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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사제는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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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3 ㅣ No.324

[레지오 영성]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사제는 어떤 의미인가? (1)



들어가는 글

지휘관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병사들을 이끌고 있지 않는 한, 병사들에게 싸우라고 독려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제들에게 있어 주교님은 필수적인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평신도들에게 있어 사제는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평신도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게 하려면, 반드시 사제가 있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활동할 때만 교회가 완전히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평신도들에게 있어 사제의 의미는 자신들을 격려해주고, 종교적인 지식을 습득하도록 도와주며, 교회에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데 있어 자신들을 모으고, 이끌어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제들과 사람들

먼저 평신도 사도직의 근본에 관하여,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교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자신의 결합에서 사도직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받는다.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결합되고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튼튼해진 평신도들은 바로 주님께 사도직을 받았다…”

“이 같은 사도적 영성 생활의 완전한 모범은 사도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이시다… 구세주의 활동을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도와주셨다.”

그리고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은 사제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과 협력하고 그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스승의 모범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바오로 성인의 인체에 대한 추론(Pauline Analogy)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에 대한 묘사를 하는데 유용한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인체의 각 지체의 역할과 비교할 때 사제의 역할은 사람의 머리에 해당되며, 나아가 신비체의 머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제는 그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프랭크 더프는 사제들을, 우리들에게 “장엄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공의회는 사도직 활동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사제와 평신도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2년 10월30일 이탈리아 레지오 단원들에 대한 연설에서 레지오의 사명 중 두 분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첫 번째는 ‘누룩이 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성모님의 정신과 염원과 함께’였습니다. 교황께서는 “평신도로서 여러분에게 적합한 소명은 하느님의 백성들 안에서 누룩이 되고, 현대 세계에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부어 넣으며, 사제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모셔가는 일이며, 이것들은 분명히 교역자적인 임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또한, “사도직 활동의 탄생과 성장은 성령의 그느르심으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신 마리아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계시는 곳에는 또한 성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성모님으로 떠날 때는 조만간 성자로부터도 멀어지고 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지오 교본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지오 사도직은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성사를 가장 중요한 은총의 수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레지오 활동의 첫 번째 원칙은 사람들에게 사제들을 모셔다 드리는 일.. 항상 사제를 직접 모셔가기는 사실상 힘들고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사제의 영향력이 어느 곳에나 미치도록 하고, 사제가 하는 일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을 보면, 그 내용이 ‘하느님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의회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을 사제들의 사도직과는 별개로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두 개의 독자적인 조직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장교들의 조직과 장교 외의 계층과 집단의 조직을 별도로 구성하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장교와 다른 계층과 집단은 서로 기능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두 조직은 자신들의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공의회 내용을 요약하면, 사제와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서로 함께 활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없다면 평신도 사도직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평신도가 없다면 사제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과 똑같이 평신도와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 두 제자가 없었더라면, 일흔두 제자들이 없었다면, 무엇보다도 성모님이 없었다면 지금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없다면, 평신도들의 거대한 잠재력은 밀봉된 채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저수조라고 하더라도 삶에 스며들어 순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문다면 결국 썩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도직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에 있어서 사도직은 동일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 오직 한 가지만 있습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당신의 마지막 유지이자 유언으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개인성화로의 초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두라고 지칭을 하실 때 그것은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열매가 낭비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레지오 마리애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명을 잘 수행하는 아주 좋은 예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순방(Peregrinatio Pro Christo-PPC)입니다. 첫 번째 ‘외지순방’은 1958년에 건축학도 이었던 휴 브레디가 일단의 작은 규모의 동료 학생들로 구성된 단체와 함께 영국에서 하계 아르바이트와 함께 실시하였습니다. 9주간 활동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은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립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외지순방이 정규적인 레지오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아주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거두었는데, 구소련에서 그 성과에 대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매년 외지순방 팀들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지난 2007년 5월 22일부터 24일까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꼰칠리움 레지오 마리애가 ‘새로운 복음화 : 사제와 평신도 - 새로운 천년기의 거대한 도전’을 주제로 개최한 대회에서 피노라 케네디(경제학 박사) 씨가 연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9월호, 글 피노라 케네디(경제학 박사),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사제는 어떤 의미인가? (2)



