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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신수련의 선택과정: 1599년 공식 지침서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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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0

영신수련의 선택과정


- 1599년 공식 [지침서]의 관점에서 -

 

 

I. 들어가는 말

 

1599년 예수회에서 총장 명의로 공식적으로 발간한 [사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지침서]는 도덕적 개혁을 위한 한 도구로서 <영신수련>을 소개한다. [지침서]의 서문에서 인용한 다음의 내용은 이를 뒷받침한다. 

 

게다가, 앞서 말한 그 방법 덕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 떠나 수도생활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미 수도생활을 해오던 많은 사람들 사이에도 - 개개인 뿐만 아니라, 수도원 전체로도 - 현저하게 개혁이 일어났다. 더욱이 세속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 너무나 악에 물들어서 어떠한 애원이나 설교로도 개심시킬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도 회심해서 더 나은 삶을 영구히 되찾게 되었다. 결국 이 <영신수련>을 사용함으로써 각계각층, 모든 조건의 사람들에게 최상의 결과가 보장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사용되는 곳에서 훨씬 더 놀라운 도덕적 개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개혁’의 개념은 이것이 사용되던 그 당시의 종교?문화?사회적 배경을 반영한다. 대체로 <영신수련>은 단지 어떤 종교적 체험을 유발시키는데 그 촛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고, 오히려 그러한 종교적 체험으로부터 어떻게 실속있는 결실을 이끌어 내느냐를 가르친다. <영신수련>의 정신과 독창성은 다양한 영적 움직임들과 선택방법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연관성을 맺어주고 있는 점에 있으며,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영들의 식별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하나의 체계적인 안내와 방법을 제공한 최초의 인물은 바로 이냐시오였다. 그는 <영신수련>에서 두 묶음의 ‘선신과 악신을 구별하는 규범들’[313-336]을 체계화시켰고, 올바른 생활신분의 선택을 위한 길잡이들과 구체적인 방법들[169-189]을 제시했다. 예수회원들은 그들의 사목활동의 여러 분야, 특히 피정지도와 영적지도에서 회심을 위하여 이러한 체계적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었다. <영신수련>에 기반을 둔 예수회의 사목활동의 독창성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영신수련>의 영성이 발전해 간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 1599년의 [지침서]는 이러한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침서]가 그 분량의 거의 1/3(전체 40章 가운데 13章)을 ‘선택과정’에 할애한 것에 주목할 만하다. 사실, <영신수련>의 중심부는 ‘선택’이라는 명백한 주제로 점유되어 있다. 이 선택과정이 <영신수련>의 심장이고 뛰어난 걸작이라면 선택의 영성을 [지침서]의 관점에 따라 밝혀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점을 배경으로 본인은 이 글에서 [지침서]에 제시된 <영신수련>의 선택과정의 구조를 검토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선택이 지니는 위치를 고찰해 보고, 또한 <영신수련>과 [지침서]의 관점의 차이를 비교해 보겠다.

 

 

II. [지침서]의 발전사

 

