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에 대한 동방교회의 가르침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9 ㅣ No.291

기도에 대한 동방교회의 가르침

 

 

1. 기도의 본질


1) 기도의 탁월성과 필요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말대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기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은둔자 테오파네스tm(Teofane il Recluso)는 기도에 관한 교부들의 작품이 그렇듯 많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도는 전부이며 신앙과 신앙생활 전체를 요약한다. 누군가 교부들이 쓴 기도문들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은 구원을 위한 참된 입문서가 될 것이다.” 사실 기도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생명에 대한 표현, 정신의 호흡, 영성생활의 바로미터이다. 전(全) 교회는 기도로 숨을 쉰다.

 

수도승들은 한때 기도를 학문 중의 학문인 거룩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언제나 궁극적인 토대와 모든 실재의 존재이유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러한 토대는 성부이며, 성령은 성자를 통해서 우리를 성부께 인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하나의 인격이지 우주의 원리가 아니다. 따라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감은 대화를 전제한다. 기도는 바로 이 대화이다.

 

2) 기도의 대상

 

고대 전례 규정에 의하면, 기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 향한다. 오리게네스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해서는 안 되고 그분을 통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나중에 와서야 중개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일이 흔해졌다.

 

기도 중에 인간 정신은 성령에 의해 인도된다.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 목소리는 그렇게 하느님께 도달한다. 

 

게다가 기도는 하느님 말씀(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르면 말씀께서는 단지 혼자 기도하시지 않는다. 오늘날의 언어로 ‘신비적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코미아코프(Chomjakov)는 기도의 이 교회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의 개인 기도를 신뢰할 수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전 교회의 중재를 요청한다. 천사들과 사도들, 순교자들과 성조들 그리고 모든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하신 우리 주님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 거룩한 일치가 교회에 참된 생명을 가져다준다.”

 

기도를 통한 중재이자 세상 운명에의 참여인 사랑 충만한 이 도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공로에 대한 가역성’이라는 표현을 너무 법률적이라고 생각하여 잘 사용하지 않았다.

 

3) 기도의 정의

 

중세 신학자들은 기도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 이전에 교부들이 내린 정의들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상당히 자주 이 정의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한 측면 혹은 다른 측면을 묘사하는데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도가 “지성의 한 상태, 모든 현세적 생각의 파괴자” 혹은 “하느님 영광의 표명” 등으로 불려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전통 전체에서 다음 세 개의 정의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 기도는 합당한 선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과 같다.

- 기도는 하느님을 향해 정신을 들어 높이는 것과 같다. 

- 기도는 하느님과 영혼의 대화와도 같다.

 

요한 다마쉐누스는 앞의 두 개를 혼합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들어 높임 혹은 합당한 선을 하느님께 청함이다.” 다른 많은 작가가 이 정의를 따르고 있다.

 

4) 청원기도 

 

하느님과 인간의 통교인 기도는 무엇보다도 천상 선물에 대한 겸손한 요청이며 그것을 받는 자세이다. 

 

은둔자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기도는 언제나 모두를 위해서 또 전(全) 교회를 위해서 행해진다. 교부들은 ‘주님의 기도문’을 해설하면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입증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자는 개인적으로 필요한 모든 바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선보다는 차라리 천상적인 선을 청하는 것이 더 완전할지라도 말이다. 

 

영적 스승들은 만일 우리의 기도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적게 기도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다음의 조언이 주어진다.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즉시 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그것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려는 당신의 항구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보다 큰 선물을 주시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느님과 함께 대화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에 빠져드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를 듣게 된다(요한 9,31 참조). 교부들은 죄인들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일 그 청원이 무지로 표현되었다면 어떻게 신앙으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죄로 인해 야기된 이 참된 선에 대한 무지의 어둠은 의인들의 기도에서 역시 자주 남아 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 안에서 기도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의식에서 오는 청원보다 더 고귀한 청원을 표현하신다. 마음 은밀한 곳에서 우리의 기도이기도한 성령의 기도는 언제나 받아들여진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서 신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청이 보다 자주 그리고 집요하게 반복되는데, 곧 죄의 용서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고, 그 결과 전례 안에서 그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사는 받은 선물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교 찬가 저자들은 70인 역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셈족 언어를 물려받았으니, 곧 호몰로제오(homologeo), 아이네오(aineo), 독사조(doxazo), 에울로제오(eulogeo)와 같은 동사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용어 에우카리스테오(eucharisteo),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한 응답인 그리스도교적 감사의 독창성과 중요성을 드러내면서 신약성서에 들어오게 된다. 교부들은 성 바울로가 언급한 기도의 네 가지 형태(deesis, proseuche, enteuxis, eucharistia: 1디모 2,1)를 설명하면서 에우카리스티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오리게네스의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실제로 이 네 가지 측면은 청원과 감사의 응답 둘로 감소되며 또 떼어놓을 수 없게 일치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감사의 응답은 점차 영성생활의 핵심이 되어갔다. 바울로에게 있어 그리스도인 삶 전체는 지속적인 탄원과 감사로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5) 하느님을 향한 정신의 상승

