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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가을 이야기 - 일상에서의 도덕과 지혜로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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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365

[영화와 신앙] 일상에서의 도덕과 ‘지혜로운’ 선택 - 가을 이야기

 

 

사실 영화만큼 종교적인 텍스트가 어디 있을까? 굳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나 <벤허>, <십계> 같은 직설적인 종교영화가 아니더라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데칼로그>와 같은 키에슬로브스키의 영화들, 베르히만의 영화들은 지극히 종교적이다. 그들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종교에 대해 질문하고 신앙의 문제를 거론하며 진지하게 하느님과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또는 소통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을 그 어떤 종교서의 표현보다 절실하게 다가오도록 만든다.

 

 

영화는 탁월한 종교적 텍스트

 

현재 영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대단하고, 젊은 세대에게는 영화가 필수적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타종교에 비해 한국에서 가톨릭의 영화에 대한 관심과 활용은 떨어지는 편이다. 개신교나 불교 등 타종교처럼 영화를 적극적으로 선교에 끌어들이고 영화제 등을 통하여 젊은 세대에게 먼저 다가서는 능동성을 가톨릭에서는 보기 힘들다. 

 

그런 가운데 베네딕도 미디어의 활동은 문화사목, 특히 영화를 활용한 사목활동으로 단연 돋보인다. 지난 6월 24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는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주관으로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이며 베네딕도 미디어 대표인 임인덕 세바스티아노 신부님의 영화사목을 조명하고 축하하는 세미나 자리가 마련되었다. “교회와 영화, 회고와 전망”이라는 이름의 이 세미나에서 필자는 사회를 맡아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영화가 복음을 전하는 데 얼마나 훌륭한 도구일 수 있는지 그리고 좋은 영화는 얼마나 신심을 북돋우고 상호 이해와 사랑을 전파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베네딕도 미디어가 출시한 작품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포함하여 잉그마르 베르히만, 안제이 바이다, 에릭 로메르 등 영화사적으로 명망 있고 주목받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기반도 가톨릭과 관계있는 유럽 작가들의 영화가 많이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 프랑스 감독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일상생활에서 신앙의 문제를 종교적 엄숙함이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포장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도 좀 더 친근감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성찰

 

에릭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Conte d'automne, 1998년)는 ‘가을’이라는 계절적인 고려와 일상에서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성찰이 신앙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묵상거리들을 제공해 준다. 

 

<가을 이야기>는 로메르의 영화가 그렇듯 일상의 잡사들을 다룬다. 늘 우리 삶에서 부딪히거나 직면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가 되고,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나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영화의 중심 인물은 포도를 재배하는 과부 마갈리와 그의 친구 이사벨이다. 그리고 주변에 마갈리 아들의 여자친구 로진과 남자들이 서성인다. 이사벨은 과부인 친구 마갈리를 위해 지역신문에 구혼광고를 내고 이를 보고 찾아온 남자를 대신 면접한다. 그 와중에 싹트는 미묘한 감정들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을 구성한다. 

 

로메르는 아주 사소한 일상이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바로 인물들이 ‘모럴리스트(moralist)’가 되는 순간이다. 이사벨은 자신을 마갈리로 알고 찾아온 남자에게 감정적으로 이끌리면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마갈리는 관심 있는 남자에게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해 때문에 이 남자를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한다. 인물들은 이 작은 소동 속에서 기뻐하고 한숨짓고 갈등한다. 

 

가장 로메르다운 영화들은 외견상 가벼운 연애담으로 비친다. 그러나 가볍게 보이는 외피를 들추면 욕망, 탐욕, 질투와 같은 인간의 본성들이 부대끼면서 ‘햄릿적’ 선택의 기로에 서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메르는 ‘영화의 파스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의 영화가 인간의 정신이나 사유 특히 선택과 갈등의 기로에 서있는 미묘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로메르에 따르면, 바로 이 미묘한 마음의 상태가 ‘도덕(moral)’인데, 이사벨과 마갈리는 그런 점에서 모럴리스트이다. 이들은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놓고 갈등한다. 로메르 영화 속 인물들의 갈등은 상대나 외부에 공격적인 형태로 투사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의 미묘한 기류들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더 은근하고 더 유혹적이다. 그들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체현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가을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고민하고 갈등하는 끝에 ‘지혜로운’ 선택을 하고 사랑을 이룬다. 이 영화의 라스트, 이사벨 딸의 결혼식 파티에서 흥겹게 춤을 추는 인물들의 모습이 진정한 축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모럴의 시험과 고비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거라.”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매순간 선택을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선택에서 크고 무거운 선택에 이르기까지 늘 우리 앞에는 선택의 순간들이 놓여있다. 돌아보면 무심코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던 경험도 있다. 그러면서 선택의 주체는 자신이고, 그런 만큼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를 바랐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 생각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나의 선택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도 같이 주신다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내가 올바로 살면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도록 하실 것이고, 올바로 살지 않으면 좋은 말씀을 내리시지 않을 것이며(미가 2,7 참조), 내가 빗나가려 하면 나의 귀에 속삭여주실 것이다. 

 

“이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거라”(이사 30,21).

“주님, 당신께서는 바르게 사는 사람의 앞길을 곧게 닦아주십니다”(이사 26,7). 아멘.

 

[사목, 2005년 10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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