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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현대의 영성: 희망의 증거자 반 투안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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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331

[현대의 영성] 희망의 증거자 반 투안 추기경 (1)


당신 손에 소중한 것을 쥐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손바닥 위의 액체 네 방울! 볼 수 없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믿음 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감옥에 갇히고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더라도 그것은 충만한 생명이요 사랑입니다. 그것은 궁극적 사랑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는 해인 2000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반 투안 추기경에게 교황청에서 사순시기 피정 강의를 해달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는 극소수에게만 허용되는 영예로운 일입니다.

교황님은 특히 추기경의 기나긴 감금생활 기간의 삶과 증거를 나누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피정은 교황청뿐 아니라 세상에도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피정이 끝난 뒤, 교황님은 추기경에게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 금을 입힌 성작을 주셨습니다. 이에 투안 추기경은 이렇게 답사를 하였습니다.

“20년 전, 저는 제 손바닥 위에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놓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오늘처럼 교황님께 금 입힌 성작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위대하시고 그분의 사랑 또한 위대합니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다

1928년 4월 17일 베트남 중부, 후에의 교외에 있는 푸 깜 본당 지역에서 태어난 반 투안은 여덟 남매(아들 셋, 딸 다섯) 가운데 맏이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응우옌 반 암, 어머니의 이름은 응오 딘 티 히엡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응우옌 왕조의 관리였던 응오 딘 카의 딸이자, 응오 딘 툭 대주교와 남베트남 전 대통령 응오 딘 디엠의 동생이었습니다. 반 투안의 양친은 베트남 전쟁 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살다가 선종하였습니다.

반 투안은 1698년 이래 순교자 선조를 둔 오랜 가톨릭 전통의 집안에서, 돈독한 믿음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특히 어머니의 깊은 믿음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성경과 베트남 순교자, 특히 자신의 조상 이야기를 통하여 그에게 사랑과 믿음 그리고 용서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1940년 그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꽝 뜨리에 있는 안 님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1947년에는 후에에 있는 푸 쑤안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953년 6월 11일에 우루티아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본당 신부, 병원과 교도소 사목 등을 거쳐, 1956년에는 로마 유학을 떠났습니다.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에서 3년 수학 후에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베트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후에의 닌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나중에 신학원장이 되었습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후에 대교구 총대리로 봉직하기도 했습니다.


주교 수품 그리고 공산 정권하의 오랜 감옥 생활

1967년 4월 13일, 반 투안은 냐 짱 교구의 첫 베트남인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기쁨과 희망의 사도가 되기를 열망하면서, 그는 주교 문장에 새기는 모토로서 「사목헌장」 제목인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을 선택하였습니다.

1975년 4월 24일,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그를 사이공 대교구의 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인 4월 30일의 사이공 함락과 더불어, 새 공산주의 정권은 그 임명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그를 체포하여 13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13년 가운데 9년은 북베트남에서 독방 감금이었습니다.

그가 「희망의 길」(The Road of Hope)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것은 감금되고 나서 첫 몇 개월 동안이었습니다. 독방 감금 기간에 몇몇 동정심 있는 간수들이 밀반입하여 준 나무토막과 철사로 십자가상을 만들어 언제나 소중히 가지고 다녔습니다.


석방과 로마 생활, 선종과 시복 청원

1988년 11월 21일, 그는 석방되었지만 사목활동을 금지당하였습니다. 1991년에 그는 로마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망명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외국생활 동안 건강상의 문제들도 있었지만 지칠 줄 모르고 모임에 참석하여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이 겪어온 삶의 증거를 나누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4년 11월 11일에 그를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부의장으로, 또 1998년 6월 24일에는 같은 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리고 2001년 2월 21일에는 추기경단에 올리셨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2002년 9월 16일,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로마에서 영원한 본향으로 불러올리셨습니다.