<영신수련>이 1548년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출판되어, 피정지도자들에게 널리 보급이 되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신수련>을 지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실천적인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예수회원들의 사목활동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만나게 되는 문제들이었다. <영신수련>자체가 교본의 성격을 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세부적인 지침들이 필요 했다. 예수회가 공적으로 인정하는 <영신수련>에 관한 [지침서]의 형성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은 물론 뽈랑코(Juan de Polanco)신부였다. 그는 이냐시오의 비서로서 예수회 [회헌]의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교부학자였다. 뽈랑코신부는 이냐시오를 졸라서 이러한 지침서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이냐시오 자신이 직접 조금씩 적어 놓은 지침들이 전해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냐시오가 1555년 경 빅토리아(Juan de Victoria)신부에게 구술한 지침서가 전해온다. 이냐시오가 죽은 후에는, 1588년에 열린 제1차 총회에서 총장으로 선임된 라이네즈(Diego Laynez)신부에게 예수회의 주된 사목활동이 <영신수련>에 근거한 사도직인 만큼, 이에 관한 지침서가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지침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연구하도록 위임했다. 하지만 1565년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제2차 총회에서 새로운 총장 볼지아(St. Francis Borgia)신부에게 다시 이 일을 추진토록 위임했다. 그래서 1566년과 1567년 사이에 이 문제를 추진해 갈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조금의 진전은 있었으나, 이렇다 할 결과는 나오지 못했다. 제3차 총회에서 총장으로 선임된 메르쿠리안(Evarard Mercurian)신부의 재임시기에 이 작업은 뽈랑코신부에 의해 조금씩 진전되었다. 뽈랑코신부는 이미 1573-1575년 사이에 <영신수련>에 관한 두 종류의 단편적 지침서를 작성했다. 1574년에 작성한 지침서는 주로 고백의 성사에 관한 내용이었고, 1575년에 출판된 것은 주로 임종자에게 줄 수 있는 도움에 관해서였다. 또 다른 단편들은 위원회의 위원이었던 미로(Diego MirO)신부가 작성한 지침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4차 총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된 아쿠아비바(Aquaviva)신부는 1585년 질 곤잘레스 다빌라(Gil Gonzalez Davila)신부에게 기존의 지침서들을 검토해서 종합하도록 명했다. 이 문헌에 근거해서 새롭게 작성된 문헌이 <다양한 지침들>(Directorium Variorum)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온다. 이 지침서는 곤잘레스신부의 지침서에 근거하면서, 나름대로의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1588년과 1591년에는 또 다른 지침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편집에 이용된 자료들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이 문헌은 아쿠아비바총장의 명령에 의해 감독관들의 인준을 거쳐 1591년 로마에서 출판되었고, 여러 관구에 보내져서 이 지침서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수집되었으며, 1593년 제5차 총회에서 곤잘레스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 위원회에서 검토되었다. 그 후에 여러 수정, 보완을 거쳐서 총장의 명의로 1599년 피렌제에서 공식적으로 이 [지침서]가 출판되었다. 이 문헌에서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에 특별히 관련된 질문들 외에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면서 어떻게 이 도구를 실제적인 사목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에 이 [지침서]는 <영신수련>에 관한 예수회의 공식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며, 더욱이 이냐시오 자신이 어떻게 이 <영신수련>을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초기 예수회 회원들이 <영신수련>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도하였는가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문헌인 것이다.

 

 

III. [지침서]가 파악하는 <영신수련>의 본질

 

초기 예수회의 역사는 반종교개혁의 역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이냐시오라는 한 인물 속에서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의 접합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냐시오의 회심은 중세기의 낭만적 종교 풍토에 뿌리박고 있는 반면, 그의 영성적 체험의 체계화는 가톨릭 종교개혁 시대의 합리적 종교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에 체계화된 방법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냐시오의 회심의 체험 자체를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고, 이냐시오 자신의 회심의 체험에 관한 이해없이 <영신수련>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냐시오의 원천적인 체험들과 그 체험들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발전해 간 모습이 바로 <영신수련>에 축약되어 있으며, 특히 선택 과정에서 그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냐시오의 생애와 예수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회원들의 영성적 양성과 다른 이들에게 끼친 예수회원들의 영향에서 <영신수련>이 얼마나 중추적 역할을 해왔는가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단적으로 [지침서]는 예수회의 목표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영신수련>을 체험하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생활양식의 개선 후 이 세상 도처에서 계속 살아갈 사람들에게 <영신수련> 체험의 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 <영신수련>은 올바른 생활 양식의 선택을 통해서 삶과 신분을 개선하고 개혁토록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지도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예수회원들은 이들의 영신적 생활 개혁을 위해 애쓴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영신수련>을 체험함으로써 얻게되는 영적 이익들에 대해 성 이냐시오가 얼마나 강하고 자신있게 확신하고 있었는가는 이 [지침서]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영신수련>은 회심의 체계적인 과정으로서 한 인격 전체가 이 과정에 개입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피정자가 자신이 놓여 있는 생활 신분에서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회심의 과정은 어떤 구체적인 선택을 향해 계속 진전되어 간다. 피정자가 하느님을 향해 진정으로 회개하고, 이에 따르는 새롭고 올바른 생활 양식을 선택한다면 그가 영적 진보의 어느 선상에 처해 있던지 간에 훌륭한 영신적 효과를 거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영신수련>을 회심의 과정, 특히 선택을 위한 설계도라고도 한다. 따라서 <영신수련>은 설교, 선교, 피정, 영적지도 등의 예수회 사목활동의 기초가 되는 책이며, 동시에 회심을 위한 전문적인 방법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신수련>은 지도자의 도움 아래 체험하게 될 특별한 영적 과정이며,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수행되는 한 ‘충격-전술적인 영적훈련’이기도 하다. <영신수련>은 모든 영역의 영적 요구에서 거의 폭발적인 효과로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고성능의 영적 신무기인 것이다.

