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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혐오 사회: 혐오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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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혐오 사회] 혐오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오늘날 신조어를 살펴보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더 많은 듯하다. 특히 ‘극혐’, ‘틀딱’, ‘한남충’, ‘싸패력’, ‘맘충’ 등 세대 간, 성별 간의 혐오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단어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혐오에 빠졌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혐오란 무엇인가
혐오가 과연 무엇이기에 이러는 것일까? 심리학적으로 ‘혐오’(嫌惡, disgust)는 ‘불쾌하고 기분 나쁜 사물과 대상에 대한 반발로 일어나는 정서적 반응’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정서적 반응’에 있다. 이성적 반응이 아니란 점이다. 그래서 혐오에 빠진 사람에게 이성적인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 힘들다.
애초에 불쾌하고 기분 나쁜 사물과 대상부터가 아주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은 선지해장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돌지만, 한편으로 역겨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다만 주관적으로 “이것은 혐오스러워!”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 보편적인 대상으로서의 혐오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혐오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편견을 갖는다는 점이다. 만일 저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여전히 개인적인 혐오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하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특정 집단을 만들어 시위하기도 하고 인터넷에 혐오 댓글을 달기도 하며,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표현하고 행동할까? 예전에도 주관적으로 불쾌하고 기분 나쁜 사물이 있었는데도 이처럼 표현하고 행동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까닭은 바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혐오를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민주 사회의 교육은 개인적 권리를 중시한다. 그와 더불어 권리 행사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도 강조한다. 그런데 혐오 발언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은 타인의 불쾌함이나 피해에 대한 책임보다는 현재 자신이 느끼는 혐오를 표현할 권리에 더 집중한다.
방송 중인 국정 감사장에서 막말하는 국회의원과, 백화점에서 자신에게 기분 나쁘게 한 일을 무릎 꿇고 사과하라며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 음식점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아이를 제지하는 매장 직원에게 매섭게 대드는 부모, 아파트 경비원을 비하하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입주민 등, 저마다 직업과 계층이 다르지만 혐오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유는 같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회 구성원을 존중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고 교육받았던 점은 무시한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나르시시즘 현상
그렇다고 민주주의 교육이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중시하는 가치가 공동체 의무보다는 개인적 권리로 더 옮겨졌음을 말하고 싶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전원일기’와 같은 공동체 속에서의 삶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라도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70년대 대가족이 알콩달콩 지역 공동체에서 녹아들며 사는 ‘초원의 집’과 같은 드라마가 많았지만, 이천 년대 이후에는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드라마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꾸려 나가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또 예전에는 ‘슈퍼맨’과 같이 변신 전에는 음지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사회적 정의를 위해서 나타나는 주인공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아이언맨’처럼 사회적 정의를 고민하기는 하지만 음지에 있기는커녕 화끈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자기 마음대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주인공의 인기가 더 높은 듯하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나르시시즘과 자기중심주의 때문이다.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며 행동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 개인적 능력으로 창업해서 성공하여 미디어에서 다뤄주는 사람 등을 본보기로 삼아 자란 세대는 개인의 것을 공동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곧 공동체 의식보다는 개인적 취향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늘다 보니 사회적 기준도 개인적 취향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움직여졌다. 예전에는 이기주의라고 욕을 먹었을 발언과 행동도 요즘에는 당연한 권리 행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 진 트웬지 박사가 「나르시시즘 전염병」(Narcissism epidemic)이라는 제목의 책을 낼 정도이다.
한국 사회의 혐오 현상과 심각성
그런데 한국 사회의 혐오 수준은 나르시시즘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혐오가 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각 분야가 서열화 된 과잉 경쟁 사회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성적 순위에 민감하도록 교육받았고, 취업하거나 창업하면 소득 금액으로 그 사람의 성공을 재단하려고 하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 숫자로 규정되고 그 숫자로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행복이라는 질적인 판단 기준은 주관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치부된다. 실제로 상담하다보면 어서 빨리 남보다 더 큰 성공을 향해 내달려야 하고, 그래서 행복에 대한 고민은 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방해물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과잉 경쟁 사회에서는 서열의 정점에 극소수만 올라갈 수 있다. 서열을 놓고 보면 대다수의 사람은 승자라기보다는 패자에 더 가깝다. 그들에게 이런 현실은 불만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현실을 바꾸려는 서열 높이기 노력은 쉽지 않다. 결과도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을 깔아뭉개는 것으로 자신이 더 높은 서열에 있는 승자임을 확인하는 것은 쉽다. 그래서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혐오 발언을 한다.
우리나라는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법 조항을 따로 갖고 있지 않다. 오스트리아나 독일, 벨기에, 불가리아, 프랑스, 핀란드, 스웨덴, 영국, 캐나다 등에서는 심각한 형사 처분을 받을 수위의 혐오 발언과 행동도 우리나라에서는 경미한 처분을 받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가치를 폄하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높이는 전략은 과잉 경쟁 사회에서 효과적이다. 더구나 처벌도 심하지 않으니 맘껏 폄하하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과 함께하면서 힘을 더 얻는다.
더 나아가 다른 집단에서도 지지 않으려 더 강하게 혐오 발언을 하며 사람들을 모으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서는 해당 싸움이 사회적 논쟁거리로 다뤄진다. 그러면서 혐오에 노출되지 않을 사람까지도 혐오에 노출되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다.
가치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이런 혐오 사회를 개선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첫째, ‘생각의 중심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개인적 취향으로 무엇인가를 싫어할 수는 있다. 혐오 사회에서 벗어나자고 무엇인가를 싫어하는 마음 자체를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다. 문제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과도하게 사회적인 것과 연관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만일 자신이 선지해장국이 싫은 이유를 조선 시대 가부장적 문화에서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개인의 식습관이나 가족의 식성 등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것에서 멈춰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 문제를 과도하게 사회적인 문제와 연관시키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적으로 혐오가 확대되고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생각의 중심을 먼저 개인적인 문제에 더 집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성찰의 자세이다. 반대하려는 지향점이 긍정적인 목표를 향하는지를 성찰해 봐야 한다. 혐오하는 사람과 집단의 대부분이 “○○○은 무조건 안 돼!”라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서 자신들의 가치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저들이 우리를 혐오했으니 우리도 혐오하자!”라는 식으로는 지역감정, 남녀 대립 등 혐오 사회를 부추겨 오히려 사회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대를 하더라도 그 지향점이 긍정적으로 사회적 가치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본 뒤 특정 집단과 목소리를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혐오를 넘어 우리 모두가 즐겁게 사는 가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셋째, 열린 마음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앞서 열린 마음이 있다면 혐오를 느껴도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이야기했다. 열린 마음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부터 종교적 수행의 하나로 내 것이 아닌 대상도 인정하려고 노력하면 어떨까? 종교 단체가 타 종교에 대해 혐오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포용의 자세로 다가가는 집단으로서의 모범이 될 수 있다면 그 안에 참여하는 신자의 수만큼 우리 사회는 더 좋은 열린사회로 바뀔 것이다.
* 이남석 - 심리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글을 쓰고 강연하며 상담가로 활동하는 한편, 대안적 소통 창구를 만들고자 가족과 함께 ‘문화로스팅’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이남석] 0 1,316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