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갑작스럽게 죽은 이를 위한 장례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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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676

갑작스럽게 죽은 이를 위한 장례미사 강론


데이비드 스코치(미국 올랜도 교구 성 베드로와 바오로 본당 신부)


대부분의 장례식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결혼생활을 한 지 46년이 된 70세의 마리아 할머니는 저녁식사 준비를 하다가 쓰러졌다. 85세인 야곱 할아버지는 한 해 전부터 심장병을 앓았다. 74세의 아가타 할머니는 지난 4년간 치매를 앓으면서 가정 간호를 받았다.


이러한 경우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준다. 그러나 부모나 자녀의 갑작스런 죽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이러한 장례미사 강론을 준비할 때,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해본다.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


그것은 모임에 가는 길에 과속으로 달려 발생한 자동차 사고일 수 있고, 주차장에서 차 문을 닫는 동안 복부 대동맥류가 파열한 경우일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죽음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 문화가 죽음을 남의 일이라고 미뤄놓는 경향이 있으므로 교회의 이러한 접근은 죽음을 더욱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유족들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편하게 할 것이다.


둘째, 살아남은 이들은 어떠한가? 충격 상태에 있으며, 심하게 울고, 멍한 상태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것이 처음의 일반적 증상이다. 그리고 얼마 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다. 저녁식사 때 남은 음식은 식탁에 아내 자리만 비어있음을 느끼게 할 것이며, 아들은 더 이상 야구공 던지는 법을 가르쳐줄 아버지가 곁에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크리스마스에 모든 가족은 그들이 받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선물을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맞게 될 이러한 일들을 설명해 주는 것은 유족들에게 그들이 겪는 감정이 정상적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할 것이다.


“그는 더 좋은 곳으로 갔습니다.”라든가 “이제 우리는 천국에 천사 한 명을 더 갖게 되었습니다.”라는 식의 진부한 말로 죽음을 떨쳐버리려 하는 대신에 죽음의 영향 등을 설명하는 것이 유족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상황이 하느님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비극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어떤 부부가 필자에게 그들 딸이 죽은 뒤에 침대맡에서 딸의 존재를 드러내는 빛의 기둥을 보았으며, 그것이 그들에게 평화를 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천국의 약속과 부활은 달나라처럼 멀게 느껴진다. 슬픔에 빠진 이들을 실제로 돕는 것은 슬픔을 함께 나눌 친구나 가족으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이다.


필자는 유족들을 만나면 연도 때에나 장례식에서 한 마디씩 하도록 독려한다. 친구들과 함께 고인의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필자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안젤라의 아버지 장례식에 그의 친구들이 왔다. 어른들이 한 명씩 일어나서 유족들을 위한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안젤라의 친구들도 자기들의 차례를 바랐지만, 어른들에게 주눅이 들어있었다.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앞자리에서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종종 유족들이 특별한 요청을 하기도 한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를 틀어달라거나 제단에 고인의 사진을 놓도록 해달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서는 「장례 예식서」 ‘일러두기’를 참고할 만하다. 여기서는 다음의 네 가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장례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 어떻게 살아있는 이를 위로할 것인가?
2. 어떻게 죽은 이를 하느님께 의탁할 것인가?
3. 생명의 선물에 대해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드릴 것인가?
4.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유족들의 바람을 들어주다 보면 사목적 딜레마에 빠질 수가 있다. 그렇지만 위에 말한 네 가지 목적을 중심에 두고, 이 네 가지를 모두 수행할 때 장례미사가 죽음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교회의 희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의 강론 예들은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는 것 이상을 목적으로 두었다. 대부분 익숙하지 않은 하느님 이야기를 꺼리지만, 강론은 고인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한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연장을 쓸 때가 있으면
써서 안될 때가 있고
서로 껴안을 때가 있으면
그만 둘 때가 있다.
모아들일 때가 있으면 없앨 때가 있고
건사할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전도 3,1-8).

 

 

20세의 마리아를 위한 장례미사 강론

 

마리아는 토요일 밤 늦게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차에 태워 클럽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를 너무 빨리 모는 바람에 속도 조절 능력을 잃고는 차가 뒤집어졌습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마리아는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친구들도 탈출은 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몇 시간 뒤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는 다 정한 때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죽기에 좋은 때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불과 3개월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의 고향인 시카고에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또한 그가 초등교육을 공부하고자 희망했던 대학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서 계속해서 성장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공부도 하고, 세상을 발견해 가는 그러한 때였습니다. 전혀 하늘나라로 갈 때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촌들과 친척들이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친구들은 모여 머리를 흔들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약함의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충격은 깊은 호흡을 쉬게 하고, 강해지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것입니다. “하느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을 줄 사람들을 보내주심으로써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손이 여러분을 붙잡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돌볼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읽은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에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에 ‘피에타’ 상이 있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안고 계신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모님의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 없이 단지 죽은 아들을 그의 팔에 안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가능한 무게 아래로 향해 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들이자 구원자였으며, 삶의 전부였습니다. 왜일까요?


때가 올 것입니다. 묵시록이 보증하듯이 때가 올 것입니다. 서로 다른 국가, 인종,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 주위에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보살피시고 생명을 주는 물이 솟는 샘터로 이끄실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 나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모두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이때가 올 것입니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주 하느님,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다.
그 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주님이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이사 25,6ㄱ. 7-9).