 


IV. 선택을 위한 준비 묵상들

 

[지침서]는 축약하여 <영신수련>의 일반적인 방법과 목표를 알려준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의 마음 앞에 제시된다. 이전의 모든 죄악들이 폭로되며, 죄에 대한 애통함과 혐오가 마음에 싹트게 된다. 그러면서 덕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하여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이 고양된다. 마침내 하느님의 계명과 뜻에 일치하도록 삶을 전폭적으로 개혁시키는 한 방식이 제시되면서, 자신의 삶의 신분이 바뀌어야 할지, 아니면 바뀌지는 않고 단지 개선되어야 할지에 대한 숙고가 뒤 따른다.’ 이 관점에 의하면 생활양식과 삶의 신분의 개혁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신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에 따라 이루어 진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 본받고자 하는 열망은 죄의 가증스러움과 그 무서운 힘에 대한 깊은 내적 인식이 없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과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피정자에게 제시되면서 죄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목적과 계획이 미리 제시되지 않거나, 혹은 아무런 효과가 예상되지 못하면서 <영신수련>을 진행해서는 안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침서]는 <영신수련>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져서는 안되고, 오히려 더 큰 열매가 기대되는 선발된 정예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함을 주장하면서 몇가지 특별한 자격을 제시한다. 첫째, 하느님의 봉사 직무에 부르심을 받을 경우 효과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만일 아직 문학이나 과학분야의 공부를 하지 못해서 기본적인 소양이 습득되지 못했다면, 적어도 앞으로 그러한 학식을 취득할 수 있는 나이와 그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만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라면 수도성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네째, 영적인 것에 대한 현저한 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더불어 점잖고 품위있는 용모를 겸비해야 한다. 다섯째, 쉽게 떼어낼 수 없는 모든 애착들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로와야 하고, 자신의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본분을 정립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마음의 평형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는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교회를 돕기에 더 능력이 많은 사람 -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영신수련>에 들어가기에 더욱 합당한 사람들이다.

 

[지침서]는 <영신수련>의 각 주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다: ‘첫째 주간은 죄의 묵상으로 이루어지며, 자신이 지은 죄의 추악함에 대한 인식과 진정으로 죄를 지겨워함을 얻도록 하고, 그에 상응하는 통회의 정신과 속죄의 열망을 갖도록 한다. 둘째 주간은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앞에 제시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열망과 열심을 분발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본받음을 더 잘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가장 합당한 삶의 신분을 선택하기 위한 선택 방법이 우리 앞에 제시된다. 혹은 그러한 선택이 더이상 불가능한 경우에는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삶의 개혁을 위한 권고가 주어지게 된다. 세째 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 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연민과 슬픔, 곤혹스러움이 영혼 안에서 일으켜지고, 앞서 말한 본받음에의 열망이 더욱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된다. 네째 주간은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영광스러운 발현, 승천 등의 주제로 바뀌며,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한 기도는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북돋워준다.’

 

[지침서]는 각 묵상들 - 원리와 기초, 그리스도 왕국, 두개의 깃발, 겸손의 세 단계, 선택 등등의 묵상들 - 의 상세한 분석과 함께 그 묵상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아주 잘 설명한다. 둘째 주간의 첫 묵상이 ‘그리스도 왕국’묵상[91-99]이다. [지침서]는 이 ‘왕국’묵상을 전체 <영신수련> 과정의 일종의 기초, 준비이며, 성부에 의해 맡겨진 사명을 수행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삶과 업적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요약표라고 설명한다. ‘왕국’묵상은 피정자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면서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사물들로부터 구세주를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향해 마음을 들어 높인다. 그러므로 ‘왕국’묵상은 <영신수련>의 가장 기본적인 묵상들 중의 하나로서 피정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완전하게 본받고, 따르며, 그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영혼 안에 불러 일으켜서, 삶의 신분 선택이라는 매우 중요한 과제를 위해 피정자를 준비시키고 훈련시킨다.

