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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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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7

관상(觀想)

 

 

관상 (Contemplation) 이란 기도의 한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서, 마음이 사색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단지 단순하게 집중되는 형태의 기도를 의미한다. 영혼은 관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에 고요하게 머문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신비 신학 전통에서는 관상의 기도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거나 혹은 은총의 도움으로 미리 예측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습득 관상 (Acquired contemplation) 이라 부르고,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순수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주입 관상 (Infused contemplation) 이라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주입 관상의 경지가 바로 관상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바로 이 경지에서 영혼은 자신이 지닌 능력에 의한 깨달음이나 혹은 어떤 외부 요소들의 도움이 전혀 없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초월의 세계안으로 몰입되어 들어간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관상의 여정에서 감각적 요소들이 정화 되어지는 측면으로서의 '메마름' 혹은 '영혼의 밤'이 필수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겠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는 초월을 향한 기본적인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갈망은 결코 정적인 현상만은 아니고, 초월을 지향하는 동적인 움직임이기에,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 영역에서 채워져야한다. 이러한 갈망이 바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기도의 근본적인 의미를 밝힐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스도교적인 기도는 은총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신 영원한 하느님을 향한 초월을 받아 들이는 신앙 행위라고 애해해 볼 수 있다. 기도는 당연히 신앙의 행위이며 희망의 행위이며, 이 믿음과 희망은 하느님의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놓을 때 성취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는 바로 구원의 행위이며, 성령안에서 주어지는 은혜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기에, 이 행위는 바로 영혼이 하느님과 합치되어서 더욱 거룩히 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면을 전통 그리스도교 영성 신학에서는 기도를 "하느님께 말씀을 드림" 혹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기술"로 묘사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상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도의 순수성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대한 이스라엘의 종교 체험안에서 설정 되어진다. 이스라엘이 지니는 가장 근본적인 종교 체험은 공동체의 경신례와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체험이다. 이 체험은 하느님과 "눈이 마주침"(이사 52,8) 이라는 강한 염원으로서 구약성서에 표현되어있다. 말씀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체험은 참다운 기도를 마술적인 요소와 엄격하게 구분해 내는 원천이 된다. 참다운 기도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의 신실성이기에, 기도의 행위는 바로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하느님의 신실성을 기억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롭게 체험하는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루실 최종 구원에 대한 희망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선포된 구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신약성서에 보고된 예수의 모습은 당신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와 온전히 일치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전승은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향한 순진하고 단순한 신뢰를 지니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이 신뢰는 마치 어린 아이가 자비로운 아버지 앞에서 안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신뢰이다. 수난 전승들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안에서 능동적인 요소와 수동적인 요소들의 긴장을 명백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바뀌어 지도록 애걸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두 모습의 태도는 갈라질 수 없는 하나의 태도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의 기도를 통해서 두가지의 중요한 요소가 교회의 전통안에 전수된다. 하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고, 또 하나는 주님의 날에 대한 기대이다. 사도 성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얼과의 가까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이는 바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써, "아빠, 아버지"(로마 8,15; 갈라 4,6) 하고 울부짖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초기 교회안에서 성령 운동 양식의 기도 와 합창 성가곡, 전례 양식의 공적 예배기도와 개인기도, 성찬례의 기도와 항상 기도하라는 권고안에 보여지는 매일의 기도 태도등의 다양한 기도 양식들을 묶어 주신다. 