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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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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18 ㅣ No.721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1)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중풍병자와 사마리아 여인의 예화를 통해 우리도 그들과 유사하게 겪는 일, 곧 삶의 현장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기도하는 길을 배우고자 했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훈련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와 삶의 조화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에게 오는 문제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삶에 더욱더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자꾸 은둔하려는 현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활동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기도가 생활화된 삶으로 이어지는 면모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안에서 스스로 각성이 일어나 실천하러 나가는지 아니면 좀 더 기도에만 머물고 싶은지 식별해 볼 필요가 있다. 자꾸 침묵하려 하고 고요함만을 추구하는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활동을 조화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를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마냥 신선처럼 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이 보내신 하루와 우리가 지낸 하루가 얼마나 유사한지, 이번 달과 다음 달에는 기도 안에서 그분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삶을 들여다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목표이다. 기도하면서 신약성경의 모든 대목을 가지고 예수님의 삶을 들여다볼 수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라고 이름 부를 것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치유를 하신 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신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활동하신 뒤 물러가 기도하시는 등(마태 14,23; 마르 6,34) 이를 반복하시는데,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으로부터 기도와 삶이 교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르 6,45-52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일화를 통해 기도가 삶의 열매로 맺어져야 하는 그 의의를 함께 성찰해보기로 한다.

이 일화에서 예수님은 오후 무렵 제자들을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신 뒤 군중들과 작별을 하고 산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미뤄 짐작하건대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그날 있었던 하루의 삶을 말씀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큰 바람이 부는 호수에서 제자들이 배가 뒤집힐까봐 밤새 노를 젓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성큼 그들 곁으로 걸어가신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가령 자신이 레지오 마리에 회합을 하는 중이거나 환자방문 내지 신앙을 권면하느라 집 바깥에 있다고 하자. 이때 딸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 냉장고에 밑반찬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 오늘 뭐 먹을 거예요?”라는 식의 말들이 나온다. 마치 큰 바람 속에서 난리치는 제자들처럼 딸이 자신에게 성화를 해대는 상황에서 어떡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험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일단 집으로 가야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있는 배로 가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간다. 집에 갔을 때 “엄마, 밖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하시느라 애쓰셨어요”라는 말은 기대하지도 않겠지만 자신을 위로해주기보다는 “엄마, 집에 반찬이 떨어지도록 뭐 하셨어요?”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 지금 현실적 삶에 맞닥뜨리고 있다.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매우 수고했지만, 저는 보상을 얻으려 하기보다 또 다시 새로운 사명을 위하여 집으로 돌아온 저를 의식하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 당신은 어떤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으셨겠지요. 이것이 사명을 수행하는 자의 모습임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됩니다”하고 기도하며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이러면서 우리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큰 바람을 잠재우는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제자들 곁으로 가셨을 때, 그분은 늘 기도로 무장하기 때문에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모든 것이 잔잔해진다.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 멸치를 볶을 때 아이들이 안정감을 얻는 것처럼 기도하는 엄마, 기도하는 아빠는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 숨 쉬는 공간에 깊은 안정감을 준다. 이것이 기도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이 곧 기적이 아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를 극복하기도 힘든데, 기도하는 엄마, 기도하는 아빠이기 때문에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즉시 방향을 돌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부모가 성당활동을 함으로써 자녀들이 엇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모가 기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아감으로써 자녀들에게는 삶의 좋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엄마, 아빠의 자녀들이 깊은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열두 명의 제자를 이런 안정감 속에서 양성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좋은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활동 전의 기도, 기도 후의 활동이라는 형태를 예수 그리스도가 지내신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하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날마다 자주 들여다봐야만 우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관상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가지고도 하지만, 삶 안에서도 관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기도를 계속하다보면 아주 당황스런 상황이 됐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질문을 하게 된다. “예수님,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하고 질문하며 기다린다. 그러면 놀랍게도 주님은 현장에서 답을 주신다. 기도와 삶은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이다. 이와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는 다음 달에도 계속된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9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2)



지난달에 이어 우리는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를 계속한다. 기도와 삶은 따로 분리돼선 안 되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좀 더 현실적이며 생생하다. 이번에는 열매를 맺기 위한 여정에 필수조건인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마침 10월은 봄에 뿌린 씨앗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듯 열매를 내어놓는 축제의 계절이다. 유난히 가물었던 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과연 가을에 열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때가 되니 우리에게 오곡백과가 선물로 주어졌다. 물론 이는 농부의 땀 흘림을 통해 온 것이다. 그래서 10월은 고통을 생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자연은 찬란한 빛을 발한다. 그 찬란함은 고통을 딛고서 광채를 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야 55,10-11).