 

'두개의 깃발'묵상[136-148]은 피정자에게 선택과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어진다. 하지만 선택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묵상이 주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이 묵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영적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침서]의 제안에 따르면, 선택과정은 둘째 주간의 네째, 혹은 다섯째 날, 즉 성전에 머물러 계시는 어린 예수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이 묵상 이후에 선택과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피정자의 영혼을 준비시키기 위해 ‘두개의 깃발’묵상과 ‘세종류의 사람들’묵상[149-157]이 주어진다. 이 두 묵상들은 같은 날, 순서대로 하도록 되어있다. ‘두개의 깃발’묵상은 ‘그리스도 왕국’묵상과 내적 통일성을 형성하면서 이 묵상을 더 넓은 안목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 ‘두개의 깃발’묵상은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성찰케 해서 세속적인 사물들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 것인가를 깨닫도록 돕는다. 즉 그리스도의 왕국에 보다 더 합당한 것,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방식, 그분이 지니신 삶에 대한 참다운 지혜 등을 더욱 상세하게 묵상을 통해 파악하도록 이끈다. 더불어 피정자는 인간본성의 원수가 사용하는 방책과 속임수들에 대해서도 묵상중에 살피기도 한다. ‘두개의 깃발’묵상은 <영신수련>에서 가장 풍부하게 상징적 요소들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 목적, 인류 원수의 왕국과 그 목적 사이의 차이점을 대조시킨다. 또한 이 ‘두개의 깃발’묵상은 피정자로 하여금 영들에 대한 식별의 기본적 체험들을 지니도록 이끌어준다.

 

‘그리스도 왕국’묵상과 ‘두개의 깃발’묵상은 피정자로 하여금 선택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마음을 지니도록 준비시키며, 영적인 가난, 혹은 실제적인 가난, 모욕, 겸손을 통한 구원사업에 봉사하도록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다. 피정자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식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자신이 포함되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 이냐시오는 피정자가 부귀와 명예, 오만으로 유혹하는 원수의 책략과 속임수 앞에도 피정자 자신이 역시 노출되어 있음을 명확히 인식시키고자 한다. 피정자는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사탄의 유혹을 예민하게 식별할 수 있어야 하며, 특히 선택의 어려운 과업에로 접근할 때는 이러한 예민한 식별력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왕국’묵상과 ‘두개의 깃발’묵상은 전체 선택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장 깊은 내적 움직임들의 원천이 되며, 이 움직임들은 올바른 선택을 위해 이끌어가는 두 개의 기본적인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중요점은 이 두 핵심적 묵상은 피정자가 받는 부르심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아직 구체적인 선택을 하는 데에 그 촛점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피정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지 말고, 관대하고 인정깊은 임금께 충성하는 용맹한 기사처럼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 바치면서, 완전한 마음의 청빈에 도달함으로써, 그리고 만일 하느님의 성의에 어그러지지 않고, 또 자신이 그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실제적 극빈자까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참가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지침서]는 앞에 언급된 두 묵상, ‘두개의 깃발’묵상과 ‘세 종류의 사람들’묵상과 동시에, 혹시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면, 그 다음 날 나자렛을 떠나 세례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여정에 대한 묵상을 시작하면서 즉시 ‘겸손의 세가지 단계’묵상 [165-168]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일련의 묵상들의 내적 논리는 바로 피정자로 하여금 ‘겸손의 세가지 단계’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끌면서 피정자 자신의 마음속에 세째 단계의 겸손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묵상들 - ‘그리스도 왕국’, ‘두개의 깃발’, ‘겸손의 세가지 단계’ - 은 선택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정자가 부르심을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그 주된 관심을 가지면서, 가난하고, 고통과 모욕을 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도록 초대한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 세 묵상들은 서로 긴밀히 내적으로 엮어져 있으며 선택에 반드시 필요한 기초와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냐시오식 선택방법의 고유한 특질은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으시며 모욕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바로 그 맥락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교육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섬김에서 ‘특수한 자’[97]가 되고자 열망하는 피정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자신이 포함되어 있게 되기를, 그래서 가능한 한 더욱 가까이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자가 선택하게 될 것은 실제로는 하느님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한 응답, 즉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서 가장 완전한 영적 가난, 어쩌면 실제적인 가난에 까지도 그를 이끌어 가실지도 모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즉 이냐시오식 선택에서 기대하는 더 명백하고 구체적인 생활 양식의 선택, 혹은 개선은 피정자가 얼마나 더 그리스도의 가난, 고통, 모욕을 본받고자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고, 또 이를 위한 내적 준비가 되어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의 핵심을 이루는 이 세 묵상들의 목적은 더욱 분명하고 더욱 구체적인 선택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기초와 바탕, 또 그것에 필요한 시야를 제공함에 있다. 피정자가 모든 무질서한 애착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할 마음이 있을 때에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머거리가 되지 않기로 결심할 때에만, 가난하시고 고통받으시며 모욕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하신 성부께 더 큰 봉사와 더 큰 영광이 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포함되기를 진심으로 열망할 때에만, 피정자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선택을 위한 내적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V. 선택의 세시기