초기 교회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만남, 즉, 주님의 가르침 과 모범을 통해 성장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주님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되고 (1 데살 4,17; 필립 1,23), 하느님을 "뵙고"(마태 5, 8), 그분의 "참 모습을 뵈올"(1 요한 3,2) 것을 희망한다. 하느님께서는 '숨으시는 분'(이사 45,15) 이시기에 하느님을 뵙고 싶은 열망은 단지 부분적으로 채워질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당신의 창조물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로마 1,20 참조) 그 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분의 일을 바라봄을 의미하기에, 예수와의 가까움이 바로 기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혼이 지니는 생각과 감정이 이미 구성 되어진 기도문, 혹은 특별한 말들로서 표현되어질때, 구송 기도라 불려지고, 지성과 의지의 활동에 의해서 자유롭게 형성 되어질때 사변적 마음의 기도, 혹은 묵상 기도라고 부르며, 이성의 활동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응시로서 지성이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의지가 사랑 안에서 머무르고 있으면 관상 기도라고 부른다. 관상 기도는 묵상 기도와는 전여 다르다. 묵상 기도란 마음속에서 어떤 그리스도교의 진리나, 성서 말씀이나, 개별적인 체험을 심사 숙고하면서,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말마디나 영상등의 도움을 받으며, 숙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로 나아가면서, 이것과 연관된 개인의 개별적 경험의 세계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통해서 조명되고, 그럼으로써, 신앙에 대한 재 확인이나 하느님의 뜻을 파악해서 자신이 내려야하는 어떤 결정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관상 기도는 이러한 마음의 어떤 사변적인 활동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신선한 통찰이나 결정에 다다르게 되는 것과는 전여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과정은 관상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된다. 관상의 경지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바램, 신뢰, 감사함등이 단순한 몇 말마디 안에서 순수하게 표현된다. 이 단순한 말마디들은 때때로 계속 반복되기도 할 것이며,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이 말마디들의 의미는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 의미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단순성은 기도하는 영혼의 깊은 내면속의 바램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관상의 경지에서는 언어에 의해 단편적으로 표현되어졌던 사랑의 마음이나 감사의 마음이 점차적으로 봉헌의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기에 관상 기도란 지성의 직관과 의지력의 끈질김에 의해서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향해 상승하면서도 여러 감성을 유발하려는 이성의 아무런 노력이 없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상과 묵상은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 이어야 할 것이다. 관상 기도 홀로는 너무 가벼워 강생하는 말씀의 현실 세계와의 접촉을 잃게 될 수 있기에, 현실 세계와 연결해주는 어떤 추가 필요한 것이다. 묵상 기도 홀로는 너무 사변적이 되어 버릴 수 있고, 선입견에 의해 고정될 수가 있기에, 자유로움과 무언의 사랑의 누룩이 필요하다. 관상 기도안에는 어떤 신비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비적" 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생기는 마음의 기도와 하느님과의 일치의 어느 특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일반적으로 지성의 활동, 특히 하느님에 관해서 혹은 신적 사물에 대해서 밀도 깊게, 그리고 자주 친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나 완덕에 대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악마들도 결국 하느님을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진정한 일치는 우리 지상의 인간이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완덕을 추구하는 과정은 애덕을 추구하는 길에 방해하는 마음의 흩트려짐에 관계하기 때문이고, 둘째, 이러한 일치는 생각과 감정과 판단안에 애덕의 긍극 목표인 하느님께 대한 더 나은 관점을 제시해주기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치의 증가는 완덕의 진보에 크게 기여하겠으나, 이 일치가 완덕 자체는 아닌 것이다. 관상 기도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인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그리고 원하시는 이에게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단지 이러한 은혜를 주님께 구하면서, 이러한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분명 주입 관상의 기도는 여러 면에서 다양한 양태의 마음의 기도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 자체안에 아주 특수하고 고유한 효과들이 영혼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보통의 기도와 신비적인 기도를 구분 할 때 신학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기도의 길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나, 공통 분모로서의 개별적인 하느님 체험은 모든 차이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된 입장에서 정상적인 보통의 기도를 바라보면 개별적이고 고유한 하느님 체험의 신선함이 흐려지고, 참되게 하느님께 아뢰어짐은 더 높은 단계의 기도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고, 매일의 평상적인 기도는 단지 일상적 의무로서 행해져야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그 자체로서는 하느님께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 되어질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이가, 하느님을 원하는 모든이가 관상 기도에로 불리움 받은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한다. 

