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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25년, 조선교회 세계에 인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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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1-19 ㅣ No.567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25년, 조선교회 세계에 인사하다


1925년 조선교회는 세계에 말을 걸었다. 이 해는 바티칸으로도 특별한, 아주 특별한 한 해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을 성년으로 선포했다. 1924년 성탄 전야에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한 4대 성전에 있는 ‘신앙의 문’이 열리고 성년이 시작되었다. 성년대사는 ‘성교회의 창고를 열어 은사를 퍼내는 것’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들은 성년에 허락된 특별 대사를 얻기 위해 로마로 모여 들었다. 교황청은 또 세계전교박람회를 계획했다. 이 박람회는 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고 전망하기 위한 행사였다. 그리고 새로운 성인과 복자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시복식과 시성식들도 계획되었다. 당시 조선 교회도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교회는 시복식을 계기로 자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전교박람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그 험한 세월, 그 장한 인고의 순간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박람회의 참가준비를 위해 조선 교회를 이끌던 네 분 주교들은 머리를 맞대었다. 그 준비에만도 1924년 내내 걸렸다. 전시품 가운데에는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가 중심이 되어 준비한 조선과 조선교회 관계 사진도 있었다. 그때 전시된 사진 65점이 지금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새해 벽두 우리를 초대하는 신선한 선물이다.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및 조선 순례단의 잔치 참여

19세기 후반부터 세계를 하나로 엮어갔던 유럽 여러 나라는 세계를 아우르는 박람회를 개최했다. 이 박람회에는 각국의 산물을 비롯해서 공산품과 신발명 기계류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람회는 ‘하나인 세계’를 실증하며,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특별한 행사였다. 파리의 에펠탑도 1889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건축물이었다. 교황청은 세계전교박람회를 통해서 지난 2천년 간에 걸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고 성장한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박람회에는 성지관, 로마관, 치명자관, 인류관, 서적관 등 5개의 특별전시실과 함께 각 국가관을 설치했다. 그래서 20여 개의 전시실을 가진 대규모의 박람회가 될 수 있었다. 이 박람회의 개최비용은 뉴욕과 시카고 신자들이 교구장의 추기경 서임을 축하하기 위해 모금하여 기증한 50만 달러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전교사박람회의 수익금은 외방전교회에서 선교사업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당시 조선교회는 일제의 식민지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회는 일본주교회의에 소속되기를 거절했고, 조선과 간도지역의 교구들을 한데 엮어 조선주교회의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주교들은 성년을 기념해서 로마를 찾을 세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조선교회를 알리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일본과는 다른 조선 교회만의 독자적인 전시공간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전시회는 얼마만한 반향을 일으켰을까? 당시 한국에서 로마까지는 너무나 멀고, 또 정확한 시복날짜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대략 6월에 시복식이 있으리라고 예측하던 조선 교회 주교들은 일찍 길을 떠나야 했다. 3월 17일 나이 50에 이르는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70을 바라보던 서울의 뮈텔주교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조선의 두 주교들은 수행원도 없이 여객선 꽁삐엔느호의 2등 칸의 손님이 되어 로마로 향했다.

가난한 한국교회 신자들은 각각 자신의 지역에서 주교를 배웅하고, 기도를 통해서나 주교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는 토종 조선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서 로마를 향해 떠났다. 그는 로마 성년의 소식과 두 주교의 근황을 속속 보도했다. 6천여 명에 이르는 독자들은 『경향잡지』가 그들의 세계로 향한 창이었다. 조선의 주교들은 그해 사순절과 부활절을 배 위에서 지냈다. 주교들은 6월 17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들이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날짜가 7월 5일이라고 알게 된 때는 여행 중인 5월초였다. 주교들에 이어서 5월 11일 서울에서 출발한 한기근 신부가 로마에 도착했다. 7월 1일에는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과 장발 형제가 당도했다. 한기근 신부는 조선교우 10만여 명 중에 이 영광의 시복식에 참례할 자가 자신 혼자뿐이냐고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에서 교황께 올리는 라틴어 상소문을 휴대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비록 육체는 참례하지 못하오나 마음으로는 조선 성직자 대표 한기근 신부와 같이 참례하니 조선 일반 신자에게 강복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한 요청문이었다. 장면 형제가 이 상소문을 교황께 올렸다.