 

이미 고대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고양(高揚)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플라톤은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상승(anabasis)과 높은 곳에서 오는 선(善)에 대한 관상, 즉 이성적인 세계를 향한 영혼의 상승을 묘사한다. 성서의 여러 곳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플라톤적 지성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이 상승의 탁월한 기관인 ‘정신’(nous)의 개념을 설명하고 적응할 필요가 있었는데, 곧 그것을 ‘마음’(kardia)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두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능력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 안에서 취해져 변화된다는 주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성부이신 하느님을 향해 고양되기 때문에 이 상승은 (플라톤적 의미로) 하나의 순수한 ‘봄’(vision)에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과 정신의 대화”가 된다. “독수도승은 밤낮 하느님과 대화하므로 수도승이라 불린다.”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하나의 실제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육체는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이 상승과 그분과의 영적인 대화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였다. 이교 예식의 형식주의를 거슬러 교부들은 자주 육체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성 바울로는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하였고 우도는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바실리우스의 다음 권고가 훨씬 더 인상적이다. “영혼의 능력이 어떻게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영혼의 감수성이 어떻게 육체에 의존해 있는가를 생각하라.” 조시프 볼로코람스크는 이 점에 관한 회수도승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육체를 구부리는 것은 내적인 주의를 쉽게 해주며, 내적인 정신집중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와 더불어 외적으로 드러난다. 고독가들 역시 무엇보다도 장궤나 부복의 형태로 ‘몸의 기도’를 실천하였다. 헤시카스트들의 심신상관적(心身相關的) 기법은 육체를 자주 관상의 상승에 연루시키고자 한다.

 

끝으로 전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가 말하는 바를 외적 예식들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 영혼에 적합한 자질을 자기 몸으로도 표현한다.

 

 

2. 기도의 단계와 유형


1) 기도의 단계

 

기도 주에 인간의 모든 힘과 능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드러난 요소에 따라 기도의 다양한 단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은둔자 테오파네스는 이 단계들의 전통적인 체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구조와 일치한다.

 

(1) 몸의 기도 혹은 구송기도

(2) 정신기도

(3) 지성과 마음의 기도 혹은 단지 마음의 기도, 감성의 기도

(4) 영적인 기도 혹은 관상

 

첫 번째 단계와는 달리 뒤의 세 가지 형태는 ‘내적 기도’라고도 불린다. 

 

몸의 기도는 본문을 읽거나 암송하고 또 부복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스승들은 이런 기도의 형태들을 무엇보다도 보다 더 차원 높은 기도를 위해 필요한 준비, 하나의 단계, 꽃과 열매에 선행하는 잎, 예수의 육신과 첫 접촉, 혹은 하느님의 창조하는 말씀과 세상 안에 작용하는 말씀의 권능에 우리 인간의 말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몸의 기도는 분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도의 보다 높은 단계들로 올라가기 위한 첫 도구로서 몸의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떤 주의나 정감 없이 행해지는 기도 양식들에 대한 단순한 반복을 혹평한다. 예를 들면 마르티리우스 사도나(Martyrius Sahdona)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두려움과 주의 안에서 우주와 주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성무일도와 기도는 헛되고 무익하다.” 반대로 오리게네스는 예수와의 이 육체적인 첫 접촉 자체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암송하는 기도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악마는 이해하지 않는가! 그러면 결국 악마는 쫓겨난다고 주장하는 어떤 저자들도 있다. 

