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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장궤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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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1 ㅣ No.234

[에파타] 장궤틀

 

 

신학생 시절, 루디 신부를 따라 비엔나에 구경 갔다가 그곳에 있는 작은 자매회 본부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한 일이 있었습니다. 본부라고 했기에 집도 크고 수녀님들도 많을 줄로 생각했는데 웬걸요, 정반대였습니다. 조그마한 집 한켠에 마련된 방(그 집에서는 가장 큰 방이었죠)에 성당을 꾸며놓고 수녀님들도 4~5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성당에는 장궤틀이 없었고 수녀님들도 그냥 땅바닥에 꿇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땅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기도를 드렸는데, 저는 생각지도 못한 기도자세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기도자세에 대해서는 나중에 사하라 사막의 성 푸코 성인*의 전기를 읽고 나서야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사하라 사막 원주민들의 기도생활이 수녀님들의 기도자세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제겐 아직도 그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로 기도하는 수녀님들의 모습이 항상 새롭게 떠오르곤 합니다.

 

이번에는 성당에 있는 장궤틀과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모세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께서 신발을 벗고 그 자리에 꿇으라고 하시며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높으신 어른 앞에 자신의 자세를 낮추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대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성대한 전례를 거행할 때에도 모든 백성이 꿇어서 기도하였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기도 전례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도 때때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최후만찬 때에도 제자들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바치셨고,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잡히시기 전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번민의 기도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세로 기도를 드리셨는지는 궁금하기만 합니다.

 

장궤틀이 성당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입니다. 생각건대, 장궤틀은 확실히 중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중세기에 높으신 분들을 위하여, 즉 왕이나 귀족들·고위 성직자들이 좀더 편한 자세로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장궤틀입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엉뚱하게도 장궤틀이 지위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고, 요즘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특권 지위 표시로도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도 성당에 가면 으레 성당 바닥에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와는 달리 주교님이나 본당신부님, 수녀님들은 신자석이지만 따로 마련된 장궤틀에 꿇어 기도를 하셨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삭발례를 받고 출신본당 성당에 돌아와서 제대칸에 놓아둔 장궤틀에 처음으로 꿇어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 영광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는지 지금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렇게, 중세기에 시작된 장궤틀은 처음엔 특권지위의 표시로도 보였지만,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수도원들이 생겨나면서, 모든 수도자들이 장궤틀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 참석하는 신자들도 다 장궤틀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성주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 봉헌한 성전에 모두 장궤틀을 만들어 넣자, 장궤틀은 차츰 기도하는 장소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에 어른들 앞에 앉을 때처럼 꿇어 앉아 기도하는 것이 기본자세였고, 전례 중 중요한 부분(거양성체)에서는 장궤를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자 성당의 장궤틀 설치는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성전을 지을 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성당에 가마니를 깔고 꿇어 기도하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예비신자들이 몰려오고 신자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그렇게 되자 기존 성당이 수용인원을 다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원을 성당에 들게 하기 위하여, 장궤틀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부분을 없애버렸고, 앞에 책을 놓고 앉기만 하는 걸상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이제 장궤틀은 제 목적을 잃고 한낱 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당에 간다는 것은 기도하러 가는 것인데, 기도하는 자세가 흐트러진다면 구태여 성당으로 가는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기도할 때에 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루르드에 가면 침수예절을 하고 나서 동굴 앞 땅바닥에 꿇어 기도하면서 그 진흙땅에 친구하는 기도의 자세가 있습니다. 저는 그 자세가 너무 싫어 처음에는 침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갔을 때 수시 양거(Susie Younger) 자매의 간곡한 권고에 못 이겨 이것이 회개하는 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겨울철에도 솟아 있는 굴 주위의 풀도 동물처럼 막 뜯어 먹었습니다. 그때 ‘내 존재가 이렇게 버러지만도 못한 불쌍한 처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순간 느껴오는 감사와 기쁨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전에 신자들이 그렇게 감격스러워 하는 모습에 비로소 동참하는 순례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취하는 기도의 모습은 어떤지요? 편히 앉고 서고 하는 그 모습은 마치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리가 모자란다고, 많은 인원만 수용하려고 큰 공간에서 집회만 하는 것 같은 성당 모습은 기도하는 제 모습의 성당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할 때 손뼉을 힘차게 치거나, 온갖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모든 있는 감정을 제 마음대로 다 표시하는 중구난방의 모습도, 데모하는 것같이 주먹을 휘두르며 군대구호 같은 소리를 지르는 것도, 물론 기도의 제 모습과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온 회중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기도할 때에는 수세기 동안 공동생활을 하여온 수도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자세와 규율, 마음가짐이 인간 본연의 자세인 겸허와 순수함을 지닐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말씀을 나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장궤틀의 본 뜻이 오늘에도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성 푸코 - 사하라의 은자(隱者) 샤를 드 푸코. 그는 1882년 군에서 퇴역, 모로코를 탐험했고 그 뒤 가톨릭에 복귀, 1888~1889년 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1901년 사제가 되고, 같은 해 아프리카 오지 타만라세트로 가서 그곳 말을 배워 원주민을 돌보며 불모의 사막에서 하느님을 찾는 내적 여정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원주민 반란으로 살해되었습니다.

 

[월간빛, 2001년 10월호, 이성우 아킬로 신부(대구대교구 봉덕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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