 

 

34세의 안드레아를 위한 장례미사 강론

 

저는 안드레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목요일 밤에 들었습니다. 안드레아는 건설 현장에서 마지막 밤 근무 교대를 하고, 차에 타려 하였습니다. 그날 이른 저녁에 안드레아는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와 두 아이와 통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밤 11시 15분쯤 주차장에서 차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복부 대동맥류 파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는 차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응급구조사들이 그를 회생시키려 하였지만,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안드레아의 죽음은 갑작스러우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그는 이제 34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70세나 80세까지 삽니다. 안드레아는 젊고 건강했습니다. 지난 밤 영안실에 가보았을 때, 그의 관이 너무 작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사진이 관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 많은 것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그의 집 부엌에는 그가 고치다 만 식탁의자가 있습니다. 그의 아들 아담은 달리기와 장난감 자동차 경주를 아빠만큼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빠한테 야구공 던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아담은 그의 동생 모세에게 공 던지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공 던지는 놀이를 하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나중에 운전하는 것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앞으로 겪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조심스럽게, 혼인관계에서 또한 많은 부분을 남겨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생을 함께 살며, 가족을 돌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함께 늙어가는 것을 계획합니다. 그러한 혼인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남았습니다. 죽음, 특히 예상하지 못한 죽음은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을 남기게 됩니다.


만일 죽음이 우리 마음에 있는 깊은 신앙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그럭저럭 견디어 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무언가 실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수도관이 고장 나면 연장통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고, 또 고장이 나면 전화번호부를 찾습니다. 우정에 금이 갔을 때에는 그 친구와 화해할 수 있고, 또 여전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것입니다. 누군가 목마르면 마실 것을 가져다주며, 배고프면 먹을 것을,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가져다줍니다. 낯선 이를 환영하고, 갇힌 이를 방문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이 모든 선행을 합니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발달된 의료기술이 그 순간을 연장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죽음 뒤에는 깊은 슬픔이 찾아옵니다. 슬퍼하기 전에 무력해집니다. 분명히 며칠 밤 텔레비전을 보고, 술을 많이 마시며, 슬픔을 달랠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미약한 노력들은 단지 피할 수 없고, 엄청난 슬픔을 직면해야 하는 날을 뒤로 미루게 할 뿐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비웃는 듯합니다. 세상은 회색빛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한 남자는 나이 들기 전에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떠나 죽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상의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서 이를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죽음을 막을 수 없지만,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이를 막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이를 바로잡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없애고자 마술 지팡이를 휘두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십니다. 참혹함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고통받고 있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이기는 신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 응답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응답의 일부분입니다. 죄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섬으로써 죽음의 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때로 이것은 희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이 죽음마저도 파괴하여 우리를 하느님 안에 다시 함께 모이게 할 그날을 고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주님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주님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주님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주님을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나는 살아생전 이 땅 위에서
주님의 은덕을 입으리라 믿사옵니다.
주님을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주님을 기다려라(시편 27,1.4.13-14).

 

 

38세의 프란치스코를 위한 장례미사 강론

 

프란치스코는 매우 건강했습니다. 그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적절히 음식을 섭취하고, 잡지 등에서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최근 목의 통증이 그를 괴롭히자 그는 검사를 받으려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사람들이 들은 것은 그가 뇌졸중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인공호흡기가 그의 호흡을 도왔습니다. 목이 마비되어 그는 혼수상태로 누워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누나, 그리고 세 형제가 캘리포니아에서 급하게 날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도 건강했던 프란치스코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내는 어머니와 아내로서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 자녀의 아버지로서 시청에서 일을 하였고, 음악 밴드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이들 학교의 친구들은 기도를 바치고 먹을 것들을 보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잠시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깜박이기도 했습니다. 한 번 깜박이면 ‘아니’라는 뜻이고, 두 번 깜박이면 ‘그렇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동안 가족과 친구들은 프란치스코와 통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뗀 뒤에 가족들은 그의 곁에서 밤새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그리고 그 다음날까지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프란치스코의 손을 잡고서 그렇게 함께했습니다. 화요일 밤 그는 더 깊고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해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질문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적절한 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의료에 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뇌졸중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길 것이며, 하느님에 관해서는, ‘왜 프란치스코였을가?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왜 착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날까?’`하는 질문, 미래에 관해서는 ‘그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가족들은 살던 곳에 계속해서 살아야 할까 아니면 캘리포니아로 다시 이사가야 할까?’ 하는 등의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 가운데 몇몇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올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느님과 함께 있다.”라든가 “언젠가 그를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가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하라.” 등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은 다른 날, 다른 이들을 위한 답들입니다. 오늘 여기서는 이것이 그 답으로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며, 메우기에 너무나도 큽니다. 누군가 ‘영원’은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모든 질문에 하느님께서 대답하시는 시간만큼 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평화롭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코를 위해 옳은 일을 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음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한 것이 평화를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지금 평화롭습니다.


저는 이제 가족과 친구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말하는 시간을 갖도록 초대하고자 합니다. 기회를 얻지 못해 하지 못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희망과 위로의 선물이며, 슬픔과 희망, 기쁨과 슬픔을 결합시킬 것이며,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강론은 살아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죽은 이를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어린이와 젊은 부모의 장례식에서 이러한 네 가지를 갖춘 강론은 그 시간을 은총의 순간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생명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임을 믿게 될 것이다.”

 

* 원문: David Scotchie, “How to Preach at Tragic Funerals”, The Priest`(1999.11.), 21-24면, 이준혜 편역.

 

[사목, 2005년 9월호, 주교회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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