시복 안건의 청원서 제출이 허용되는 최단기간인 선종 5년 뒤인 2007년 9월 16일, 청원서가 제출되었고 그의 시복 안건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성과 사상

반 투안 추기경이 영원한 안식과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갔을지라도, 그가 보여준 불굴의 희망의 영성과 증거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살았던 아브라함처럼, 투안 추기경도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희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며

그의 책 「희망의 증거」(Testimony of Hope)[2000년 사순시기의 교황청 피정 강의 내용으로 우리말로는 2007년에 바오로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행 - 편집자 주]에 따르면, 그가 수용소로 끌려간 것은 1975년 8월 15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는 외로웠고 지쳤으며 스트레스가 쌓였습니다.

그는 존 왈쉬 주교가 중국에서 12년의 옥살이에서 풀려난 다음에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기다림 속에서 흘려보냈다.”고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모든 수인들은 자유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반 투안은 다르게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나는 현재의 순간을 살아갈 것이며 그 순간을 사랑으로 채울 것이다.” 이것이 그의 결심이었습니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느낌이 아니라 깊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리지 않았고,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였을까요? 그는 사목자였지만, 베트남 역사의 새로운 장에서 도전과 투쟁과 위험 한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걱정하고 또 걱정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한줄기 빛이 내려왔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가 했던 그대로 하여라. 그는 감옥에 갇혀있어서 사목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저술을 통한 희망 선포

그래서 그는 남모르게 두 달 간의 글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동네 소년이 가져다 주는 달력 종이 뒷면에 “1001개의 희망의 메시지”를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썼고 소년은 이를 전했습니다.

그는 빠르게 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때라도 다른 수용소로 이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희망의 메시지를 쓸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희망의 길」이라는 책이 나온 것입니다. 그 책은 “감옥으로부터의 복음”으로 불렸습니다. 세상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책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2-3개월 뒤에 반 투안은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80년 장 싸 수용소에서 그는 두 권의 책을 더 집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말씀의 빛 안에 있는 희망의 길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The Road of Hope in the Light of God’s Word and the Vatican Council II)와 「희망의 길 위의 순례자들」(The Pilgrims on the Road of Hope)입니다.

그는 기다리지 않기로, 그리고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Five Loaves and Two Fish)[우리말로는 2000년에 바오로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며」라는 제목으로 발행 - 편집자 주]에서, 첫 번째 빵을 “지금 이 순간을 살며”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감명을 준 것은 수용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용소 안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간수들조차도 그의 희망의 메시지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글 원고삼 · 번역 노희성 기자]


[현대의 영성] 희망의 증거자 반 투안 추기경 (2)


반 투안 추기경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Five Loaves and Two Fish)[우리말로는 2000년에 바오로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며」라는 제목으로 발행 - 편집자 주]에서, 네 번째 빵을 “자신의 힘의 유일한 원천인 성체”라고 하였습니다.


힘의 유일한 원천인 성체

투안 추기경은 수감생활 중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잊힌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참으로 절망적인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설교하시지도, 병자를 방문하거나 치료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꼼짝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분의 삶은 쓸모없는 완전한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거기에서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본보기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 13,1).

2000년 사순시기 교황청 피정 강의에서[그 내용이 「희망의 증거」(Testimony of Hope)라는 책으로 발표됨. 우리말로는 2007년에 바오로딸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라는 제목으로 발행 - 편집자 주],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체험한 무한한 기쁨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날마다 손바닥 위에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올려놓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곳은 그의 제대요 주교좌였습니다. 거룩한 성체는 그의 육신과 영혼을 위한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체는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감된 많은 가톨릭 신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능할 때마다, 그는 몇몇 가톨릭 신자들과 더불어 밤에 누워서 비밀리에, 모두 외워서 미사를 드리곤 하였고, 그 다음날 참례자들은 수용소의 다른 신자들에게 성체를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반 투안과 가톨릭 신자들,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된 비신자 수감자들도 예수님께서 언제나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체의 힘을 믿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가톨릭 신자가 아닌 수감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세례를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반 투안은 그들을 가르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을 택하라

투안 추기경은 자신의 책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서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을 택하라.”를 두 번째 빵이라고 하였습니다.

