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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90: 18세기 (7)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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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02 ㅣ No.1243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90) 18세기 ⑦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가톨릭교회


‘쓰지만 좋은 약’ 된 시민들의 함성

 

 

루이 다비드 작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의 일부. 가운데 왕관을 높이 든 이가 나폴레옹, 맨 오른쪽에 앉은 이가 교황 비오 7세다.

 

 

미국의 독립 혁명(The American Revolution, 1775~1783)과 독립 선언(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76)은 프랑스 혁명(Rvolution franaise, 1789~1794)이 일어나는 데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하는 동안, 미국과 동맹을 맺고 군사적인 도움을 줬습니다. 양국 간 군사적 교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사상적 교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혁명 이후, 두 나라의 가톨릭교회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프랑스 가톨릭교회 재산을 몰수한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근세 프랑스는 중세 때와 마찬가지로 ‘앙시앵 레짐(Ancien Rgime)’이라고도 일컫는 절대 군주 체제의 왕국이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많은 나라에는 중세부터 근세까지 세 가지 신분으로 이뤄진 사회 계급이 있었습니다. 제1신분은 전체 국민의 0.5%에 해당하는 성직자와 수도자였고, 제2신분은 귀족(전체 국민의 1.5%)이었으며, 제3신분은 나머지 98%에 해당하는 평민이었습니다. 왕은 어떤 신분에도 속하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계급은 오직 제3신분인 평민이었습니다. 물론 프랑스 왕국에는 14세기 초부터 세 신분의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인 삼부회(三部會, tats gnraux)가 있었으나, 17세기 초 이후 한 번도 소집되지 않은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

 

18세기 프랑스 왕국의 평민들은 왕국에 10~15%, 교회에 10%, 그리고 성직자 부양을 위해 8%의 세금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의 재정이 날로 악화되자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1792)는 과세 조정을 통해 왕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1789년 6월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루이 16세가 성직자와 귀족에게도 과세를 계획하자 성직자와 귀족은 왕권에 반발했습니다. 여기에 평민들까지 삼부회의 표결 방식에 불만을 느끼고 반발하면서, 제3신분 중심으로 베르사유 궁전(Chteau de Versailles) 내 테니스 코트가 있는 건물에서 국민회의를 소집하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국민회의는 1789년 7월 9일, 국민제헌의회로 개칭하고 헌법 제정 준비를 했고, 파리 시민들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국민제헌의회는 1789년 8월 십일조를 폐지하고 그해 11월 가톨릭교회가 소유한 재산을 국유화하기로 결정했으며, 1790년 7월 성직자 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을 제정해 프랑스 가톨릭교회를 프랑스 정부에 종속시켰습니다. 이 법은 교구 경계를 국가 행정 경계와 통일시키고, 시민이 성직자를 선출하며, 국가 행정 관료가 주교를 지명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국민제헌의회가 1790년 12월 프랑스 성직자들이 혁명 법률에 충성 선서를 하도록 의결하자, 교황 비오 6세(Pius PP. VI, 재임 1775~1799)는 1791년 2월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충성 선서를 하지 말도록 요청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성직자 기본법에 반대하며 프랑스 서부 방데(Vende)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는데, 방데 반란(Rbellion Vendenne, 1793~1801)동안 약 30~4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반란 전쟁도 오래가고 사망자도 속출하자, 당시 프랑스 제1공화국 제1통령이었던 나폴레옹(Napolon Bonaparte, 1769~1821)은 1801년 교황 비오 7세(Pius PP. VII, 재임 1800~1823)와 정교협약(政敎協約)을 맺었습니다. 나폴레옹 정교협약에서 프랑스 정부는 가톨릭교회의 전례를 공적으로 자유롭게 거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반면, 제1통령이 주교를 임명하고 정부 시책에 반대하지 않는 성직자만 본당 사제로 임명하며 주교와 사제에게 정부에 충성 서약을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혁명 이후 정부에 몰수된 재산은 이의를 제기하지 말며, 혹시 누락돼 교회가 소유한 재산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협약 내용이 가톨릭교회에 불리했기에 많은 사람이 협약 체결을 반대했지만, 교황 비오 7세는 교회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1801년 7월 협약을 인준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809년 교황령을 점령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잃게 됐으며, 가톨릭교회는 빈 회의(Wiener Kongress, 1814~1815)에서 교황령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우위설을 주장한 갈리아주의

 

18세기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프랑스 왕국과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 원인은 17세기 나타난 갈리아주의(Gallicanism)에서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 입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가 1682년 소집했던 프랑스 가톨릭교회 성직자 대회에서 발표된 「네 가지 조항에 대한 선언문(Dclaration des Quatre Articles)」에서 언급된 공의회 우위설을 넘어서, 소위 프랑스 국왕 우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은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PP. VIII, 재임 1689~1691)의 강한 항의와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PP. XII, 재임 1691~1700)의 설득으로 1693년 철회됐지만, 프랑스 왕국과 국왕이 가톨릭교회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형적인 갈리아주의의 인상을 깊게 남겼습니다.

 

18세기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프랑스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갈리아주의의 잔상 때문만이 아니라, 면세 혜택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프랑스 왕실과 가깝게 지내려고 했습니다.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에게 반감을 드러낸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가톨릭교회에도 똑같이 반감을 드러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844년에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Alexandre Dumas pre, 1802~1870)가 쓴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에서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 때 재상을 맡았던 귀족 출신 정치가 리슐리외(Armand Jean du Plessis de Richelieu, 1585~1642) 추기경의 정치적 행보를 악당과 같이 묘사했던 것만 봐도, 당시 평민들이 가톨릭교회에 느꼈던 반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프랑스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1816년 교황 비오 7세에게 조건 없는 순명을 서약했으며, 저술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753~1821)는 1819년 저서 「교황에 대하여(Du Pape)」에서 교황권 지상주의(Ultramontanism)를 강조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1820년대부터 프랑스 내에 교회와 가톨릭 신앙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프랑스 혁명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전례 생활을 금지하는 등 프랑스 가톨릭교회에 물적ㆍ영적 피해를 줬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 본다면, 프랑스 혁명은 일반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리지 못하고 세속 권력에 유착해 살아가던 프랑스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경종을 울렸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역설적으로 프랑스 가톨릭교회에 영적인 활력을 되찾아준 기회가 됐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9월 2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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