사제들의 표본

평신도들이 사도직에 참여하여 일정부분을 담당할 수 있도록 평신도들 사이에 구심점을 만들어준 사제들의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자라날 수 있도록 해준 토대는 영국인 사제였던 요한 헨리 뉴먼*이라는 신부가 약 150여 년 전에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뉴먼 신부는 가톨릭 신자가 되고, 사제로 서품된 뒤 어떻게 사는 삶이 자신과 자신의 친한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적합한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하였습니다. 그는 16세기에 설립된 성 필립 네리 수도원을 선택하였습니다. 뉴먼의 동료 사제들 중 한 명이었던 스티븐 데사인 신부는 “뉴먼 신부는 홀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여 수도자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으며, 그것을 독실한 평신도의 양성과 효과적인 평신도 사도를 육성하는데 활용하였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수도원은 평신도들을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필립 성인은 36세 때까지 한 명의 평신도였습니다. 서품 후 그는 영국인과 웨일즈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해 로마에 설립되어있던 로마 가톨릭 신학교인 English College에 반대하는 성 제롬교회의 사제들로 구성된 재속사제회에 합류하였습니다. 필립 성인은 매일 저녁마다 자신의 방에서 7~8명의 평신도들과 함께 신약성경이나 다른 영적 서적들을 읽고 대화를 나눈 다음 약 30분정도 침묵 속에서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단체는 점점 숫자가 늘어나 성 제롬 성당의 중간 통로 윗부분에 위치한 커다란 방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그것이 첫 번째 재속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회합들도 실시되었는데, 그 회합은 필립 성인이나 성인의 평신도 제자 중 한 명이 주도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평신도 주도의 활동과 기도를 통해 얻은 결실 중 하나는 소외된 병원들과 다른 곳에서의 역동적인 구호활동이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결실은 ‘사람들을 자신의 가정에서 성인으로 만들기’라는 필립 성인의 목표가 충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개인의 성화를 이룩한다는 레지오의 목표와 매우 유사한 것 입니다. 필립 성인은 자신의 평신도 단체를 활성화 시켜갔으며, 16세기의 로마 교회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갔습니다. 뉴먼 신부는 필립 성인을 가리켜, 바오로 사도와 마찬가지로, ‘지식체계나 체제를 고집하기 보다는, 우선 자기 스스로 제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이론 그 자체가 아닌 실질적인 목적의 달성을 위한 교리들을 전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재속회원들은 버밍햄의 구호소와 교도소를 돌보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뉴먼 신부는 평신도 사도직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영향력이 복음화와 종교적인 진리를 전파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수단이라고 믿었습니다. 뉴먼 신부는, ‘자기 자신이 확실한 자리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곳에서 성장을 하고, 또한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은 서로를 알게 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아이디어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아이디어들이 활용되면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함께 한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뉴먼 신부는 자주 인용이 되고 있는 자신의 문장들 중 한 곳에서, ‘나는 지식적인 면에서 잘 교육된 평신도를 원한다. … 나는 여러분이 지식을 키워나가고, 이성을 성장시켜 나가고… 어떻게 신앙과 이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가톨릭 사상의 기본과 원칙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기를 원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그 것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최근의 설문조사결과에 의하면, 가톨릭 영향 하에 있는 학교에서의 수년간에 걸친 교육에도 불구하고, 설문에 응했던 사람들의 종교적인 지식은 참담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본당에 본당 성직자들이 지원 하는 빠트리치안 단체가 설립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어른들에 대한 종교 교육은 획기적으로 개선이 될 것입니다.

