도 정식으로 시복 시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초상에 붙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인정한 교황으로 유명한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 1568~1644)께서 정하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25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 글을 시작하며


성인 생애 묵상하며 기도중에 친밀히 지내야

 

 

교회에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아울러 주재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최상의 경신례, 절대적인 존경을 흠숭(欽崇)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인간에 대한 존경은 공경(恭敬)이라고 하여 명확히 구별한다.

 

예컨대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된 동정 성모 마리아는 피조물 중 덕으로나 지위로나 가장 탁월한 분이기에 특별한 ‘공경’을 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경이지 흠숭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인에게 우리는 어떠한 공경을 바쳐야 할까.

 

세상 사람들은 조국을 위하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영웅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 또한 빛나는 발명이나 발견을 하여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킨 이에게도 모든 이들이 존경을 보낸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고, 세상에 큰 선익을 선사하고, 인류의 명예가 되는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생전 모습을 성화와 성상으로 표현해 기념하고, 붓과 입으로 찬양드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성인에 대한 공경 중에서도 그 유해(遺骸)나 유골, 유물, 성상, 성화 등을 존경하는 것은 어딘가 특별한 가톨릭적 정서가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공경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결코 미신이 아니다. 인정(人情)상으로 말하더라도 돌아가신 부모를 잊지 않는 효자는 아침저녁 그 사진을 향하여 산 이에게 하는 것처럼 인사한다. 효자는 특히 부모의 유산이나 기념물 등 고인을 추모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중요시한다.

 

그렇다면 성인에 대한 공경도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와 관계되는 일체의 사물에 대한 존중에까지 진지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성인들의 전구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들이 직접 하느님께 의뢰하는 것보다 성인들의 전구를 통해 구함을 받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점은 용이하게 납득할 수가 있다.

 

그것은 세상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상대편에 가까운 사람을 중개 삼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성인들은 우리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우리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영복을 누리며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돕고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는 것을 천국에 있어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인들의 전달을 기뻐하시며 반드시 그들의 원의를 들어 주실 것이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6)

 

천국의 성인은 지상의 의인보다 주의 사랑 안에 더 깊이 있다.

 

따라서 성인의 기도는 의인의 간절한 기도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모든 성인의 전달이 일체 사물에 관하여 어느 것이든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신심 생활이나 선한 임종을 하기 위해서는 성 요셉, 전교를 위해서는 성녀 소화 데레사, 유실물(遺失物) 발견을 위해서는 성 안토니오의 전구가 특별히 유력하다.

 

이와 같이 성인에 의하여 기도의 효과가 다른 것은 그네들의 생존 시에 특별히 공훈을 세운 방면에 하느님께서 그 보수로 탁월한 전구의 힘을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성인을 결정하고 발표하는 주요한 이유는 단순히 전구에만 있지 않다.

 

우리에게 신앙의 모범을 주기 위함이다. 결국 성인 공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성덕을 본받는 것이라 하겠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격언이 있다. 시간 있는 대로 성인전을 읽으며 가끔 그들의 생애를 묵상하며, 기도 중에 그들과 친밀히 지내야 한다. 그러면 어느덧 그들의 고결한 정신에 동화되어 마침내 거룩한 삶을 구현할 것이다. 열심히 분발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외치자.

 

“그도 한때 사람이었고 나도 지금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행한 것을 나라고 행치 못하랴!”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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