 

대부분의 이냐시오 연구가들은 선택과정이 <영신수련>의 심장이며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영신수련>은 피정자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의 신분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이미 선택된 것을 확인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신앙의 맥락 속에서 올바르고 좋은 선택이 이루어지는 세 시기를 지적한다. 

 

선택의 첫째 시기는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움직이셔서 그의 성소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되는 때이다. 이냐시오는 마태오와 바울로 사도의 부르심의 예를 든다. 그는 선택의 제일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좋은 선택을 하기에 적절한 때는 세 가지 있다. 제일 좋을 때는 마치 성경에 있는 성 [바오로] 사도나 성 [마태오] 사도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따른 경우와 같이, 열심한 영혼이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끌어 당기는 때이다. [175] 

 

선택의 첫째 때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시기로서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계시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에 대해 전혀 의심없이, 아니 의심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없이 응답하게 된다. [지침서]는 이 선택의 첫째 시기가 대단히 기적적이고 예외적이며 또한 예언적이기 때문에 아주 드물고, 초자연적 계시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환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비록 이러한 기적적 성소들이 요즈음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위의 사도들의 부르심에 어느 정도 근접한 경우들을 책을 통해서 읽게 되거나 혹은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침서]가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자기-확증적인 체험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도들의 체험과 유사한 종교적 체험을 지니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이냐시오는 삶의 신분을 결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두 가지 시기를 제시한다. 

 

둘째 때는, 영혼의 위안이나 고독의 경험이나 여러가지 신들을 구별하는 경험 등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이 아주 명확하게 나타날 때이다. [176] 

 

선택의 둘째 때는 이 과정이 전개되는 모습 안에 드러나는 명백성, 어떤 지식이나 체험을 통해 식별해 보는 시기이기에 더 일상적인 영적 감성과 내적 움직임에 관심을 두면서, 논리적 사유 보다는 지성을 이끄는 의지의 능력에 더 관심을 갖는다. 첫째 시기가 지니고 있는 비범하고 기적적인 특성이 전혀 없으므로, 이 둘째 시기는 ‘좀 더 일상적인 경우’이고 피정자가 오히려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시기이다. 또한 첫째 시기가 지니는 직접성과 그 강도가 없기 때문에 둘째 시기는 오랜 실험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다다르게 된다. [지침서]는 선택의 둘째 시기는 보다 더 일상적인 경우라고 말한다. 이 시기는 내적인 충동과 내적 영감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지성적 노력이나 논리적 사고의 전개과정 없이 - 혹시 있다고 하여도 거의 없을 정도로 아주 조금 일어날 뿐이며 - 영혼 안에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완덕에로 향하는 의지가 생기게 되는 시기라고 말한다. 즉 ‘선택의 첫째와 둘째 시기에서는 의지가 앞서고, 지성이 그 뒤를 따른다. 의지가 이끄는 대로, 그것 자체에 대한 논리적 사고의 과정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주저함도 없다.’ 이 시기에 대해서 [지침서]가 내적 움직임들, 지적 활동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의지의 활동, 논리적 사고의 감소 등을 강조하지만, 이 시기가 단지 종교적인 감수성이 지배하는 시기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선택의 세째 시기는 침착함과 고요의 때이다. 내적인 고요를 누리게 되는 이 때에는 마음의 평정을 교란시키는 어떠한 격동도, 작은 동요도 없다. 