박람회 출품과 사진전

조선교회는 시복을 추진하면서 1919년부터 바티칸과 상호 긴밀히 연락하고 있었다. 서울교구의 뮈텔 대주교와 드브레 보좌주교,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 원산교구의 사우어주교는 1924년 1월 초 서울 뮈텔주교댁에 모여서 박람회 출품 목록을 확정했다. 1월 11일에는 세부사항까지 확정했다. 물품 구입과 포장, 발송 등의 비용은 서울 3, 대구 2, 원산 1로 부담하고, 가능하다면 메리놀회에도 1의 비율로 할당하기로 했다. 총 5,600엔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각 교구에서는 교우들에게 협조를 청했다. 이때 서울교구 56명(121점), 대구교구 64명(198), 원산교구 2명(8점)이 참여했고, 금전도 경성교구 120명(313원 17전), 대구교구 993명(442원 97전), 원산교구 1명(100원)을 기부했다. 신자수가 더 적은 대구교구가 가장 적극적으로 이 ‘세계로의 인사’에 참여했다. 대구에서는 합의한 대로 1924년 5월 31일 박람회를 위해 준비한 물건을 서울로 발송했다. 서울에 모인 전시품들은 그해 6월 드브레 주교와 사우어 주교가 주관했다. 물론 이 작업은 베네딕도회 수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전시품목에는 조선의 종교와 천주교 역사, 순교자 역사, 교우촌 분포도 등과 조선의 기후, 광물, 식물, 산업, 문화 관습 등에 관한 다양한 전시품들이 들어 있었다. 전시품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꼬리표를 달고 포장을 하니 모두 총 552점 14상자가 되었다. 7월 7일 목록작성이 끝났고, 물품들은 곧 발송되었다.

그런데 바티칸 박람회의 전시품에 문제가 생겼다. 일본 고베 항에서 선적된 전시품들은 태풍을 만나 침수되어 파손을 당했다. 이를 알리는 9월 17일자 전보에는 ‘물품을 발송할 필요가 없다.’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이 사태에 직면하여 뮈텔 주교는 모든 것을 준비하는데 열성과 시간을 다 바친 드브레 주교를 걱정했다. 드망즈 주교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쓸 만한 전시품을 골라서 다시 보내자고 제의했다. 10월 2일 박람회 물건들이 들어 있는 14개의 상자가 백동 베네딕도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박람회 물건 상자의 피해를 보상하는 보험회사로부터 2,200엔이 도착했다. 드브레 주교는 이 돈으로 파손된 물건들을 다시 구했다. 12월 12일 드브레 주교는 이번에도 백동 수도원에서 모든 물품을 다시 상자에 담았다.

이 물품들은 시간적으로 너무 늦게 도착했던 것 같다. 로마에서 두 주교는 6월 20일 박람회에 갔다. 주교들은 조선 코너에 대해 실망했다. 한국의 많은 물건들이 전시되지 않았다. 정성을 기울인 큰 그림, 전시를 위해 특별히 마련했던 교우촌 지도, 교회의 서적들과 황사영 백서의 금속판은 보이지도 않았다. 조선의 유물이 간혹 청나라 코너에 몇 개 얹혀 있기도 했다. 주교들은 “사무실 한 구석에서 우리의 코너를 찾아냈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열심히 준비했던 물품들은 세계전교박람회에 전시되어 우리의 인사를 세계교회에 전하지 못하고, 조선교회는 사진을 통해서 세계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다행히 드망즈 주교가 담당했던 사진은 다른 전시품보다 먼저 3월 11일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사진은 총 65점인데 24×30cm 크기로 확대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사진을 통해서 박해, 생활상, 교회의 활동상을 보이고자 했다. 그런데 이 전시 사진 중에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펴낸 베네딕도회의 베버 총장신부가 촬영했던 조선인의 노동과 일상에 관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교회에서 전개되었던 교구 간 협조정신을 읽게 된다. 아울러 현재 우리 사회에서 유통되고 개화 근대기 사진의 주류가 천주교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이라는 점도 알게 된다. 또한 로마에서 전시되었던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전통문화에 대해 선교사들이 품었던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1925년이면 조선 사회에 양풍과 일본풍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 전시 사진에는 그러한 모습은 단 한 장도 없다. 소박하나 정겨운 그 사진들은 신앙을 지켜 온 조선의 순교를 세계에 드러내는 또 다른 계기를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시복식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이는 2016년을 전후하여 시복식이 열리게 되리라 전망하기도 한다. 이 시복식을 계기로 하여 어쩌면 세계는 더 완벽한 준비를 갖춘 한국교회를 소개하는 전시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다가올 시복식을 계기로 하여 1925년의 시복식에서 조선교회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해 애태웠던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우리가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가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교회와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를 짚을 때이다.(도움 :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 캠퍼스 도서관)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3년 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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