 

기도의 두 번째 유형은 추론적인 지성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다. 서방에서 숙고, 성찰, 묵상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동방에서 이런 형태의 정신기도를 몰랐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테오파네스는 이런 수행들의 상대적 가치가 간과되지 않을까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지성적인 숙고는 오로지 마음의 기도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 암송된 말씀들을 더 잘 맛보기 위해서 그것들을 묵상(되새김질) 한다. 

 

감성이 서서히 마음을 달구기 시작할 때,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탄식’이 될 것이다. 

 

‘마음의 한 상태’가 되는 기도는 이미 참된 기도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택된 이에게는 보다 나은 관상이 유보된다. 이 관상은 영적 요소가 육적 요소를 또 생각들과 인간적 감정들을 지배할 때 실현된다. 또 기도가 성령의 깊이 안에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침묵 안에서, 탈혼 안에서 이루어질 때 실현된다.

 

2) 전례기도

 

동방은 공적기도의 교회적 성격에 관한 아름다운 내용들을 남겼다. 은둔자 테오파네스에 의하면 교회가 예식을 거행하며, 거기에 참석할 때 우리는 교회에 결합되고 교회의 은총에 참여하게 된다. “외적 예식들을 멀리하는 사람은 교회의 기도에서 멀어지며, 교회의 기도에서 멀어지는 사람은 주님이 약속하신 큰 상급을 포기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다.’(마태 18,20)”

 

교회성에서 예식의 성사적 성격이 유래한다. 사실상 성사들은 말하자면 교회생활 전체와 교회전례의 구성요소이다. 불가코프(Bulgakov)는 동방 예식들의 현실주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보브린스키(B. Bobrinskij)는 성탄절에 교회들 안에서 예수께서 참으로 탄생하시고 부활절에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런 성체성사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고골(N. Gogol)은 자신의 저서『거룩한 전례에 관한 묵상』에서 공적기도의 교육적 성격을 유효적절한 방식으로 강조하였다. 예식들은 그리스도인의 입맛을 돗우고 그것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한 일종의 학교 역할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 예식들 안에는 형식주의라는 실제적 위험이 숨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식의 복잡성 역시 순수한 기도의 단순성을 방해할 수 있다.

 

3) 이콘

 

이콘은 동방 영성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성화벽을 이루고 있으며 또 행렬에도 사용되며 신자들을 축복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각 가정에도 ‘아름다운 모퉁이’라고 칭하는 작은 성소가 있으며, ‘가정의 이콘’이 그려진다. 

 

구원경륜에 밀접히 연결된 성상(聖象)은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의 주된 두 측면을 강조하는데, 곧 ‘진리의 선포’와 ‘하느님 은총의 전달’이다. 

 

이콘은 문서전승과 구두전승처럼 교회의 거룩한 전승을 표현한다. 787년 니케아 공의회는 바실리우스를 따르면서 이콘을 신앙 선포에 비유한다. 이콘 예술은 사제직무에 다가갔다. 화가들에게 부과된 전통적 지침들이 여러 작품에 수집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푸르나의 디오니시우스(Dionisius di Furna, +1745)의『Hermeneia tes zographikes』이다. 반면, 러시아에서 이 지침들은 ‘포들린니키’(podlinniki)라고 불려졌다.

 

거룩한 진리 선포로서의 이콘은 하느님 말씀의 역동적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은총은 성상(聖象)을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교회의 전례적이고 성사적인 생활은 표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콘은 더 높은 실재를 표현하고 어느 정도 그 실재를 육화시키고 현존하게 하는 상징이다. 이콘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 결과 이콘은 공경되고 관상된다. 따라서 이콘 예술의 목적은 그 가시적 표상으로 하느님 현존을 증거하고 또 볼수 있는 모든 것의 의미를 밝혀내는데 있다. 이콘 예술의 목적은 관상이다. 이콘화가는 자기가 그리는 세계의 거룩하고 신비적인 의미를 드러내준다. 그리고 이 동기 때문에 이콘의 상징성이 그렇듯 심오한 것이다. 즉 그 구성과 전망, 색깔과 빛, 장식요소 모두 영적 의미를 갖게 된다. 다른 한편, 이콘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콘이 드러내는 신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순수한 양심으로 합당하게 이콘에 다가가야 한다.