뉴먼 신부는 초기 교회를 살펴보면서 평신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초창기 교회는 명성을 따라온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하게 모인 수많은 신자들의 영신적 삶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도들로부터 신앙을 받고, 그 신앙을 아주 잘 간직하고, 널리 퍼트렸으며,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면서 아주 충실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직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 내에서의 가톨릭의 현 위치에 대한 자신의 강의록에서 뉴먼 신부는 “언제나 변함없이 평신도들이 바로 가톨릭 영성의 척도였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이 문구를 포함하여 뉴먼 신부님의 많은 글들을 레지오 교본에 인용하였습니다. 뉴먼 신부님은 프랭크 더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프랭크 더프는 뉴먼 신부님의 저서들을 아주 많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애의 말년에 접어들 무렵 프랭크 더프는 플루드 신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제 인생 전반에 걸쳐 언제나 뉴먼 추기경님의 저서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아왔습니다. 그분의 저서를 광범위하게 읽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

그러면 사제들이 평신도들을 동원하고, 격려한다는 것이 평신도 사도직과 교회에서 어떤 의미가 되는지에 대해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를 보면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페인 빈센치오 회원이었던 마누엘 그라시아 신부가 1936년에 12명의 단원으로 마닐라에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습니다. 1941년 태평양에서 전쟁이 발발했던 당시 마닐라에는 12개의 쁘레시디움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5년 뒤에 필리핀에는 6,000개의 쁘레시디움이 있었고, 필리핀의 교회는 다시 활성화 되었습니다.

리베리 대주교님(후일 추기경 서임)께서 1946년에 중국 교황사절에 임명되었을 때, 그분의  첫 번째 야심찬 계획 중의 한 가지는 그 곳에서 레지오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베리 대주교님은 1930년대에 더블린에서 교황사절로 있는 동안 프랭크 더프와 레지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동부와 서부 아프리카에 대한 사목을 위임받게 된 대주교님은 그 곳의 레지오를 지원하였는데, 특히 그 곳에서 7년 7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동부 아프리카와 모리셔스 지역의 광범위한 교구에서 레지오를 전파하는 활동을 하고 있던 에델 퀸의 활동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모리셔스에서는 후일 추기경에 서임된 젊은 사제인 주안 마르기트 신부가 열렬한 레지오 마리애의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에이든 멕그레스  신부입니다. 신부님의 3형제가 모두 사제가 되었습니다. 1924년에 에이든 멕그레스는 특별히 중국에 대한 선교를 염두에 두고 1918년에 설립된 콜롬반 사제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멕그레스는 1929년 12월21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6개월 뒤에 중국으로 길을 떠나 그 곳에서 16년을 보내게 됩니다. 한양에서 몇 년을 지내고 갤빈 주교님이 멕그레스 신부를 티시엔 키앙이라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멕그레스 신부는 그 곳에서 한 중국인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24회의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걸어서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 한 명뿐인 신부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에게 신부를 한 명을 더 보내달라고 했는데, 갤빈 주교님은 그 답변으로 레지오 마리애 교본을 한 권 보내왔습니다.

* 역자 주 : 요한 헨리 뉴먼(1801년 2월21일 - 1890년 8월11일) 추기경은 19세기 영국의 종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1830년대 중반부터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최초에는 영국 국교(Church of England)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나, 1845년에 영국 국교를 떠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가톨릭대학교(현 더블린대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2010년 9월19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시복을 선포하여 현재 복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0월호, 글 피노라 케네디(경제학 박사),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사제는 어떤 의미인가? (3)



