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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진밭들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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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7 ㅣ No.678

진밭들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님

 

 

재작년 1월에 최양업 신부님(1821-1861)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찾아가기로 하고 배론성지 배은하 신부님과 함께 일주일 여정으로 길을 떠난 적이 있다. 최양업 신부님의 주된 사목지였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어느 곳이라도 그분의 흔적이 머물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우선 다녀가셨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곳을 찾기로 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스승 신부님에게 보낸 19통의 펀지 가운데 국내에서 보낸 편지의 발신지와 거기에 나오는 교우촌이었다.

 

배론(11신 발신지)에서 출발하여 진천의 동골(10신 발신지)과 배티 교우촌, 절골(8신 발신지), 청양의 다락골(출생지), 홍산의 도앙골(7신 발신지), 금산의 진밭들(12신에 나오는 교우촌), 보은의 멍에목(8신에 나오는 교우촌), 상주의 오두재(15, 16신 발신지), 선산의 안곡(17, 18신 발신지), 그리고 문경새재를 다녀왔다.

 

여러 곳을 거쳐 진밭들로 향했다. 진밭들이란 ‘장전(長田)’ 곧 들이 좋다는 뜻이란다. 대둔산 도립공원을 지나면 길가 우측에 금산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3Km를 가다가 유정상회라는 상점을 보면서 좌회전하여 2Km를 직진하면 진밭들이란 동네가 나온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85세의 박희권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그는 열살 때 양대인(서양신부)이 말을 타고 올 때 무서워 도망갔던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곳에 일곱 가구가 살지만 신자들은 없고, 지방리에 신자들이 산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서한(1856. 9. 13)을 읽어보았다.

 

 

최양업 신부님의 진밭들 사목방문(1856년)

 

“하루는 전라도의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유아세례에 이어서 대세 받은 아기들에게 보례를 집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서,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열다섯 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1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떼 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으려고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있던 신자들이 비록 숫자는 그들보다 적었으나 그들의 침입에 완강히 대항하여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문을 빙 둘러싼 그들은 온갖 폭력을 휘둘러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고 하고 신자들은 죽을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느라고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쌍방간에 부상자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짐을 챙겨,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맸습니다.

 

서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북새통에 양편에 부상자가 많아 났고, 결국에는 외교인들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도 아무것도 강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마을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장은 그 마을의 유력한 사람 다섯 명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들이 갇힌 감옥이 어디일까? 진산감옥일 것이다. ‘진산’하면 그 유명한 ‘진산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산사건이란 1791년 신해년에 진산에 사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사건을 말한다.

 

 

진밭촌 교우들의 신앙과 최양업 신부님

 

이 감옥에 갇힌 다섯 명의 교우들은 불과 60여 년 전에 일어난 이 진산사건을 알고 있었을까? 말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윤지충이 전라감영에서 만든 공술기는 후에 신자들이 영적독서용으로 사용하였고, 1793년 말 조선교회는 신해박해의 전말과 윤지충의 순교사적과 기적이 일어난 사건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순교자의 피가 묻은 몇 장의 수건을 함께 보냈다.

 

이들의 신앙을 이어받은 교우들, 특히 감옥에 갇힌 신자들에 관하여 최양업 신부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자. “이 바오로라는 사람은 7, 8년 전에 신자가 되었는데 다른 신자들보다 더 열심하고 덕망이 높아서 그 마을의 회장으로 선임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고을 원님 다음으로 제일 높은 관리였습니다. 3년 전에 영세했는데 벌써 많은 외교인들을 천주교로 이끌어들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주동자이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자라 하여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외교인들이 우리를 습격하러 왔을 때 저한테서 세례를 받으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양반 가문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은 뒤 자기 집안에서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장애가 너무 많아 고향을 떠나 이곳 산 속의 교우들한테 이사와서 살고 있습니다. … 

 

나머지 두 사람은 공소에 포졸들을 데리고 왔던 배교자의 친척들이었습니다. 그 배교자는 첫 배반자인 유다를 본받아 저를 체포하려고 공소를 습격했습니다. 그 자는 배교한 후 내통자와 박해자로 변신하였습니다. 그 배교자는 이번 습격을 하기 전에도 자기 친척들인 두 사람의 예비신자에게 온갖 방법으로 모욕과 핍박을 가하면서 자기를 본받아 배교자가 되라고 강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강한 두 예비신자들은 끝끝내 요지부동으로 항구하였습니다.

 

관가에 잡혀간 신자들은 용감하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관원으로부터 하느님을 저주하라고 재촉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 세상의 임금님을 비방하여도 죄악이 되거늘 하물며 우주 만물을 영원히 지배하시는 하늘의 임금님이신 창조주께 욕을 하는 것은 천상천하에 용납받지 못할 극악 대죄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이런 큰 죄악을 범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차례 문초를 받은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각자가 자기 부담으로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집안이 몹시 가난해서 그들에게 옥바라지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여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저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하니 한숨밖에 보낼 것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눈을 감으니 교우들의 열렬한 신앙과 이들을 인도하는 착한 목자이신 최 신부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나도 ‘이땅의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불같은 열심을 저에게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서 진밭들을 떠나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최양업 신부님을 본받아야 할 우리들

 

최양업 신부님은 1849년 4월 15일 사제서품을 받고 우리 나라에 들어온 뒤 신자들을 찾아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5개 도에 흩어져있던 교우촌을 방문하였는데, 공소만 해도 127개나 되었으며, 1년 동안 무려 7천리나 걸어다녀야 했다. 이렇게 사목활동을 한 12년 동안의 삶은 참다운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 신부님이 선종했을 때 당시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우리 신자의 수효가 해마다 증가하고 이전 일꾼들의 기운이 다해가는 외에 최 신부님의 죽음이 또 한번 우리 전열과 우리 애정에 빈자리를 만들어놓아 그것이 쉽게 데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도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1861. 9. 4).”라면서 그분의 죽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어느 잡지에서 “고적을 즐겨 찾는 이유는 옛 사람과의 교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의 흔적 하나하나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부님의 흔적과 숨결이 남아있는 곳들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신부님의 펀지를 읽는다면 신자들과 하나 되어 사신 최양업 신부님을 훨씬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분의 살아있는 음성이 들려올 것이다.

 

* 여진천 폰시아노 - 원주교구 사제로 인천 성 바오로 피정의 집에 머물며 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7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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