 

관상 기도 안에서 영혼은 순수한 신앙안에서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관상 기도는 과거로 부터 해방시켜서 고요함안에서 미래에로 푹 가라앉게 해준다. 영혼이 사색적이고 방법적인 행위의 묵상으로 부터 직접적이고 단순한 관상의 상태로 옮겨갈때 자기 사랑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진다. 순수 사랑의 관상은 습관적이되어 가는데, 물론 아주 적은 정도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지만, 관상의 수동적 상태는 순수 사랑의 상태이다. 그러기에 관상의 경지는 결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 주시는 충동과 도움이 필요하기에 어떠한 관상도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습득 관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관상 기도란 단순하고 사랑에찬 마음으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관상 기도안에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그 영혼안에 거하심을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영혼은 신앙안에서 얻는 간접적 지식에 의해 하느님께서 영혼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해왔지만, 이제 영혼은 실제적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으로서 더 절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주입 관상은 감성적 애덕의 영웅적 실천 그 이상의 것이 아니기에, 완덕의 경지가 주입 관상의 경지에 따라서 판단 되어야 하는 것인지 살펴 보아야 하겠다. 과연 신적 합일의 경지에서 기도하는 영혼이 단순함의 기도의 경지에 놓여진 영혼보다 더 완덕에 가깝다고 보아야하는 것인가? 주입 관상이 완덕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것인가 라는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단지 완덕과 주입 관상을 동일시 해야하는지 혹은, 적어도 여러 경지들의 단계에 유사성이 있는지 살펴보아야한다. 이러한 질문은 성화 은총과 애덕의 습성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어떤 의미에서 기도와 영성적 혹은 감성적 성숙의 관계를 규명하고 식별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주입 관상의 은혜가 더 나은 완덕의 단계에 오르는데 꼭 필요한 도구인가? 에 관한 질문은 물론 그러한 은혜가 완덕의 필수적인 요소인가? 라는 질문과는 다른 것이다. 주입 관상의 은혜는 영혼안에 애덕을 증진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도움은 성덕에 진보하는 열매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이러한 은혜의 초대에 신실하게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즉시 이 은혜를 거두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입 관상은 대단히 고귀한 은혜로 간주되어야한다. 주입 관상의 은혜로 부터 얻어지는 일치 자체가 직접적으로 우리를 더 나은 완덕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단지 애덕의 실천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자극해 주는 것을 통해서 영혼을 도와 주는 것이다. 주입 관상의 특수한 은혜는 신적 사물에 대한 주입 조명일 것이며, 영혼이 더욱 깊이 하느님께 이끌어주는 주입되는 움직임의 강렬한 열망인 것이다. 그러기에 올바른 의미에서의 완덕이라는 것은 이러한 하느님께서 주입해주시는 은혜들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신앙의 응답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 것이며, 하느님을 자유로운 의지안에서 자신을 끌어 주시는 하느님을 포용하고 사랑하고자하는 자유로운 응답안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입 관상의 은혜들은 인간들의 신앙의 응답으로서 협력하는 것을 통해서 애덕을 성장시켜주며 완덕에 나아가게 도와준다. 만일 완덕에 이르는 경로가 엄격히 구분된다면, 완전한 기도는 완전한 이들에게 제한 되어야 할 것이며, 생활의 상태의 차이가 바로 완덕의 차이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죄스럼, 겸손, 그리고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부족함은 기도의 실존일 것이며, 기도의 여러 단계에 대한 정적인 이해는 완덕을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서 쉽게 한 개인의 선택에 대한 뼈아픈 의심으로 바뀔 것이다. 

 

