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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일본천주교회 26위 성인들 순교의 길 (하) 잠복 그리스도인, 관음상 비슷한 성모상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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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3-31 ㅣ No.784

일본천주교회 26위 성인들 순교의 길 (하) 잠복 그리스도인, 관음상과 비슷하게 성모상 만들어 기도

 

 

니시자카에서 일어난 순교 장면을 형상화한 26위 성인 기념관 내 2층 벽화. 당시 에도 막부는 선교사와 함께 들어오는 서양 세력에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정책을 확고히 보여주고자 교토와 에도로부터 800㎞나 떨어진 나가사키항으로 끌고와 십자가형에 처했다.

 

 

26위 성인 기념비를 돌아 기념관에 들어섰다. 26위 시성 100주년을 기념해 1962년에 세워진 기념관 내 전시실은 소박하고도 숙연한 분위기다.

 

니시자카에서 순교한 나카우라 줄리안이 로마에 보낸 서간을 시작으로 예수회ㆍ프란치스코회ㆍ도미니코회 선교사들과 순교자들 서한 및 유품, 일본 및 규슈 일대 고지도, 순교자를 형상화한 그림과 유리화 등이 하나하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카우라 줄리안은 1582년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유럽을 방문해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한 텐쇼 소년사절단 네 소년 가운데 한 명이다.

 

1546년 일본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스페인 출신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포르투갈 왕에게 보낸 친필 서한, 17세기 초 나가사키시 교외 소토메에서 그려졌다고 전해지는 '눈의 성모' 화상, 나가사키시 산림에서 발견된 현 지정 문화재인 사각형 메달 '피에타상' 등이 눈에 띈다.

 

성화 중에는 특히 그리스도교 선교를 금지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등을 새긴 목판이나 동판을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한 '후미에(繪踏)' 주제 그림이 가장 인상적이다. 끊임없이 후미에를 강요당해야 했던 일본 교회 신앙선조들의 심경을 가늠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앞면엔 불상, 뒷면엔 십자가

 

그런데 유품 가운데 생뚱맞게 반가부좌로 앉은 한국풍 미륵보살반가상이 등장했다. 현재 나가사키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이 불상은 그러나 270여 년에 걸친 박해 당시 에도(江戶, 도쿄의 옛 지명) 막부시대 때 기리시탄(切支丹,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바치면서 그리스도로 여긴 일종의 대체 성상이었다. 1873년 메이지 정부가 일본 땅에서 그리스도교 금지를 명시한 '고사츠(高札)'를 모두 철거, 정부 차원에서 신앙 자유를 보장하기까지 신앙적 매개였던 셈이다.

 

그렇게 보니 성모상이나 성모자상을 대체한 당시 관음보살상 형태의 '마리아 칸논(觀音, 관음상)'이 예사롭지 않고, 다른 기리시탄 유물 또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돼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성모상을 관음보살상과 비슷하게 만들고 앞면엔 불상을, 뒷면엔 십자가를 새겨 기도를 드리는 방식으로 가톨릭과 불교를 교묘하게 합쳤던 시대의 아픔이 가슴 뻐근하게 전해져온다.

 

270여 년간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해야 했던 정황을 26위 성인 기념관 내 작은 유리창에 형상화한 유리화를 통해 거룩한 순교의 빛이 전시관 내로 퍼져 들어온다.

 

그 빛을 따라 기념관을 나서 언덕 바로 옆에 세워진 니시자카 성당으로 걸어갔다. '성 필립보 성당'이다. 스페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1852~1926)가 설계, 아직도 지어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정) 성당을 본따 지은 기념성당이다. 두 개 탑 가운데 하나는 성모를, 또 하나는 성령을 상징한다. 이 탑을 장식하는 도자기는 26위 성인이 걸어온 길에 있는 도요지 가마에서 가져온 도자기로 장식해 그 뜻이 깊고 그윽하다.

 

 

오우라천주당 국보로 지정

 

니시자카 언덕에 세워진 성 필립보성당엔 26위 성인 가운데 예수회 출신 선교사 3위 유해가 봉안돼 있다. 이 성당은 성 가정성당을 본따 세워졌으며 두 탑은 26위 성인이 지나온 순교의 길에 있던 도요지 가마에서 가져온 도자기로 장식됐다.