현대 세계에서는, 관계보다 행위가 더 가치 있게 여겨지고, 진리보다 말들이 더 크게 들리며, 내적 자유보다 외적 자유를 더 추구하고, 관계 맺는 속도가 바이러스보다 더 빠릅니다. 투안 추기경의 메시지는 우리의 관계를 재평가하고 다시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일들을 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단지 그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떤 것들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투안 추기경은 신부일 때에도 주교일 때에도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사목자였고, 언제나 다양한 사목활동, 특히 인재 양성에 투신하였습니다. 감옥에 끌려가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힘들고 불확실한 시기에 사목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잠을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걱정을 하느냐?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구별하여야 한다. 네가 한 모든 일은 좋은 일이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들이지만, 하느님은 아니다. … 하느님의 일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여라.”

은총의 빛과 더불어 그는 새로운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그로써 그의 사고방식은 바뀌었고 모든 불안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존재보다 행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함께 있는 것보다 서로에게 무엇을 해줄까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 열심히 일을 하다가 오히려 관계와 시간의 질을 떨어뜨리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투안 추기경은 어떤 의미인가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나라가 작고 한때 다른 나라의 식민 통치를 받았으며 내전과 이념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이제는 남과 북이 형제로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룰 때까지 사랑하는 것”은 한국과 베트남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투안 추기경은 자신의 책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서 “일치를 이룰 때까지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뜻”을 다섯 번째 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밤 독방에 감금되어 있을 때 몹시 괴로워서 지나가는 간수들에게 소리를 질러 도움과 자비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간수들은 자비는 없고 오직 의무만 있을 뿐이라고 응답하고 가버렸답니다.

독방 감금 기간에 그를 밤낮으로 감시하는 2인 1조 간수들이 있었습니다. 2주마다 새로운 팀으로 바뀌는데,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랭함과 퉁명스러움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간수들에게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을 참으로 보여주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여라!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여라!”

그 다음날부터 간수들에 대한 그의 말과 행동은 더욱 친절하고 온화하고 사랑이 가득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지라도,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열린 마음을 간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여행한 여러 장소, 자신이 만난 사람들, 자신이 배운 언어들에 관하여 말하곤 했습니다. 점차, 간수들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질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든 질문에 투안 추기경은 대답을 해주었고, 그들에게 외국어들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까지 했습니다.

간수 가운데 한 명이 라틴어를 배우고 싶어해서 그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최선의 길 가운데 하나는 그 언어로 된 노래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수는 라틴어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하였습니다. 투안 추기경은 ‘Salve Regina(하늘의 여왕)’, ‘Veni Creator(임하소서 성령이여)’, ‘Ave Maris Stella(바다의 별이신 성모)’ 세 곡을 불러주며, 가장 좋아하는 곡을 고르라고 하였습니다. 간수는 ‘Veni Creator’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그 간수는 ‘Veni Creator’를 부르며 라틴어 공부를 하였습니다. 투안 추기경은 간수가 성령을 부르는 것을 곁에서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수용소의 모습을 새롭게 하러 오셨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를 일치와 용서와 화해로 이끄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한(恨)’의 힘을 ‘분노’가 아니라 온 인류와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건설적 에너지’로 방향을 바꾸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반 투안 추기경의 시복을 위한 기도

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여, 응우옌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추기경의 영웅적 증거를 교회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겪은 고통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결합시켰고 성모 마리아의 보호에 맡겨드렸습니다. 그의 고통은 교회와 세상을 위한 일치와 용서, 정의와 평화의 빛나는 증거입니다.

사랑 가득한 그의 인격과 주교직은 믿음의 빛과 희망을 향한 열정과 사랑의 포근함을 내뿜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 간절히 청하오니, 그의 전구를 통하여 그리고 주님의 뜻에 따라, 그가 곧 영광스러운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멘.

* 원고삼(Nguyen Sam Cao) 베드로 - 말씀의선교수도회(S.V.D.) 신부. 사목신학 박사. 베트남에서 태어나 베트남 전쟁 난민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6년 사제품을 받고 파라과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93년 한국으로 왔다. 현재 서울 보문동에서 베트남 신자 공동체를 담당하고 있으며, 수원가톨릭대학교와 베트남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글 원고삼 · 번역 노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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