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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복음으로 세상보기: 우리 아이들의 마음 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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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보기] 우리 아이들의 마음 고생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한 직업은 무엇일까요?
올해 초 천육백만 명이 넘는 관객수를 기록한 ‘극한 직업’이란 영화가 있었지만 우리 학생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은 밤에 퇴근하고, 퇴근 후에 잠도 마음껏 자지 못하고 야심한 밤까지 야근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매일 반복해서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든 직업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남들과 비교당하고, 비난받고 더 열심히 일하기를 강요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생들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깝습니다. 이런 청소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더 험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치솟는 청년실업으로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에선 망했다)’이라는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닥칩니다. 학업과 장래에 대한 높은 부담감이 짓눌려 지내야합니다. 이로 인해 청소년들은 학업 스트레스, 학교폭력, 인터넷 중독, 방임, 사이버 폭력에 시달립니다. 문제는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8년 청소년들의 자해와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 갔습니다. 청소년 SNS에 ‘자살·자해 인증 샷’이 확산되면서 초등생에까지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2018년 통계청·여성가족부의 통계를 보면 청소년 사망 1위가 자살이었으며 청소년 자살, 자해 시도자 수가 매년 2천명 이상 유지한다는 중앙응급의료센터 2017년 자료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청소년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자해와 자살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자해는 자살 목적보다는 고통으로부터 잠시 도피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죽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해 청소년 대상 심층 인터뷰 자료를 보면 크게 두 가지 가족요인과 학교요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몸 망가뜨려 부당한 삶을 세상에 알리려 해
가족요인을 보면 부모님 맞벌이로 같이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거나, 부부갈등으로 인한 무관심, 나에게 관심 없이 각자의 삶을 사는 부모, 도움이나 상담을 받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는 가족, 가족 앞에서 자해를 했지만 방관, 무조건 나를 비난하는 부모, 힘들다고 말했을 때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는 부모 때문에 자해를 선택한다고 청소년들은 답하고 있습니다. 학교요인으로는 어려운 수업을 따라 갈 수 없는 답답함, 공부를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경험, 왕따, 학교 폭력 등 이제 학교가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삶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자해 행동은 나를 처벌하기 위해, 또한 화가 나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나의 힘듦을 보이기 위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공감을 받지 못할 때,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 하려고, 특히 더 이상 감정을 누를 수 없어서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자해를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이 생애의 부당한 삶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네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학교 운동장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운동장이 있다하더라도 동네 어른들이 점유해버리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한창 뛰놀고 커야할 아이들이 부모들의 욕심으로 빽빽한 학원 스케줄에 쫓겨 편의점에서 컵라면, 김밥, 햄버거를 먹어야 합니다. 초등학생의 혼밥족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우리 어른들이 이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 핸드폰입니다. 자신의 불안, 우울, 분노, 억울함 등등 자신이 모르는 그러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스마트 폰의 게임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이렇게 아이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이것이 청소년들의 잘못된 행동 탓일까요? 얼마 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SKY 캐슬’ 드라마에서 보여주듯이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가치가 권력과 돈으로 평가되면서 권력과 돈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에서 부적응 자가 되었고, 이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가르쳐 준 것은 남을 짓밟아 권력을 잡고, 돈을 많이 가지는 방법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어른들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을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반항하고, 그러다 학교 부적응자가 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청소년들에게 씌웠던 절망의 굴레 다시 벗겨줘야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주최로 “가톨릭은 청소년을 사랑합니다”라는 주제의 2019년 청소년 심포지엄이 5월에 청소년법인 20주년을 맞아 3차로 진행되었습니다. 청소년의 위기, 주일학교의 위기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교회가 새롭게 청소년들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청소년 사목의 새로운 사목방향을 찾기 위한 심포지엄이었습니다. 1차에는 “청소년 교육환경과 사회적 보상 체계”, 2차에는 “청소년사목의 현실과 방향”, 3차에는“청소년 아웃리치”로 정해 학교 밖 청소년 사목, 찾아가는 사목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청소년 담당 정순택 주교님은 개회사에서 “‘약동하는 생명과 기쁨의 존재’로서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청소년에게 부여하신 고유의 본성이라면, ‘서로 경쟁하는 가여운 존재’로서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에게 부과한 아픈 굴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대로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에게 씌웠던 절망의 굴레를 다시 벗겨 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힘을 합하여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처한 제도적인 환경을 실질적으로 개선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사목의 개혁안을 다룬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젊으신 분이시기에 너그러운 봉사와 선교 사명을 통해 젊은이들과 동반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전쟁과 인신매매, 성적 착취, 여러 가지 형태의 중독 등 젊은 자녀들이 처한 현실 앞에서 함께 울어주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찾아’ 모으고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공명정대한 사랑의 언어 등을 실천하고,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대중 친화적인(popular) 청년사목’을 펼칠 것을 주문했습니다.
끝으로 김현수 선생님의 책 ‘요즘 아이들 마음고생의 비밀’에서 아이들이 바라는 어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아이들은 따뜻한 어른과 만나길 바랍니다. 바쁘고 차갑고 채권자처럼 구는 어른은 사양합니다. –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말해달라고 합니다. 망했다고 하지 말아주세요 – 누군가에게라도 한 번쯤은 괜찮은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 진짜로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달라고 합니다. – 잘난 척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어른부터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이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게 하는 첫 번째 일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7월호, 이영우 토마스 신부(서울대교구 봉천3동(선교)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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