멕그레스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시대에 우리는 주교님들에게 절대 복종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특별한 자격을 가진 것도 없는 보통 사람 6명을 모았습니다. 나는 이 의도가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만일 실패하면 그 교본을 주교님께 돌려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정말 놀라게 했는데, 그들은 내가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해 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고 싶다면 그 곳의 평신도들을 이용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멕그레스 신부는 레지오 교본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 내용을 모두 알고 싶어 했습니다. 멕그레스 신부님을 포함하여 레지오를 활용한 모든 훌륭한 사제들의 명백한 공통점은 레지오를 교본에 규정된 대로 운영하였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입니다. 교본에 기술되어 있는 체제가 바로 레지오의 체제인 것 입니다. 멕그레스 신부는 레지오는 바로 사제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조직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 입니다. 이 시기에 프랭크 더프는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클리어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레지오의 또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레지오는 스스로를 평신도라는 의미만을 고집하는 평신도들만의 조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평신도만을 고집한다면 그런 종류의 가톨릭 활동은 결국 사제들로부터는 독립된 별개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레지오에서 사제는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단순한 사목자가 아닙니다. 사제는 자신을 레지오 단원으로 여기며, 레지오 안에서는 성직자라는 생각, 평신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군대의 구성원입니다. 사제들은 장교들이며, 평신도들은 부사관이거나, 일반사병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939년에 있었던 ‘난징(남경) 약탈사건’ 동안에 4000명의 일본군들이 멕그레스 신부가 있던 도시에 난입하였습니다. 멕그레스 신부와 동료들은 그들의 본당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그 곳을 떠나 2년 반 동안 한양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내 본당에는 사제도 없었고, 미사도 봉헌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없어진 본당은 사라지고, 레지오 마리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1944년 내가 본당에 돌아왔을 때, 나는 내 본당이 나 없이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아세례가 이루어지고 있고, 혼배 증인을 세우는 등, 가톨릭에서 요구되는 필요한 의식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바로 내가 설립한 5개의 쁘레시디움에 의해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1946년 12월에 더블린으로 돌아온 멕그레그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 문고에서 몽포르의 참된 신심책자를 한 권 얻었으며,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곧 중국으로 돌아가서, 그 곳에서 리베리 대주교님을 만났습니다. 리베리 대주교님은 공산당이 곧 중국을 장악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에 아프리카에서 에델 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레지오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리베리 대주교님은 멕그레스 신부에게 중국의 모든 곳에서 레지오를 시작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30분도 안 되어서 아마도 당시 중국에서 가장 수준이 높았던 상하이 소재 한 대학교에 쁘레시디움이 한 개 설립되었습니다. 상하이에서 시작하여, 나는 중국의 중심부인 한노우로 들어가 똑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베이징으로. 2년 안에 우리는 2,000개의 경이적인 단체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모택동 시대에도 그러한 활동은 지속되었습니다. 모택동은 교회가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 교회를 찾아 나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레지오를 ‘공공의 적 1호’라고 불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멕그레스 신부를 비롯한 레지오와 관계된 사제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상하이 교구장이신 쿵 이냐시오 주교님은 자신의 인생의 1/3 인 27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 가톨릭 애국회에 저항하는데 있어, 쿵 추기경은 레지오 마리애를 통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중국정부는 레지오를 불법 단체로서 스파이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고 선포하면서, 모든 단원들에게 공안본부에 등록을 하고 레지오는 반혁명적인 단체라는 것을 인지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투옥 당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쿵 추기경은 추종자들에게 이러한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단원들은 등록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그들의 주교, 하느님,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구속의 위험을 선택하였습니다. 학생들을 포함하여 수백 명이 구금되어 중노동에 처해졌습니다.

1948년 3월 13일 멕그레스 신부가 중국에서의 레지오 마리애 설립에 착수하자, 프랭크 더프는 아주 긴 서한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아래 내용은 그 서한 중에서 사제가 레지오에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내용 중에 핵심적인 사항을 추려놓은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부님의 선교의 결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도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광대한 나라에서 복음화를 하기 위해 그 나라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 더군다나 좋은 결과들이 만들어지게 하려면, 그들에게 진실된 그리스도 교리를 먼저 전해주는 것과 같은 시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도직 활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프는 사제가 사람들을 복음화 활동으로 이끌어 들이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20년 전에 있었던 공의회의 공식문건들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더프 형제도 자신의 서한에서, ‘신앙심이 없이 2세대만 지나면 냉담교우가 되고, 냉담교우로 2세대만 지나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갑니다’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후일 추기경이 되신 스웬스 주교님도 그 내용의 일부분이 교본에 있는 성령께 바치는 레지오 선서의 주석으로도 삽입되어있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이론(1952년)’이라는 저서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해야 할 최소한도의 필수적인 사도직 활동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1월호, 글 피노라 케네디(경제학 박사),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레지오 영성]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사제는 어떤 의미인가? (4)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불러들이신 이후, 사제는 사도직의 중심축이 되어왔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이것을 아주 초창기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예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레지오가 설립되기 이전에 이러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더프형제는 군화 제작업자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죠 가베트와 함께 포토벨로 막사(현재 더블린에 있는 카헐 부루 기지)에 왕립 랭커셔 연대 소속의 많은 현역 군인들과 전직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으며, 그들이 매독 및 그와 유사한 질병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그들이 사람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게 해주고, 또 그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어떤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즉시 사제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활동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인근에 있는 라스만 사제관을 찾아가 그 곳에서 프랭크 오’라프라인 신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조악한 의료 처치를 받으면서 쓸쓸함 속에서 아마도 얼마 남지 않았을 생을 지탱해가고 있던 군인들에 대한 정기적인 방문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오’라프라인 신부의 누이였던 엘리자베스 커왜인 부인이 레지오 마리애의 첫 번째 쁘레시디움의 첫 번째 단장이 되었습니다.           