이 말씀에서처럼 삼라만상은 존재의 목적과 사명이 있으며,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엄연히 그러하다. 각자의 삶의 배경과 경제적 능력 그리고 외모를 넘어서는 개별 삶의 목적과 사명은 무엇일까? 가을의 심오함을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방하착’(放下着)이다. 곧 “내려놓아라”, “내버려라” 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을 묵상하기엔 조금 이른 듯 하나 날씨가 스산해지고 가을이 깊어 가면 모든 것을 버리고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가을 잎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떨어짐조차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흙)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반대로 그 떨어짐을 거부할 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떨어지는 것이 사명을 다한 가을 잎의 현실이기도 하다.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방하’(放下)는 나날의 수련을 통해 가능하다. 나날의 수련이란 무슨 뜻일까? 각자의 소중한 일상이 바로 수련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여 날마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혼배성사를 통해 한 지붕아래 살게 된다. 두 사람은 자녀를 낳고 고생스러워도 알콩달콩 양육하고 교육을 시켜 자녀를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수련을 받는가? 특히 중년기를 살아갈 때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수련장이 되어 우리의 사명을 일깨워 준다.

“낡은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6-17).

새로운 세대요 인류인 자녀는 부모의 세대와 매우 다른 삶의 목적과 사명을 부여받았다. 만약 부모가 새 세대 자녀에게 새 가죽부대를 줄 수 없다면, 도리어 자녀에게 새 가죽부대가 무엇인지 묻고 배워야 한다. 지난 세월 어른인 우리가 새 세대에게 크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도 살지 않은 그 많은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특히 자녀 가운데 부모의 뜻을 거스르거나 부모에 반하여 거친 행동을 한 젊은 자녀에게 그랬다면, 또 이도 저도 아니고 무기력한 채 부모와 대화조차 하지 않는 젊은 자녀에게 그랬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 낡은 가죽 부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여주기식 일상 또는 보여주기식 신앙생활 등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낡은 부대를 들고서 새 포도주에게 거기에 담기라고 강요해선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대신 우리가 새 부대를 마련하면 자연스럽게 새 포도주가 거기에 찾아오도록 우리 자신을 수련하라고 초대하신다. 구체적으로 수련이란 자녀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에 찬 가르침보다 안아줌으로써 자녀의 좋은 점을 열심히 찾아내 알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새 부대를 마려하는 일이다. 새 부대가 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날마다 거룩한 어머니께 묵주기도를 하면서 청원을 해야 가능한 일이다. 비록 고통스러운 여정이지만 가끔 섬광처럼 짧게 지나가는 자녀들의 뜻밖의 매력이 그 모든 고통의 순간을 건너가게 하는 엔돌핀이 된 체험을 하지 않는가?

필자는 지난 7월 국내에서 개봉된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돼온 기쁨이란 것이 사실은 슬픔에서 비롯되었다는 메시지에 오래 머물렀다. 주인공 ‘라일리’가 하키 경기에서 지고 난 뒤 슬퍼하고 있을 때, 부모가 그 아이를 감싸 주고 위로해 주자 슬펐던 순간이 바로 행복으로 뒤바뀐다. 이 영화에는 ‘라일리’의 상상 속 친구 ‘빙봉’이 등장하는데, 라일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가는 ‘빙봉’을 위로해 준 것 또한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슬픔이 ‘빙봉’의 우울한 감정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자, ‘빙봉’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의 표현에 따르면, 슬픔은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슬픔이 차지한 내용이 매우 크다. 슬픔 가운데 빛처럼 짧고 강하게 다가오는 삶의 기쁨, 보람, 의미들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한다. “아! 하느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용기를 얻어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 자녀의 성장통보다 더욱 강한 수련은 이제 막 고생이 끝났다 할 무렵 배우자와 황혼 길을 걷고 있는데,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불치병을 얻게 되는 일이다. 이때 우리 인생은 희망이 없는 듯 보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것도 힘들어지지만, 우리는 다시 기억으로 초대된다. 영어로 기억을 remember라고 한다. 이는 ‘다시’라는 뜻의 re와 ‘공동체’라는 뜻의 member의 합성어이다. “그렇다! 하느님과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특별한 관계였지!” 하느님과 자신이 한 member임을 다시금 깨우치는 기억으로 초대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는 듯 느껴지거나 안 계시는 듯 느껴지거나 상관치 않고 우리 삶의 목적과 사명에 함께 하신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10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기도 배움터] 기도 안에서 삶 들여다보기 (3 · 끝)



필자는 지난 1년간 기도의 배움을 나누는 이 지면을 통해 기도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필자는 신학을 전공한 뒤 현재까지 대학생의 인성과 영성교육을 담당하는 사도직에 임하면서 단 하루도 신학공부를 게을리 한 적이 없는 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이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학공부를 하고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영성적으로 가장 좋은 길을 안내한다하여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이러하다. 우선 죽어 사라지거나 죽어가는 모든 것은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살아서 생동하는 믿음이 키워지는 현장은 바로 삶의 수고로움과 고통이 일어나는 매일의 현장이다. 이 현장에서 날마다 기도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비록 기도가 단 한 번 하늘에 쏘아 올리는 주님의 기도라 할지라도 주님의 기도를 날마다 드릴 수 있고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은총이다.