 

4) 교회-건물의 상징

 

교회의 상징성은 4세기부터 해석되고 설명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7세기와 8세기에 증거자 막시무스의『미스타고기아』(Mistagogia)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Sofronius),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게르마누스(Germanus) 그리고 후에 테살로니카의 시메온의 작품들 안에서 보다 완전한 신학적 표현을 얻게 된다. 

 

교회-건물은 일차적으로 교회-집회(신자들의)의 상징이다. 그 안에서 영혼들은 단일체를 이루는데, 성령께서 그들을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이 새로운 성전, 그리스도 몸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전례적 희생을 통하여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성사적 가치를 지니지만, 동방인들은 오히려 다른 본질적 진리, 목적과 결과, 이 희생의 의미 자체, 즉 인간과 가시적인 세계 전체의 변형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지상의 천국이다.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예식의 아름다움 안에서 또 건물의 상징성 자체로 인해서 어느 정도 눈에 보이게 된다. 모스코바의 총대주교 알렉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당 안에서 모든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항상 보는 것과는 구별된다. 모든 것이 빛나고, 모든 것이 정신을 들어 올리며, 정신을 이 세상의 통상적인 생각과 느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3. 끊임없는 기도


1)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데살 5,17)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깨어 있고, 단식하라고 규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법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기도하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증거자 막시무스는 덧붙이기를, “성서는 불가능한 어떤 것도 명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하다’와 ‘언제나’, 이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은 한번도 일치한 적이 없다. 

 

‘메쌀리아니’는 사도 바울로의 권고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였다. 즉 ‘기도하다’는 ‘기도문들을 말하는 것’을 뜻하며, 또 ‘언제나’는 모든 세속적인 일, 무엇보다도 ‘손노동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체메띠’는 공동체 울타리 안에서 절대로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공동체 안에서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여러 그룹의 수도승들이 바치는 성무일도 안에서 계속해서 항구한 기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원칙은 ‘항구한 성체 흠승’과 ‘영구적 로사리오’란 명칭 하에 최근 서방에서 확산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을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메띠(acemeti)라고 불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 해결책은 오리게네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도를 필요한 일에 결합시키고, 일을 기도에 결합시키는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 오로지 이런 식으로만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계명 실현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성인의 전 생애가 하나의 위대한 기도로 간주된다.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는 단지 그 한 부분이 된다. 

 

그리스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주석가의 이 가르침은 라틴 계통에서 가장 탁월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시리아인들 가운데 으뜸인 아프라테(Afraate)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기도와 일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남아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아체메띠’의 창설자 알렉산드로는 하루 24시간에 부합하는 24개의 일상 수행을 제시한다. 후에 교회법적인 일곱 시간 규정이 발전되었지만, 성인들 마다 개인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기도시간을 다시 규정하였다.

 

이 모든 다양성의 이유는 무엇인가? 고전적 해결책은 일이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지만 좋은 내적 자세로 일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이런 자세는 관상 안에서, 다시 말해 기도 안에서 생겨나고 발전된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언제나 카시아누스의 표현에 따른 ‘기도의 상태’(orationis status)를 살기 위해 기도에 할애된 시간을 직접적으로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피곤함도 분심도 외적 기도행위의 지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기도의 삶은 하나의 상태, 하나의 정화(katastasis), 하나의 습관적 마음 자세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에 이런 습관적 자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2) 짧은 기도의 수행

 

즉시 지속적인 기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먼저 구송기도에 충실하고 그것을 잘 암송할 필요가 있다. 은둔자 테오파네스(Teofane)는 ‘기도의 규칙’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하고 있다. 그 규칙에 따르면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적 사부와 함께 기도문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필요나 마음의 영감에 따라 거기에 다른 기도문을 부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투쟁』이란 작품의 러시아어 번역본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교부들은 분심을 피하려고 반복해서 하는 짧은 기도문을 창안하였다. 카시아누스도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이 짧은 기도들은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나이, 팔레스티나, 시리아 그리고 전(全) 그리스도교 지역 안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기도들의 일반적 특성은 그 ‘간결성’과 ‘단순성’에 있는데, 이것을 곧 ‘지속적인 되새김’(meletan, meditari)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상당히 다양한 양식들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금욕가들에게서 그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양식들이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오! 하느님, 저를 도우러 오소서, 주님, 저를 구하러 어서 오소서”(시편 69,2)와 같은 것이다. 그 후 ‘예수기도’만의 고유한 이점으로 인해 자유로운 양식들을 배제하게 되었다.