레지오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들인 모닝스타 남성 요양소와 레지나 콜리 여성 요양소는 1927년과 1930년에 각각 문을 열었으며, 그 이후로 매일 밤낮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요양소들은 파드레이 오’코크레인 신부, 애몬 메카시 신부, 마이클 로스 신부, 리틀 신부, 맥허 신부와 죤 에헌 신부를 비롯한 많은 사제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 또 다른 신부님들로 에델 퀸의 시복위원 추진위원인 안셈 모이니한 신부, 예수 그리스도 고난 수도회 사제인 허만 놀란 신부, 러시아에 대한 사도직 활동의 개척자였던 모라이아티 신부, 그리고 한 순간에 스칼리프 마을에 8개의 쁘레시디움을 설립했던 게리 리안 신부 등이 있습니다.평신도 사도직에 있어 사제는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가장 잘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은 1950년에 프랭크 더프가 예수회 반 히 대주교님께 보낸 서한입니다.  

“사람들이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허락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레지오가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당국자가 자신을 던져 그 사도직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당국자들은 레지오가 운영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은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고백해야겠습니다. 대부분 두 가지 경우로 요약이 되는데, 한 경우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경우이고, 또 다른 경우는 약간의 도움을 주긴 하지만 레지오가 제대로 작동되는데 필수적인 정도의 결정적인 것은 못 되는 경우입니다. 만일 전장에서 군대가 현재 레지오가 통상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이 취급당한다면, 그 군대는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기지 못할 것 입니다. 아마도 전장에 투입조차도 되지 못할 것 입니다.”


결론


저는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제 말을 끝맺고자 합니다. 저는 스위스의 프리부르 대학교의 학생이던 때에 처음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했습니다. 그 쁘레시디움은 학생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는 배경이 다른 베트남 사람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로 했던 레지오 활동은 맹아들이 걷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었는데, 자신들이 불구라는 고통을 경험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아주 적합한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쁘레시디움의 영적지도자는 도미니코 수도회 신부님이었는데, 아주 경이로운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도보 성지순례를 했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더블린으로 돌아온 뒤 저는 한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있었는데, 그 쁘레시디움은 제게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는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한 진로에 대한 정보 상담 활동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쁘레시디움 역시 아주 활동적인 담당사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저는 빠트리치안 회합에는 참석하였지만, 레지오 행동단원은 아닌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년전에 저는 메리언 본당의 레지오에 입단하여 현재 본당의 문고관리, 빠트리치안 회합 주관, 돌봄 단체 주관, 그리고 가정 방문들과 같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레지오 경험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경험은 블랙락 대학의 소년 쁘레시디움에서 4년 동안 단장으로 활동하였던 때 입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행사의 하나는 프랭크 더프가 대학생이던 시절에 행했던 그의 첫영성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 5월24일에 씨안 파래거 신부님이 봉헌하였던 특별 기념 미사였습니다.

만일 누군가 제게 우리 단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점은 무엇이며, 레지오 마리애와 그 단원이라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냐고 질문한다면, 저는 레지오는 제게 교회의 임무수행에 참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일깨워주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교본에 대한 공부와 빠트리치안 회합에 정기적인 참석을 통해 저는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2월호, 글 피노라 케네디(경제학 박사), 역 이재호 스테파노(대구 Se. 국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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