 

세째 때는 평온한 때이다. 즉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는지 생각하고,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를 원하면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회에서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어떤 생활양식 즉 신분을 선택할 때이다. [177] 

 

이 선택의 세째 시기에 대해 이냐시오는 더 세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평온의 때라 함은 영혼이 침착해 있어 각종의 신들의 책동으로 흔들리지 않고 자유롭게 또 침착하게 자기 본성의 기능을 사용하는 때를 말함이다.’ 여기에서 이냐시오는 하느님께서 개개인에게 원하시는 바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방법은 매우 이성적이고 업무처리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숙고하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 앞에 놓고 그것의 긍정적인 이유들과 부정적인 이유들을 저울에 재보듯 그 무게를 달아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피정자 자신이 마치 평형 상태에 있는 저울과도 같이 자유로운 상태로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익이 되는 이유들과 불이익이 되는 이유들 뿐 아니라, 그이유들 밑에 깔린 동기들도 살펴보면서 그 무게를 달아보아야 한다. 이 작업은 ‘원리와 기초’의 정신을 반영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업이 한걸음 더 나아간 점은 이 시점에서는 피정자가 어떠한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와져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 즉 어느 한 쪽에로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세째 시기에 필요한 마음의 평정은 피정자 자신이 제시된 대상에 대해 거부하거나 혹은 따르거나 어느 한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거나 쏠리지 않아서 마치 균형 잡힌 저울처럼 서있는 상태의 평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평정의 상태에서는 하느님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비추셔서 자신이 선택해야할 바를 잘 깨닫도록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조명의 은혜에 힘입어 선택하고자 하는 것을 모든 각도에서 검토한 다음에 이치가 더 기울어지는 편을 따라 선택을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선택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성적 성찰과정이 모두 끝난 후 피정자는 하느님께로부터 확신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을 결정한 후에는 하느님 대전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 선택이 하느님께 보다 큰 봉사와 영광이 되겠으면, 당신이 그것을 받으시고 또 인정하시도록 선택한 바를 하느님께 아뢰 바칠 것이다. [183] 

 

이냐시오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직접 피정자의 내면 속에서 그와 더불어 일하시기를 기대하고 또 그것을 굳게 믿는다. 즉 피정자의 마음안에 일어나는 여러 영적 지각들,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의 다양한 움직임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이 선택을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는지를 알려주실 것이다. 이 선택을 받아주시고 이에 대한 확인을 내려주시는 순간이 바로 이 선택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고, 이러한 요소가 이냐시오식 선택의 핵심적 요소인 것이다. 

 

선택의 세째 시기의 둘째 방법에 제시된 첫째 규칙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첫째 규칙은, 나를 움직이고 또 이러한 것을 선택케 하는 사랑은 위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즉 선택을 하는 자는 우선 그가 선택하는 대상에 대하여 다소간 가지고 있는 그 사랑이 오로지 자기의 조물주 하느님을 위한 사랑임을 스스로 느껴야 한다. [184] 

 

즉 피정자로 하여금 선택을 하도록 초대하는 모든 동기는 위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냐시오는 다시 한번 선택의 첫째 시기의 하느님의 주도적 인도하심의 요소를 환기시킨다. 세째 시기의 두가지 방법은 이성적인 사유와 성찰에 기초하는 피정자의 이성적 노력을 보다 많이 요구하며, 피정자는 그 성찰 과정 속에서 보편적인 원리들로부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하느님의 뜻에로 옮겨간다. 세째 시기는 그 자체로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첫 두 시기의 요소들을 구해야한다. 하지만 세째 시기에서는 이성의 활동, 불편심, 종교적 감수성 등에 의해 형성되는 초자연적 신중성,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적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평화인 평정심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선택 그 자체는 단지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결심 - 이러한 결심은 이미 첫 주간에 했다 - 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불리워진 그러한 신분의 선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국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능동적인 결단인 것이다. 

