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02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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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1-16 ㅣ No.181

연중 2 주일 (나해)

          1사무엘 3,3ㄱ,4-10 .19    1고린 6,13ㄷ-15ㄱ.17-20   요한 1,35-42

     2000. 1. 16.

주제 : 하느님의 소리 듣기

 

오늘은 연중 제 2 주일입니다.

연중 시기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삶에서 그 뜻을 실천하는 시기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이신 분이 그 신분에 따르는 권리 누리기를 접어두고 인간으로 오신 뜻을 기억하고 그 의지를 실천하는 기간이 연중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연중시기는 성탄시기 다음부터 사순 시기 전까지, 잠시 쉬었다가 부활시기가 지나고 난 다음에 계속됩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 시작은 예수님의 세례 축일이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초대받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다 하려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이나, 돈을 벌어야만 그 날 생계가 유지가능한 사람의 입장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도 또 그 뜻을 실천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그만큼 많이 부딪히는 것이 세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세상에 발생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리가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일은 항상 우리 생명에 관련된 일이 첫 번째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이 세상의 기초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을 알아내는 것도 첫 번째 중요한 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 상권 첫 번째 독서에는 하느님의 소리는 어떤 방법으로 들려오는지, 그 이야기가 마치도 드라마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얻은 아기, 사무엘은 태어날 때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하느님의 성전에서 자라납니다.  몸은 성전에서 자라지만 하느님의 소리는 아직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 ’엘리’가 부른 것으로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그 과정에 사제 ’엘리’가 했던 본보기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엘리’ 사제의 본보기를 기억한다면, 우리 자신, 그리고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어린 사무엘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제 ’엘리’는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응답의 방법을 알려줍니다.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사무엘은 잠자리에 누워서 하느님께 그처럼 대답합니다. 우리도 삶에서 이렇게 답할 수 있으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소리를 겸손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진정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싶다면, 우리가 가진 욕심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욕심에 대한 평가나 비판은 접어두고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에게는 생기는 것도 갖출 것도 많지만, 그렇게 많이 소유하게되면, 외로워집니다. 물건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변에서 떠나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외롭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욕심을 갖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만일 욕심도 없는데 외롭다면,  둘 중의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 우리는 진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때로는 작은 소리로, 때로는 우리가 무시할 법한 말도 되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우리가 모두 알아차리기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저 들려오는 소리만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했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스승의 겸손한 소리를 듣고 다른 스승을 따라나서는 세례자 요한을 따랐던 두 명의 제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따라다녔던 스승을 과감하게 떠납니다. 사람의 변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세상일에는 한번 정해진 것으로 끝까지 가는 일은 없습니다.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일이고, 규정입니다.

 

새로운 스승을 찾아 나섰던 그들이 다가서기 위해서 던졌던 질문은 참으로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그것이 다가서는 방법입니다.  머물고 잠자는 데를 알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 겸손한 뜻을 알았던 새로운 스승은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를 따른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세상 모든 사물을 우리는 눈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몸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을 올바로 건사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업적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귀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소중하게 대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저절로 태어나지 않은 우리가 가진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갖는 마음의 자세뿐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연중시기, 하느님의 말씀대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삶에 초대하는 이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지내겠다고 다짐하시겠습니까? 잠시 그 결심을 봉헌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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