관상은 오직 묵상의 오랜 실천의 단계를 거친 영혼이 신비적으로 메마름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경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기도에 관한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묵상으로 부터 관상에 이르는 경로를 자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점진적인 과정은 그리스도교의 문헌들안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영적 결혼"과 같은 탈혼적 합일의 경지에서 완성되는 과정의 단계들로 묘사 되어 졌다. 요한 까시아노, 무지의 구름의 무명 저자,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살레시오의 성 프란치스꼬 같은 분들에 의해서 아주 세세하게 다루어졌으며, 이 분들의 설명은 신비 신학 (영성 신학) 의 영역안에서 관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기점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때로는 대단히 전문적이고, 그러기에 또한 불 분명하다. 힙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 안에서 우리는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신플라톤주의 사고 구조를 통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이 여정은 세속을 떠나 자신 안에로의 여정이며, 정화를 통해 덕을 쌓아가고,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 대한 신적 관조에 이르는 여정이다. 요한 까시아노가 묘사하는 영혼의 여정은 복잡함으로부터 단순함에로의 여정으로 묘사된다. 이는 때로는 소용돌이속에서부터 고요함에로의 여정으로도 묘사되기도한다. 이러한 여정의 초기단계에 마음은 여러 생각들, 혹은 악마가 불어 넣어주는 생각들의 폭풍으로 이런 저런 생각에 갈피를 못잡는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다. 관상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영혼을 이끌어주고, 이러한 하느님과의 합일은 본질의 합일이 아니라 의지의 합일이다. 영혼은 하느님의 모습에 다가 가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지혜과 아름다움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그리스도의 현존의 은혜를 받게 되며, 성령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느님에 의해서 조명되어져서, 성부께서 지니신 모든것을 얻게되고, 양자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관상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응시의 모습이다" 라고 말했다. (IIaIIae, q. 180, a. 3, ad 1). 이것은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의 말씀, 즉 "관상은 진리에 대한 확고 부동한 응시, 혹은 마음의 올곳은 집중이라고 말할수 있고, 묵상은 진리를 찾는 강렬한 모습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신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을 이은 중세의 일반적인 관념에서 관상은 "파악된 진리에 대한 기쁨과 놀라움에 찬 응시" 로 이해된다. 반면에 묵상은 "감추어진 진리늘 찾는 학구적인 탐구" 인 것이다. 성 빅토르 수도원의 리차드는 관상이란 "마음이 온전히 자유롭게 지혜의 아름다움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며, 흠숭하는 마음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밝혀진 진리를 갈라지지 않고 올곳은 마음으로 꿰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관상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지성이 순수하게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면서, 감성적이거나, 상상력이나, 사색적 요소가 전여 없는 응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앞서거나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미 소유한 진리를 직관하는 가운데 지성이 휴식을 취함은 이성의 활동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함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의지력이 그 안에서 이끌어낸 행위와 감성적 움직임안에서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이 습관적 경향으로 바뀌는 가운데 쉼은 새로운 감성적 움직임과 행위를 추구하는 의지력의 활동과는 구별되어야한다. 그래서, 관상이라는 의미는 특별히 지성의 직관적 행위 뿐 만이 아니라, 의지의 끈질긴 행위가 우세한 기도 양상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에 관해서 관상이란 단어를 사용할때에는 직관의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주로 지성의 활동이 강조 되고 있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관상은 신적 관조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인간 존재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삶안에서 완덕이라는 것은 순수 관상가들의 덕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관상안에서 얻은 것을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육시키는 이들의 완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도미니꼬회의 신학자들은 관상을 신비적 상승의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연구와 내적 훈련을 통해서 성숙되어지고 전해지는 지혜로 본다. 

 

13 세기 이후 신학자들은 지혜의 은사와 이해의 은사가 주입 관상의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의 은혜들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모든 마음의 기도는 주입 관상의 기도인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관상이란 사랑과 기쁨안에서 단순하게 하느님과 신적 사물을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부분적으로 주입되는 것이고, 또 부분적으로 습득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전체가 다 주입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특수한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 질때 부분적 주입, 부분적 습득일 것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기에 영혼이 피동적으로 하느님의 인도에 응하게 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주입되어 지는 것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17 세기 이전에는 주입관상과 습득관상의 구분이 분명히 확립되지는 않았었다. "습득 관상"이라는 단어가 17세기에 들어서 갑작스레 여러 문헌에서 사용되어지기 시작한것이다. 

