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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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 위령성월 기고3: 죽음! 극복할 수 있는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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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16 ㅣ No.414

[위령성월 기고] (3) 죽음! 극복할 수 있는 사건인가


죽음을 우리 삶으로 초대하자

 

 

- 죽음을 인정하고 죽음 안에서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생명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희망의 지표

 

죽음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그가 처한 문화나 종교 안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마음의 기본적인 희망적 태도, 희망의 지표를 만날 수 있을 때 죽음은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소중한 순간이며 과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코 죽지 않을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고,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것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죽음을 새로운 형태로, 인간은 죽은 후에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계속 살아간다고 믿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있다. 이들은 가족이 죽으면 가족의 시신을 함께 살던 마당에 묻는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무덤에 걸터앉아 조상을 이야기 하고 또는 그 무덤 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또 그 무덤 위에 집을 짓기도 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이별의 슬픈 과정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함께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장례를 치르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 결혼식 만큼이나 화려한 축제로 지낸다. 그들에게는 에이즈라는 병도, 죽음도 부정적으로 회피하거나 외면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38세에 죽음을 맞이하던 한 청년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닌 죽음도 삶의 일부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남아 있는 삶을 좀 더 기쁘고 보람되게 보내고, 내 생애 단 한번 밖에 없는 소중한 죽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라며 자신의 죽음을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죽음은 극복하거나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고 직면해야 하는 삶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매 순간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현실로 끌어들여 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살 때만이 죽음이 한 순간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의 생명을 주는 긍정적인 기능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한정된 삶의 가치

 

인간만이 예외적으로 죽음을 현실을 넘어 미래를 지향하는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부정과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기에 규정되고 한정된 삶의 가치가 더욱 빛나고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죽지 않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인정하고 죽음 안에서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생명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인류의 많은 철학자 신학자들이 그들의 학문 범주에서 다루어진 죽음이라는 문제를 꼭 인간 육체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질문하고 성찰하며 해석하는 것은 역사 안에서 계속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동물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측면으로 끝나지만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죽음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생명과 생명 사이에 죽음을 규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살려가는 이해와 해석의 의미론적인 과정인 것이다.

 

 

죽음을 기억·인식해야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 죽음을 감추고 억압하는 죽음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죽음을 단순히 죽음으로 인식,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데 따른 것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앞당겨 현재와 현 문화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하고 의식하며 심지어 죽음에 대한 축제를 거행함으로써 인간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져

 

죽음의 의미를 죽임으로써 삶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살려내어 우리 현재의 삶으로 초대하면서부터 죽음이 삶으로서의 그 연장선상에 놓이며 생명을 주는, 삶에 활력을 주는 사건이 될 것이다. 죽음은 두려움이나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겪어내야 할 하나의 자명한 사건이며 수용의 태도를 보여 우리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죽음은 우리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동반자인 것이다. 의미론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죽음을 해명할 때만이 죽음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을 우리의 삶으로 초대해야 한다.

 

죽음은 자신의 삶의 변화도 의미 있게 만들어 주지만 남겨지는 자에게도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인 면에서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16일, 손영순 수녀(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모현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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