 

3) 예수기도

 

‘예수기도’는 그리스어 ‘에우케 예수’(euche Iesou)와 동일한 러시아어 ‘몰리트바 지수소바’(molitva Jisusova)의 직역이다. 수세기 전부터 다음의 형식으로 고정화되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러시아인들은 ‘저에게’에다가 ‘죄인’을 덧붙인다). 이 기도는 정교회의 심장이며, 비록 그 기원이 보다 고대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오늘날 동방 그리스도교 안에 매우 활발히 남아 있는 수행이다.

 

비잔틴과 러시아 수도승들은 ‘암송’과 그것을 동반하는 ‘머리 숙임’을 세도록 도와주는 로사리오의 방법에 예수기도를 결합한다.

 

11세기 중엽까지 이 기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14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널리 확산되었다.『필로칼리아』(Filocalia) 안에 선별 수록된 작품의 저자들이나 그 외의 여러 저자들은 서로 경쟁하듯 이 예수기도의 탁월성을 찬양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은둔자 테오파네스는 필로메누스 아빠스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열렬히 주님을 불러라. 성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노동과 식사 중에, 그리고 너의 잠자리 위에서 중단 없이 이것을 하여라. 한마디로 눈을 떠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렇게 하여라. 정확히 햇볕에 어떤 것을 쪼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의 태양이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예수기도의 세 단계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에서처럼 예수기도에 있어서도 구송의 단계, 정신의 단계, 마음의 단계, 이 세 단계로 구분된다. 구송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치를 지닌다. 자주 반복되는 짧은 기도 수행의 경우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둔자 테오파네스는 이 기도에 성사적 효력을 부여하려했던 사람들과 이 기도 안에서 일종의 부적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반대한다. 

 

내용과 관련하여 14세기부터 많은 저자가 그 양식의 우수성을 경쟁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하였고, 이 기도의 온갖 효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예수기도의 첫 번째나 두 번째 요소에 강조점이 주어질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예수기도는 탄식(penthos)을 낳는 수도승 전통 안에서 유행했던 수많은 기도 중 하나이다. 반대로 보다 최근의 작가들은 오히려 첫 번째 요소, 즉 주님의 이름이 지닌 특별한 힘에 강조점을 두기를 좋아한다. 실제로 흠숭과 탄식, 신성과 인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시각과 모든 차이를 초원하는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분의 자비를 분리시키지 않는 편이 더 낳다. 

 

세 번째는 마음의 단계이다. 은둔자 테오파네스는 말하기를, “마음 안에서 다음과 같이 정신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라.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네가 이렇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이 기도를 통해 마음으로 들어가 갈망했던 목표에 도달할 때 너의 무질서한 생각들이 멈추고 네 영혼의 움직임들을 이끌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 마음과 정신을 결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5) 심신상관적 기법

 

이 기도의 목적은 어떤 마음 상태를 낳고 강화하는 것이다. 아토스 산의 헤시카스트들은 이 내적 융화 과정을 수월하게 하려고 수도승 니체포루스(Niceforus: 13세기 후반)가 최초로 이론화한 심신상관적 기법을 계발하였다. 이 기법은 어떤 윤리적 준비, 순수한 의식, 즉 ‘아메림니아’(amerimnia: 근심에서의 자유)를 전제한다. 그러나 밀폐된 방, 등받이 없는 낮은 의자에 앉는 자세, 온 정신으로 시선을 배 한가운데, 즉 배꼽 위에 두면서 가슴 위에 턱수염을 기대어 놓는 것 등과 같은 외적 조건들 역시 필요로 한다. 