 

 

이 성당은 원래 나가사키대교구에서 관리했으나 지금은 예수회에서 관리한다. 성당엔 26위 성인 가운데 바오로 미키와 요한 소안, 야고보 키사이 등 예수회 출신 순교자 3위 유해가 봉안돼 있어 니시자카를 찾는 이들의 단골 순례지가 되고 있다.

 

26위 성인이 순교한 뒤에도 니시자카는 계속해 거룩한 순교의 땅이 된다. 1622년에도 니시자카에서 밀입국한 선교사 23명뿐 아니라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가톨릭 신자들을 합쳐 55명이 화형과 참수형에 처해지는 '겐나(元和) 대순교'가 발생한다.

 

시대가 내려가면서 천주교도를 개종시키려는 박해는 갈수록 참혹해졌다. 나카우라 줄리안도 몸을 묶어 거꾸로 매달아 오물을 넣은 구멍 안에 집어넣는 이른바 '혈조(穴吊)'라는 형벌을 받고 니시자카에서 순교했다. 훗날 시성되는 성 도미니코 이바네즈 드 엘키시아 신부와 성 프란치스코 쇼우에몬 등 16위 성인도 1633년부터 37년간에 걸쳐 니시자카에서 순교한다.

 

이로써 니시자카는 일본 교회는 물론 전 세계 보편교회가 모두 인정하는 '복된 언덕'이 됐다. 1981년 2월 2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니시자카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운 빗돌엔 '지복의 언덕'이라고 새겨져 있다.

 

니시자카 성 필립보 성당을 나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933년에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했다. 26위 성인이 순교한 지 267년 만에 세워진 '26위 순교 성인 성당'으로, 아직은 일본인에게는 신앙생활이 허용되지 않고 외국인에게만 허용되던 1864년 12월 29일에 지어졌다.

 

박해 이후 일본 땅에 세워진 첫 성당인 오우라 성당은 270년간 신앙을 숨긴 채 살아온 가쿠레 기리시탄(陰れ切支丹, 잠복 그리스도인)이 처음으로 신앙고백을 한 성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65년 3월 17일 낮 12시 30분께 성당 봉헌을 마친 직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치쟌 신부는 일본인 10여 명을 발견한다. 성당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이들은 프치쟌 신부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바치자 성당에 따라 들어와 프치쟌 신부에게 자신들은 우라카미에서 왔으며, 나가사키현 관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겉으로는 불교 신자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다. 이들이 그 유명한 가쿠레 기리시탄이다.

 

 

순례자들에게 신앙의 증거로

 

그러나 에도 막부의 금교령이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이 고백은 또 다른 박해를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우라카미에 네 곳의 비밀 공동체를 만들어 집회를 하던 기리시탄들은 오우라성당에서의 신앙 표명을 계기로 자신의 집안이 소속한 사원인 단나지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가톨릭 교회 방식으로 매장을 시작한다. 이에 에도 막부 정책을 이어받은 메이지 정부는 1868년 우라카미 기리시탄 3000여 명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등 일본 서부지역 22곳에 유폐시키고 가톨릭을 탄압한다. 이것이 우라카미에서 벌어진 네 차례의 검거 선풍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외국에서 항의를 받게 되자 메이지 정부는 1873년 드디어 천주교 금교령 팻말을 철폐하고 유배된 천주교 신자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다. 이로써 일본에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다.

 

일본 땅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온 계기가 된 오우라성당은 그러나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 피해를 입고 대거 파괴된다. 이후 1953년 보수를 마치고 다시 국보로 지정됐다.

 

벽돌 표면에 흰 석회 반죽을 발라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26위 순교성인 성당은 하늘을 향해 뻗은 그 드높은 기상으로 순례자들에게 질곡에 찬 기리시탄 역사의 매듭을 풀고 신앙의 증거로 빛난다.

 

"그 이름 생각하면 끝없이 아득한 길이 보이고 / 그 모습 바라보면 까닭 모를 이슬 가슴에 맺히는 / 당신 주신 평화는 왜 안개비 내리는 새벽 길 위에 / 눈보다 가슴 먼저 젖은 흐느낌으로 오는지 / 예수, 나의 평화 / 오늘도 평화를 향한 아득히 먼길 위에 선다."(홍윤숙 시인 '나의 평화' 전문)

 

[평화신문, 2010년 3월 14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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