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정보화] 악플과 인터넷 윤리: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의 인터넷 윤리를 중심으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29 ㅣ No.417

[문헌 풀어 읽기 - “인터넷 윤리”] ‘악플’과 인터넷 윤리 -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의 “인터넷 윤리”를 중심으로

 

 

‘악플’과 ‘악플러’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하나 고민한 적이 있다. 우선 떠오른 것이 ‘bad reply’였으나 어쩐지 한글의 ‘악플’이 주는 ‘명쾌한’ 어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 친구한테 ‘악플’은 ‘flame’이요 ‘악플러’는 ‘flamer’로 쓴다는 단순명쾌한 말을 듣고는 그 친구의 무릎을 내 손바닥으로 힘차게 내리쳤다.

 

사전을 보면 ‘flame’에는 ‘(미국 속어) 전자우편의 성난 메시지’, 그리고 ‘flamer’에는 ‘(미국 속어) 얼뜨기 녀석’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나 ‘악플’로 고민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flame’의 일반적인 뜻인 ‘불길’이나 ‘격정’이 더 와 닿는다. ‘FLAME!’ 과연 그렇다. ‘악플’은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르지 않는가? 그리고 ‘악플러’들은 ‘악플’을 쓸 때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불타는 열정’으로 어떻게 하든지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보지 않은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향을 미치는 악플

 

사실 ‘악플’은 인터넷이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은 인터넷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다른 형태의 ‘악플’을 날려왔다. 흔히 말하는 ‘뒷담화(또는 ‘남의 뒤통수 때리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악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한 사람 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커다란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악플’이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주로 동네 우물가(현대사회에서는 한 직장이나 집단 내부의 특정 모임)를 중심으로 형성된 ‘뒷담화’는 한 마을(또는 한 직장이나 집단)을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악플’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말 그대로 세계화된다. 더 나아가 인터넷이 형성한 사이버 공간 안에 일단 들어간 ‘악플’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자가분열, 심지어 돌연변이까지 일으켜 흔히 최초의 ‘악플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종 ‘악플’들까지 양산하게 된다.

 

최근에 사람들은 ‘악플’의 해악성을 지적하며 ‘악플 퇴치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유명인들의 자살에 ‘악플’이 다소간 영향을 끼쳤다는 여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악플’과 연관하여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해타산을 앞세운 주장만을 하여 정작 문제가 되는 ‘악플’의 근본적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 큰 혼란만 초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악플’에 대처하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터넷은 1990년 유럽 핵물리학 연구소(CERN)의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WWW(World Wide Web)을 만들고, 그래픽 인터페이스(WYSWYG-interface)가 가능한 웹브라우저(web-browser) 가 개발된 이후에야 본격적인 대중화를 이룬 것이니 그 역사는 20년도 채 안 된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WWW이 만들어진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은 2002년에 이미 ‘악플’을 포함한 인터넷 전반의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가 동시에 발표한 “교회와 인터넷”과 “인터넷 윤리”라는 두 문서에 나와있다. 여기에서는 “인터넷 윤리”를 중심으로 ‘악플’ 문제를 고민해 보기로 한다.

 

 

표현의 자유와 법 집행

 

가톨릭 교회는 ‘악플’과 연관하여 “뉴스를 가장한 뜬소문의 유포와 인신공격”(“인터넷 윤리”, 6항)을 사생활 침해와 저작권 등의 문제와 더불어 심각한 윤리적 문제로 보았다. 이어서 “인터넷은 이미 거의 전쟁 무기가 되어 공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사이버 테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9항)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악플’은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인 ‘표현의 자유’와 직결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먼저 “여론은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절대적으로 요구한다.”(12항)고 규정하여 그러한 표현의 자유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국가 당국이 인터넷이나 다른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을 통하여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들을 개탄한다”(12항). 이러한 맥락에서 가톨릭 교회는 “정부의 사전 검열은 삼가야 한다.”(16항)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현행법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 당국이 “법률을 집행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16항)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현재 ‘악플’ 퇴치 문제와 연관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것도 바로 ‘표현의 자유’와 ‘법 집행’의 대립이다. 사실 인간의 기본권에 속하는 표현의 자유와 한 사회의 공동선의 증진과 시민들의 안녕을 위한 최소한의 간섭인 법의 집행이 대립되는 경우, 그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인터넷 전문가뿐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이 최대한 반영된 현명한 해결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율 규제가 바람직

 

그렇다면 제도적으로 ‘악플’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일단 자율 규제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도 “인터넷 규제는 바람직하며, 원칙적으로 업계의 자율 규제가 가장 바람직하다.”(16항)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업계의 윤리 규약은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16항)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그러한 규약은 진지한 의도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작성하고 시행하는 일에 시민 대표들이 참여하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정보 전달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규약 위반에 대해서는 공개 비난을 비롯하여 적절한 처벌을 하여야 한다.”(16항)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악플’에 반대되는 이른바 ‘선플’ 달기 운동을 벌이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러한 주장이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베스트셀러의 제목처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찬과 덕담 일색의 사회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칭찬 못지않게 건전한 비판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실 건전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는 퇴보하게 되어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 실명제를 통해 ‘악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이미 많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명제를 하고 있음에도 ‘악플’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악플’의 문제는 그러한 대증요법보다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증오와 분노의 불꽃을 그리스도의 생명수로

 

‘악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연관된다. 곧 ‘악플러(flamer)’들의 마음에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불꽃(flame)이 타오르고 있고, 그것을 인터넷을 통해 발산하는 방법의 하나로 ‘악플(flame)’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이 잘난 척하는 꼴을 보면 참을 수가 없고, 내가 경쟁에서 뒤처지면 타인과 사회가 저주스러운 한 ‘악플’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자리 잡은 바로 그 증오와 분노의 불꽃을 잠재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불꽃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이다. 이 생명수는 단순히 인간의 증오와 분노의 불꽃을 잠재우기만 할 뿐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1).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생명수로 증오와 분노의 불꽃이 잦아든 세상에 새롭고 참다운 불, 바로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불꽃으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 혹여 남아있을지 모르는 증오와 분노의 작은 불씨마저 이 선한 성령의 불꽃으로 잠재워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악플’과 ‘악플러’와 함께 증오와 분노는 영원히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게 될 것이다.

 

* 이종범 프란치스코 - 독일 튜빙엔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윤리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교회의 번역실에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1월호, 이종범 프란치스코]



86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