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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권력자인가, 봉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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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883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권력자인가, 봉사자인가?


얼마 전 어머니 생신을 맞이하여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식당으로 가는 도중 내 자가용에 동승한 초등학생 조카 둘이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가 참 재미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의 다른 노래처럼 가사의 전체적인 내용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반복되는 후렴구인 “내가 제일 잘나가.”란 표현을 들으면서 문득 내가 제일 잘나갔던 때는 언제였던가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한때는 꽤 잘나가던 존재였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나는 줄곧 학급에서 반장을 도맡아서 했다. 요즘 같은 민선(?) 반장 시대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관선(?) 반장의 시대였다.

최종적으로 담임선생님의 선택을 받아야만 반장이 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학업 성적도 상위 3% 안에 들어야만 반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초등, 중등, 고등학교 시절 12년 동안 학기마다 거의 다 반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반장을 할 수 없었던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엄마들의 치맛바람 영향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이후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우리 부모님들 덕분에 나는 내 의지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반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선생님과 친한 친구에게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무척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이른바 인사(?)라고 불리던 봉투가 오가던 시절, 우리 어머니는 내가 아는 한 선생님들께 제대로 된 인사(?)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예의가 없는 분이셨고, 그 바람에 반장 자리를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잘나가는 모범생이었지만 내 의지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먼저 배울 수 있었다. 학연, 지연, 혈연을 중요시하는 한국사회 안에서 금전 문제와 인사 청탁에 대한 문제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

당시만 해도 반장 자리는 학급 안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하다 보니, 어린 나의 사고 안에서도 반장은 당연히 내가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반장 자리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반장은 담임선생님이 안 계시거나 자율학습을 할 때 떠든 사람의 이름을 칠판에 적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이 권한은 아직 미성숙한 사고 안에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위에 해당하는 일종의 권력 같은 것이었다.

칠판에 이름이 적힌 아이들은 선생님께 꾸중을 듣거나 화장실 청소와 같은 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친구들은 반장의 눈치를 보거나 반장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로부터 가끔씩 친구들의 이름을 지워주는 대가로 빵이나 우유를 얻어먹기도 했다.

반장이 하던 말은 “조용히 해라!” 또는 “떠들면 선생님께 일러바친다.”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통제와 억압이 통용되는 군사문화가 팽배했던 시절, 반장은 그야말로 팔뚝에 완장을 차고 반 친구들을 담임선생님에게 고발하는 밀고자 또는 앞잡이와 같은 사람이었고 학급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학급 내의 작은 권력자였던 것이다.

이런 못된 권력자였던 나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가을 자율학습 시간에 같은 반 친구 가운데 한 명이 나에게 저항을 한 것이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그 친구는 나보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았지만 반장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학급 내에서 발휘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반 친구들을 통제하고 싶어했지만 이 친구는 반장의 권위에 도발적인 행동을 했다. 그 친구는 “네가 뭔데 우리더러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느냐, 반장이면 다냐.”라면서 나의 권위에 도전해 왔다.

나는 이 친구가 자율학습 시간에 다른 친구들과 장난을 치면서 떠들고 있었기에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교정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번 주의를 주고 나서 칠판에 그 친구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칠판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웠다.


권위에 도전한 친구와 화해하고 얻은 것

나는 이름을 적고 그 친구는 이름을 지우는 풍경이 벌어졌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엔 고성이 오가게 되었고 주먹다짐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둘이 싸움박질을 하자 다른 친구들은 싸움을 말렸는데 나는 결국 그 친구가 마구 휘두른 주먹을 피하지 못해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이어서 쉬는 시간을 마감하는 종이 울렸고 우리들의 싸움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방과 후 학교 뒷산에서 다시 일전을 치르기로 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우리 둘은 끝나지 않은 싸움을 끝내려고 학교 뒷산 공터로 같다. 싸움 구경을 위해 쫓아온 몇몇 친구들이 있었지만 사나이답게 둘이서만 결전을 치르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미 코피가 터진 나는 비장한 결심을 했고 내가 흘린 코피를 다시 돌려주겠노라 다짐하며 어서 덤비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먼저 나에게 용서를 청했다. 자신도 사실은 나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면서 사이좋게 지내자고 악수를 청해온 것이다.

사실 자신도 반장 역할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친구들에게 명령하거나 억압하는 것보다는 반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더 멋있는 반장이 아니겠느냐고 나를 설득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먼저 용서를 청하는 그 친구 앞에서 나는 주먹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친구 앞에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했었는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반장이란 권한을 갖고 같은 반 친구들을 은근히 괴롭혔던 것들을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결국 그 친구와 화해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반장의 힘이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괴롭히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장은 그야말로 반 친구들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봉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나는 반 친구들을 반장의 힘이나 권력으로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말썽꾸러기였던 친구들 때문에 선생님께 불려나가 여러 번 혼나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그들을 고발하는 밀고자가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는 의리 있는 반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권력은 국민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는 힘, 특히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게 행사하는 강제력’을 뜻한다. 이러한 권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권력이다.

억압적인 통치구조 안에서 국가나 공공단체가 국민들을 지배하고 강제하려고 사용하기도 하는 공권력은 한때 우리 사회 안에서도 그야말로 폭력으로 다가왔었다.

시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이 공권력의 불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 경찰들과 시위대의 싸움은 그야말로 삼국시대의 투석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대에 맞서 곤봉을 휘두르고 최루탄을 쏘아대는 모습을 경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공권력이란 불의한 것, 폭력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공권력이 바로 국민들로부터 위탁된 것이고 그러한 공권력을 부여한 것이 바로 국민들이란 점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누리는 모든 정치적인 권위는 바로 이러한 국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 정치적 권위를 사용하는 모든 국가 공무원들의 업무는 그야말로 국민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공권력이란 한 사회의 국민들이 더 인간답게, 그리고 그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만 공권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정치적 권위의 사용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개인이나 개별 이익단체의 자유가 방종이나 무질서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면서 전체 공동체의 선익으로 이끌려면 바로 정치권위가 필요하고 그러한 정치권위가 공동체 전체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도덕 질서 안에서 행사되는 권위

“정치권위는 개인과 집단의 자유로운 활동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자유를 통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며, 공동선을 달성하고자 개인과 사회 주체들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보호함으로써 질서 있고 올바른 공동체 생활을 보장하여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94항).

그러나 아직도 한국사회 안에는 정치권력이 일부 집단이나 개인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민의 전체 이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일부 정당이나 소수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는 부패한 일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수십 년 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권력 실세의 비리 사건들이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 지루한 싸움은 끝나지 않은 싸움으로 우리 사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정치적 권위가 지니는 모든 존엄성은 도덕 질서 안에서 행사됨으로써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덕 질서의 첫째 원리와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느님이시며, 권위의 힘이 독단적인 의지나 권력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질서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증진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396-397항 참조).

누군가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 강제력을 동원한 폭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도덕적인 질서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비추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그 권력은 더 이상 선하고 올바른 것으로 평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을 대표로 뽑는 선거철이 다가온다. 그들의 허울뿐인 공약보다는 진정성과 도덕성을 살펴볼 때다. 권력자란 더 이상 힘으로 국민들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덕적인 봉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황창희 알베르토 - 인천교구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1997년에 사제품을 받고, 로마 알폰소신학원에서 석사,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서 사회교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인천가톨릭대학교 교학처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황창희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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