 

이 수행은 호흡을 규칙적으로 늦춤으로써 호흡의 박자에 맞추어 기도양식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정신적 탐구와 항구한 예수 호칭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힘들고 매우 모호하지만, 정신의 통합은 곧 기쁨, 형언할 수 없는 환희, 적이 공격하지 못하는 불가침, 하느님께 대한 보다 큰 사랑 그리고 어떤 위대한 빛(후에 ‘타볼산의 빛’이라고 칭하게 될) 등과 같은 기도의 열매를 낳는다.

 

6) 러시아의 순례자

 

이미 여러 언어로 출판된『자신의 영적 사부에게 했던 한 순례자의 진실된 이야기』는 서방에 예수기도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순박한 농부인 순례자는 끊임없는 기도에 관한 전통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다. 영적 사부(starez)가 그에게 하나의 단순한 방법을 권고한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으로 하루에 3.000번에서 6.000번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12.000번으로 점차 그 횟수를 늘려가면서 부르는 방법이다. 그런 다음 순례자는 더 이상 회수를 셀 수 없게 된다. 이제 그의 입술은 잠자는 중에도 저절로 움직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움직임은 입술에서 혀로 옮겨 간다. 그 다음 기도는 혀에서 심장(마음)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순례자는 마치 심장 자체가 매 박동마다 한 단어를 암송하듯이 자기 기도가 심장 박동의 리듬에 일체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따르면 기도를 자기 심장 박동에 일치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기도가 실제 존재 자체의 생명기능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완전한 기도인가? 순례자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길에 있음을 믿는다.

 

7) 예수기도에 관한 숙고

 

최근의 비평가들은 예수기도에 수반되지만 단지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한 심신상관적 기법에서 참되고 고유한 기도를 조심스레 구분한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교적 의식의 느린 각성과 연결된다. 우리는 5세기부터 18세기 러시아 영성가들에 이르기까지 동방에서 그 전통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이 신심을 향한 움직임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헤시키우스(Hesichius)에게 있어 예수호칭은 ‘넵시스’(nepsis)에 연결되며, 결과적으로 모든 악마를 거스른 효과적인 방어수단이다. 

 

14세기부터 저술가들은 그것을 자주 그리스도교 신앙의 짧은 요약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예수 이름에 대한 공경의 극단적 형태는 ‘오노몰라트리’(onomolatri)라고 부르는 몇몇 러시아 수도승을 1912년과 1913년에 러시아 교회를 분쟁으로 몰아넣었던 교리에로 이끌었다. 불가코프(S. Bulgakov)는 예수 이름을 예수의 인격과 동일시하지 않고 나름대로 하느님 이름의 성사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에 관한 이론을 계발하였다. 콜로그리보프(I. Kologrivof)는 동방 전통의 노선에서 예수호칭을 축성된 이콘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에 연결시키고 있다.

 

종교심리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측면과 구성요소를 지닌 심신상관적 기법이 제시하는 이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고대의 의사들은 호흡의 입김이 어떻게 인체의 구성요소와 결하되는지를 연구하였다. 교부들에게 있어 호흡 안에는 영(pneuma)과 피, 영혼, 목소리의 만남이 있다. 오늘날 헤시카스트들의 호흡법은 가끔 의식을 모아 묵상을 준비하는 힌두교의 요가 호흡법 ‘프라나이아마’(pranayama)와 비교된다. 그러나 료욜라의 이냐시우스의 기도의 세 번째 방법과도 비교된다. 

 

『예수기도에 관한 담화』와『러시아 순례자』의 저자들은 이 방법의 항구한 수행이 가져다주는 위로감과 열정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자연적 효과를 성령의 은총과 혼돈하지 말도록 권고하며, 이런 오류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심장(단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물질적이고 고유한 의미로 이해된)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겨나는 모든 효과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구심운동을 도와주는 심장의 영역에서 유래하는 일련의 모든 예민한 느낌에 대한 문제이다. 

 

고요한 환경, 어두운 장소, 앉은 자세, 근육의 긴장, 이 모든 것은 기도 안에서 영혼의 주의가 마치 건물의 기초와도 같은 몸의 자세에도 달려있다는 일반적 경험으로 귀결 된다.

 

한편 진정한 영성가들은 모두 그 방법이 그리스도교 수행의 정상적 수단들을 거치지 않고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 신속한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게다가 그것이 전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지는 않으며, 개인적인 안내자 없이는 종종 위험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1,34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