 

어떤 양상의 경건주의간에 항상 영적화라는 유혹이 있다. 그리스도교안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영적화의 유혹은 단지 영지주의나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에 국한되어서 살펴 보아져서는 안된다. 기도에 관계되는 역사 전체에 걸쳐서 이 문제는 퍼져있다. 이러한 경향은 청원기도는 단지 초심자들에게 해당하는 기도이며, 모든 감성은 가치가 없고, 기도가 더 높고 순수한 단계에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일반적으로 관상에 대한 관심은 비범의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 바뀔수 있으며, 그 노력이 강해질 때에는 인간 심성의 능력의 극도 순수 지성에 대한 체험으로 바뀌게 될것이며, 때로는 순수 어둠이라는 신비적 불명확성안에서 하느님과의 대화를 포기하는 것으로 바뀔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상은 성신께서 인도해 주시고, 알게 해주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진리와 그리스도 자신을 숙고한다는 의미에서 당연히 그리스도교적인 묵상을 전제 한다. 이러한 전제가 없이 진행되는 관상은 아무런 그리스도교적 특징을 지니지 못할 것이며, 그 자체안에 아무런 반대해야 할 요소가 없다 하더라도, 단지 초월적 명상과 같은 종교에 국한됨이 없는 체계로서,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는 지성적, 감성적 훈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들은 다른 이들 보다 더 쉽게 관상에 접하게 된다. 초월적 명상법, 요가, 좌선등을 그리스도교의 묵상법에 도입하면서 그리스도중심의 관상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점차적으로 확산 되어 나간것이다. 

 

금세기에 새롭게 영성 생활에 대한 큰 관심이 일어나고, 일반 대중들이 관상 기도의 방법을 잘 배울 수 있도록 응용하는 것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안에서 과거 20 여년을 살펴보면, 묵상과 관상에 대한 크나 큰 관심은 새로운 성령의 활동으로도 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심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유산 뿐 아리라, 동양의 관상법, 묵상법 등에 대한 탐구로 번져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도의 여러 요소들에 대한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 방법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어지면서, 방법자체가 기도의 체험을 보장해주지 않는 사실을 쉽사리 잊게 만들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성서 독서와 기도가 구분되었고, 신학과 신실로 하느님을 추구하는 열망과 구분되어진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극단은 기도를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관상이라는 의미가 여러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밤" 이라고 특징되어지는 수동적 관상은 요즘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관상의 의미와는 전여 다른 것이다. 이것은 요가, 선, 혹은 초월적 명상등의 기술에 의해서 도달하는 관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또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그의 영신 수련에서 이야기하는 관상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기도양상들에 대해서 좀더 정확한 구분을 한다. 흔히 묵상이라고 불리우는 사색적 기도는 지성과 의지의 활동을 통해 개념에 대한 분석과 비교, 혹은 다양한 느낌들에 대한 대응등으로 구성된다. 하느님 혹은 성인들과의 담화기도와 정감적 기도는 이성과 지성의 역할이 극히 적고 오히려 사랑에 찬 응시의 행위가 강조되면서 감사와 희망, 뉘우침의 요소들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기도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들인 것이다. 신적 사물에 대한 사랑에 찬 단순한 응시이며 이에 따르는 마음의 움직임인 관상기도는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 이루어 진다. 이러한 관상은 두가지 측면에서 볼수 있는데, 습득되어진다는 의미에서 영혼이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충동되고, 이러한 충동은 은혜의 도우심이 관상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 영혼이 한 모든 노력, 즉 사색적 기도에 기초해서 주여진다는 측면이고, 또 다른 측면은 어떤 때에는 하느님의 은혜의 특수한 활동이어서 영혼은 그 자체로서 어떤 준비도 할수 없다는 완전 주입의 측면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기도들은 결국 우리 의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관상의 의미를 과거 전통적 수덕 신학의 고정 관념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교 영성 고전을 통한 관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더 나은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주입 관상의 본질과 성격에 따른 여러 문제들에 관한 해답을 신비가들이 묘사한 관상에 대한 서술에서 찾아서는 안되지마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법이 비록 신학적으로 정확하지 못하고 비유를 많이 쓰지마는, 우리는 분명 그들안에서 중요한 정보들을 얻어낼수 있을 것이다. 신학자이거나 교육이 깊은 신비가들이 남겨놓은 묘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서술은 이미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지식에 의해서 영향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의미에서는, 훌륭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해서 항상 자신은 무식한 이라고 단순하게 고백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전해주는 여성들에 의해 남겨진 서술들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런지 모른다.

 

[한국가톨릭대사전 1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530-533 /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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