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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쟁 방지와 황금률 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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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3 ㅣ No.846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전쟁 방지와 황금률 준수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가장 많이 위협하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무고한 인간을 대량 살상함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가운데 가장 악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방지하는 것은 인간의 최대 의무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많은 종류의 전쟁론이 있다. 아직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므로 논외로 한다.

 

이 글은 먼저 전쟁불가피론과 전쟁의 근본 원인을 검토하고 우리가 전쟁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가를 성찰해 보기로 한다.

 

 

‘전쟁불가피론’의 논변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평화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를 숨기고 있는데, 이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고 전쟁불가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무조건적인 평화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단으로써 전쟁의 불가피성을 용인했고, ‘의로운 전쟁’을 허용했다.

 

아우구스티노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전쟁들과 로마인들의 전쟁을 예로 들면서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을 제한된 의미에서 인정했다. 또 “전쟁은 그 자체로는 불행한 사태이나 자유, 복지, 평온을 유지하려는 ‘의로운 전쟁’은 허용된다.”1)고 생각했다.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는 “전쟁이란 인간 운명의 일부분”이라고 하기도 했다.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가 도태되지 않으려면,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그 시대의 현실을 그가 솔직하게 인정했다고 그를 변호하는 정치학자도 있다.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도덕 원리라고 주장하고, ‘영구 평화론’의 가능성을 역설했던 칸트도 “인류가 의지하고 사는 문화의 발전 단계에서 전쟁은 불가결한 수단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2)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헤겔도 “전쟁은 역사의 목표를 이루어 가는 접촉반응체”라고 했고, 또 “인간은 전쟁을 용납하지 않으면 정체하고 만다.”고 하면서 전쟁을 역설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와 부합되는 점이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한갓된 짐승에 불과하며, 홉스가 말하는 대로, “만인은 만인의 적”이며,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전쟁불가피론은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세기 이래로 다윈의 ‘적자생존설’은 약육강식하는 강대국의 약소국가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침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아직도 폭력을 정당화할 때 이 말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가톨릭 철학자인 셸러는 ‘정당한 전쟁’의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전쟁 중에 있는 적대세력들은 전쟁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전쟁에 대한 의지는 민족들의 ‘공동의지’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3) 그는 한 개인의 실존과 조국의 정치적 독립을 얻으려는 전쟁은 절대적으로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무역전쟁, 인종전쟁, 종교전쟁, 문화전쟁, 예방전쟁 등은 ‘부당한 전쟁’이라고 비판했다.4)

 

그러나 셸러도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체험한 뒤, 1927년 ‘평화의 이념과 평화주의’라는 강연에서 “영원한 평화는 무조건적으로 적극적 가치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이어야 한다.”든가, “전쟁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면서 전쟁불가피론을 비난하고, “영원한 평화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였다.5)

 

 

전쟁의 근본 원인

 

우리는 오늘날 획일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치이념을 포함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모든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물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또한 볼 수가 없다. 원래 인간의 삶은 풍부하고 다원적이며 다양하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거치면서 인간의 풍부한 삶은 획일화되고 만다. 어떤 이데올로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무조건가치 없는 것이 되고, 적대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비판적 정신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필연적인 결과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물질계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까지도 파괴한다.  이것이 더 무서운 영향을 끼친다. 전쟁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으며 악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며,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 가치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우파니 좌파니 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망령이 정치계뿐 아니라 교육계와 심지어 종교계에서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과 정의를 내세우면서 투쟁을 일삼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속하고 있는 집단만의 이익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파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윤리적 가치 의식을 마비시키고 갈등을 조장하고,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소외계층을 더욱 곤궁스럽게 만든다. 소외계층과 노동계층의 평등을 주장하던 공산당 간부는 물론이고, 이른바 ‘귀족노조 간부’가 그들이 미워하는 자본주의자들 못지않게 호사하며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요컨대 모든 전쟁의 근본원인은 인간의 오만과 욕심이다. 대화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 오해와 미움을 낳고 그것이 곧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왜 그 처참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일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시고, 이미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평화와 선과 구원의 법칙으로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평화를 찾도록 하신다.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의 작은 마음들이 모여 큰 힘을 이루면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로써 평화의 길을 찾으며 공존의 길을 모색하도록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한없는 군비 경쟁은 인류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키고 방지할 수 있겠는가?

 

 

전쟁 방지와 황금률 준수

 

우리가 인간의 공존과 공동선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전쟁불가피론은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태어나고, 모든 인간의 생명이 존귀한 것이라면, 전쟁불가피론은 인륜에 반하는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9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정당한 전쟁’을 옹호하여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로운 전쟁’ 또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견해는 현대의 핵전쟁과 전면전쟁과 관련시켜 볼 때, 용납될 수 없다.

 

교황 요한 23세는 “전쟁을 손상된 권리의 재건을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성적이 아니다.”라고 천명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발표한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은 전체 도시나 광범위한 지역과 주민을 전멸할 목적을 지닌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범죄로서 단연코 비난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스도교가 이웃 사랑과 생명의 존엄성을 중시한다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불교도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해 본다면 죽이거나 죽이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법구경 130-1)6)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나와 너’가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음을 가리키는 황금률의 진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중용」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생명을 극진히 발휘할 수 있는 이는 또한 남의 생명도 극진히 완수할 수 있다. 남의 생명을 극진히 완수할 수 있는 이는 더 나아가서 만물의 생명을 극진히 완수할 수 있다. 만물의 생명을 극진히 할 수 있는 이는 천지의 창조적 화육에 참여할 수 있다.”7) 유가에서도 이처럼 ‘나와 너’가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음을 가리키는 황금률을 중시한다.

 

서양에서는 근세 이래 주아론(solipsism)적인 ‘도구적 합리주의’에 매몰되어 오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상호성을 인정하는 황금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마르틴 부버, 토이니센, 레비나스, 라이너 등은 역지사지를 강조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를 일깨우고 상호성을 인정하는 황금률을 도덕의 원리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상대주의적인 법실증주의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보편타당한 법의 근본을 모색하게 되면서 페히너는 황금률을 ‘상호성의 원리’8)라고 표현했고, 마이호퍼9)는 법존재론을 펴면서 그 논거를 황금률에서 찾았으며, 슈펜델은 황금률을 “모든 개인의 행위가 따라야 할 철칙과 같은 불문의 법원칙10)이라고 규명하였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황금률을 우리 모두가 따른다면,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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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ugustinus, De Civitate Dei, ⅩⅨ,16.

2) Kant, Mutmasslicher Anfang der Menschengeschichte, Suhrkamp, Band Ⅸ, 99.

3) M. Scheler, Der Genius des Krieges und der deuttscher Krieg, 1915, 19쪽.

4) M. Scheler, 앞의 책, 155-159쪽 참조, 부당한 전쟁에 대해 상세한 논박을 한다.

5) M. Scheler, Die Idee Friedens und der Pazifismus, Bern und Muenchen, 1974, 13쪽.

6) Damien Keown, The Nature of Buddhist Ethics, Palgrave, New York, 2001(1992), 16쪽 참조 /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2000), 9-11쪽 참조.

7)「中庸」22章: 能盡其性, 別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別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別可以贊天地之化育(方東美가 性을 life로 해석한 것을 참조)

8) E. Fechner, Rechtsphilosophie, Tuebingen, 1956. S.101.

9) W. Maihofer, Vom menschlicher Ordnung, Frankfurt/M. 1956, S.86.

10) G. Spendel, Die Goldene Regel als Rechtsprinzip, Tuebingen, 1967, S.516.

 

* 진교훈 토마스 -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이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진교훈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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