 

삶의 신분을 선택하는 주제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이지만 지극히 중요한 작업이다. [지침서]는 그것을 끊임없는 구원의 사업으로 본다. [지침서]가 제시하는 <영신수련>의 목표는 피정자로 하여금 ‘세상에서 살거나 혹은 수도생활을 영위하거나 자신이 범한 죄를 자각하여 진정한 참회를 얻도록’하고, 그럼으로써 ‘전폭적으로 삶을 개혁하고 개선하기 위한 주춧돌’을 세우도록 돕는 데 있다. 그 근본적인 목표는 바로 ‘개혁’이다. <영신수련>에 묘사된 것처럼 다양한 영적 움직임들을 경험하게 되는 여러 순간들이 바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들이다. 

 

<영신수련>이 설명하는 것과 같이, 선택과정에는 영혼이 움직임을 경험하는 다양한 경우들이 있어서, 그 때가 선택을 하기에 적당하고 적절한 시기가 된다. 앞에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선택의 첫째와 둘째 시기에서는 의지가 앞서고, 지성이 그 뒤를 따른다. 의지가 이끄는 대로, 그것 자체에 대한 논리적 사고의 과정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주저함도 없다. 그러나 세째 시기에서는 지성이 주로 앞서서 활동한다. 지성은 의지를 자극하고, 지성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쪽으로 의지를 이끌어 가면서 마땅히 그래야 할 이유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분석은 대단히 자세한 식별력을 요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 세 시기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세가지의 독립된 개별적 방법들이 아니라, 전체 선택과정의 한 체험의 다양한 측면들인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하나의 과정에서 이 세 시기의 요소들은 서로 다른 강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피정자가 자신의 깊숙한 내부에서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활동하심을 압도적으로 체험할 때가 바로 첫째 시기이다. 이 내면의 직접적인 하느님 활동의 체험이 영신적 위안과 영신적 고독의 모습으로 전이되는 시기는 둘째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이 내부의 핵심 체험이 평정심으로 바뀌어서 피정자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능력들을 침착하고 평화스럽게 사용할 것을 허락하는 시기가 세째 시기인 것이다. 

 

<영신수련>이 진행되는 동안 지도자는 ‘묵상이 어떠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지, 어떠한 생각들이 이 묵상 동안에 추구되는지, 의지의 활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와 이에 따르는 영적 위안들에 관해서 특별히 관심을 두면서 살펴 보야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어떠한 점에서 영신적 체험을 얻게 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피정자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유연성과 엄격성을 동시에 부과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언제나 엄정한 엄격성에 의해서 도움을 받게 되면서, 또한 동시에 이러한 엄격성은 부드러움에 의해서 알맞게 조절되기도 한다. 높은 수준으로 성숙된 식별력은 모든 종류의 영적 움직임들을 감지할 수 있다. [지침서]는 영적 위안을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영적이며 동시에 수동적인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한다. 영신적 위안이 하는 역할과 그것이 이끌어 내는 분위기는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평화, 확실한 내적 고요함, 영적 기쁨, 조명, 신적 사물에 대한 명쾌한 지각, 눈물, 하느님께로 마음의 들어올려짐, 하느님께로 집중되는 희망, 영원하신 하느님께 대한 내부 감각, 천상적인 것에로의 이끌림, 신성한 사랑에 대한 격렬한 감격, 이와 비슷한 여러 영신적 효과들과 정서적 상태들 - 이들 모두는 선한 영으로부터 온다. 영신적 고독이 이끌어 내는 분위기는 슬픔, 마음의 불화, 사람들과 사물들에로 집착되는 기대, 이기적인 애착들, 메마름, 우울, 세속적 대상에로 향하는 분심 등이며 - 이들 모두는 악한 영으로부터 온다.