우리가 언제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 성찰해보자. 어떤 이유에서든 삶이 바빠지면서 평탄했던 일상이 와르르 무너질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주님께 봉헌하던 시간부터 줄이거나 포기한다. 사실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바쁜 시기가 지나고 나면 가장 먼저 줄여서는 안 되는 것이 기도시간이었음을 깨우치게 된다. 이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분의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여 퇴직금으로 목돈을 벌기 위해 사업에 투자를 하였다. 월급쟁이였던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으니, 아내되는 이도 사모님이 되어 보고 전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평수 넓은 아파트에 가서 살 수 있겠다는 꿈을 꾸어본다. 그런데 남편이 사기를 당하여 사모님의 꿈은 사라지고 갑자기 빚더미에 앉은 가족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부부는 나름 꾸준히 해오던 매일미사도 접고 레지오도 접고 겨우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일상의 수고와 고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데 그러다보면 하느님께 드리던 감사의 기도가 원망의 기도로 바뀐다. 그리고 몸과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기도생활과 성사생활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들에게 영적시련의 시기가 온 것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떤 부부는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하여 개미처럼 맞벌이를 하면서 주일에는 주님을 찬양하고 시간을 쪼개어 봉사활동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다보니, 차츰 경제적 형편이 좋아지고 여유가 생기게 되자 여가활동과 취미활동, 헬스 및 교양교육 그리고 잦은 여행을 하면서, 주일미사 참례도 소원해지고 봉사활동의 틈새도 잃어버리고 날마다 즐거운 가운데 살아간다. 

전자의 경우든 후자의 경우든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 모두는 다시 하느님을 찾게 된다. 그것도 간절하게 특히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병들거나 시간을 다투는 응급한 상황 또는 생사를 가르는 대수술 중일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생생하게 현존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된다. 만약 이런 갑작스런 불행을 과거에 우리가 범한 어떤 행위로 인한 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미신(迷信)이다. 이는 불행이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되지 아니하고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전에 있거나 놀이터에 있거나 항상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 중에 있거나 불행 중에 있거나 그 소재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심을 믿기에 그분께 우리의 심정과 상태를 말씀드리고 마칠 때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는 것을 “아멘!”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사실 이는 주님을 믿는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불행은 우리로 하여금 가서는 안 되는 길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때가 많다. 특히나 우리가 신앙생활로부터 좀 떨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 수술을 마친 한 자매는 수술 후 가스를 배출하는 방귀가 나와야 하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 방귀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집도한 의사에게 간절히 청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방귀가 나옵니까?” 그랬더니 의사가 답하길 “그냥 걸으십시오.” 그래서 그 자매는 사흘을 열심히 걸었다. 이 병실 저 병실에서는 똑같은 수술을 한 환자들이 방귀를 뀌고 물을 마시고 미음을 먹고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 자매는 여전히 방귀가 나오지 않아 다시 집도한 의사에게 혹시 약이나 주사로 방귀를 나오게 할 수 없냐고 물었더니, 의사의 답변은 그대로였다. “그냥 걸으십시오. 방귀는 반드시 나옵니다”하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매는 엿새 만에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방귀를 대 방출 시켜주십시오!” 자매는 묵주기도를 하며 걸으면서 방귀를 보내달라고 성모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열흘 쯤 되니까 방귀는 반드시 나온다는 의사의 말이 믿어지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란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진 저녁에 가족과 함께 저녁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방귀가 “뿡뿡” 오토바이 엔진소리를 내며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매의 귓가에 이러한 말씀이 울렸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 5,34). 예수님의 옷자락에 달린 술이라도 닿으면 병이 나을 것 같아 손을 살짝 대었던 ‘하혈하는 여인’에게 하신 그 말씀이 바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병은 불행하다. 사기를 당하고 돈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매우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병 그리고 불행한 사건에 자신의 영혼을 실어버리지 말라. 오히려 인간적 실수나 기나긴 삶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병이 들었다하여도 그 주제를 기도의 주제로 삼아 우리는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리고 평상시에 날마다 드리는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고 영성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 1년 동안 ‘기도 배움터’을 집필해 주신 이명기 수녀님 감사합니다.

* 이명기 수녀는 1986년 성심수녀회 입회, 첫서원 후 성심여고에서 교육사도직 수행, 종신서원 후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대학원에서 문학박사 취득, 2006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기초교양필수과목인 ‘인간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외침, 2015년 1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글 이명기 수녀(성심회, 가톨릭대 성심교정 ELP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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