 


VI. 나오는 말

 

선택 과정이 이렇게 상세하고 단계적으로 제시된 것은 마치 요리법을 읽는 인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영신수련>과 [지침서]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가 일반 대중에게 파고드는 시대적 환경에서, 즉 ‘어떻게’라는 상세한 설명들을 요구하는 시대의 영성적 문화속에서 발전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영적생활을 마치 수학의 공식처럼 표현한다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영적인 문제에 참으로 전문적인 소양을 지닌 영적 지도자들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영적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공식화되고 도식화된 영적 생활에서 바람직한 엄격성과 유연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신수련>은 바로 이러한 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교본이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이 [지침서]는 그 교본에 대한 교본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불러 일으킨 충격은 너무나 대단해서 이것은 점차로 교회 안팎의 여러 개혁을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지침서]는 분명히 예수회가 <영신수련>을 제공하는 것을 그 본분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수회의 소명은 우선적으로 <영신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사목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신수련>은 예수회원들을 양성하는 기본적인 도구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영신수련>의 정신과 그것을 지도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곧 모든 예수회원들의 주된 사목적 임무이다. 이 [지침서]에는 초기 예수회원들이 어떻게 <영신수련>을 이해했고 또 그것을 지도했는지 등에 관한 막대한 양의 체험적 지식이 담겨져 있다. 가톨릭 종교개혁 시대에 활동한 예수회원들의 공로는 <영신수련>이 교회의 개혁을 위한 뛰어난 도구가 되게 했다는 점이고, 또한 <영신수련>은 역으로 예수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뛰어난 개혁가들이 되게 했다. 개혁의 원천적인 모범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이다. 모든 인간의 모범이신 예수를 따르고 본받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고, 바로 이것을 통해서 궁극적 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은 기도와 영적 생활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어떤 총체적인 철학적 근본 원리는 아니다. 이것은 단지 회심의 한 방법으로서 하나의 초연(初演)이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에 대한 다채롭고 광범위한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더욱이 <영신수련>을 행하거나 지도하는 어떤 하나의 공인된 방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지침서]는 <영신수련>의 하나의 공식적으로 인정된 해석이면서 광범위하게 일치된 견해를 견지한다. 예수회의 2세대들은 그 선배들로부터 직접 <영신수련>을 행하고 지도하는 양식과 방법들을 전수받고 또 보존해 왔다. <영신수련>이 초기 예수회원들에 의해 개혁의 기본적 도구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 이는 [지침서]가 <영신수련>의 주된 목적을 생활양식의 개혁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분량의 거의 1/3을 ‘선택’에 할애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침서]에 표현된 개혁을 위한 새로운 영성은 바로 식별의 영성이고, 선택의 영성이다. [지침서]는 예수회의 사명이 곧 <영신수련>에 있다고 분명히 정의한다. 피정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피정 지도자와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지니고 있던 초기 예수회원들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사목적 직무였으며, 어떻게 이 사목적 직무에서 유연성과 엄격성을 발휘하느냐는 이 지도자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이들은 <영신수련>의 기본적이며 실제적인 방법은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특별한 상황들 - 서로 다른 요구, 신분, 심리, 성격, 지력, 체력, 등의 다양한 관심사 -에 이 <영신수련>을 적용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도전과 필요의 맥락 속에서 어느 정도의 지침과 기준이 필요했고, [지침서]는 바로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영신수련>이 불러 일으킨 새로운 영성은 그 시대의 구체적 상황에서 태어난 새로운 영성이었다. [지침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조직적인 응답이면서 초기 예수회가 그들의 사목활동에서 어떻게 <영신수련>을 사용하였는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회심을 위한 도구, 개혁을 위한 도구였다. <영신수련>의 심장이며 중심인 ‘선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침서]는 영성적으로 어떤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는 않으나, 어떻게 <영신수련>을 지도해야 할 것인가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에 <영신수련>의 발전사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제는 또 다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 도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다. 문화와 종교적 정서의 풍토 속에서 영성적 도구들은 만들어 진다. 문화와 상황들은 어떤 특정한 풍토와 도구들을 마련해 주면서 바로 그것들을 통해서 그 시대의 요구들을 충족시켜 간다. <영신수련>은 올바른 선택을 통하여 활동 속에서 관상하며, 또한 그의 모든 활동이 관상에서 움터나오는 사도적 영성을 지닌 사람을 양성해 낼 것이다.

 

[사목, 1993년 4월호,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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