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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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교회 재건 운동에 지게를 진 신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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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659

교회 재건 운동에 지게를 진 신태보 (1)

 

 

사람의 생애가 이렇게 배 지나간 자리 같을 수 있을까. 글쎄, 우리의 미래가 그러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한국 천주교회사의 인물 중에서 박해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생애를 다루다 보면 흔히 체험하게 된다. 대체로 역사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일기, 서간, 저서, 옥중 수기, 증언록, 순교자 비망기, 정부 문서, 입전 등을 추적하게 된다.

 

그러나 박해사의 인물들은 그런 기록물을 남길 만큼 여유 있게 살았던 사람들도 아니요, 대부분이 구령 사정 외에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일에 무관심했다. 게다가 정부 역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변사자만도 못하게 처리하여서 정부 문서마저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 인물 중 옥중 수기를 남긴 사람으로는 1791년의 순교자인 윤지충을 비롯해서 여려 명이 있다. 이들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내기 위해 쓴 경우도 있고 박해의 상황을 기록하도록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쓴 경우들도 있었다. 이러한 기록물을 통해서 한계가 있지만 역사 인물의 생애를 더듬을 수 있고 그들의 사고와 행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의 가계, 친교 관계,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태 등을 파악하기에는 감질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신앙 면모와 업적, 그리고 활동을 통해서 그때의 교회가 처했던 상황을 전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신태보(申太甫)는 양반 출신으로 고향은 경기도 이천 동산 마을이었다. 그의 이름은 교회 기록과 정부 기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에는 “신대보(申大南) 베드로”라고 기록되어 있고 평산(平山) 신씨 문중에서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지만 “일성록”(日省錄)에서는 “신태보”(申太甫)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친척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 영세한 것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무렵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이었다.

 

그는 영세는 했지만 열심치는 못했어도 신부의 입국 소식을 용케 얻어 듣고는 신부를 만나 성사받기가 죽어 원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공직에 있는 교우 친구를 찾아가서 신부를 만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진이 빠지도록 안달 복달했지만 친구의 대답은 엉뚱했다. 그는 서양 양말 한 켤레를 내어주며 신어 보라고 하는데, 육안으로 보아서 아이들조차 신을 수 없이 작은 것을 신으라 하니 심사가 불편했다. 친구의 설명은 이러했다. “이 양말은 보기에 작아 보여도 부드럽고 신축성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 다 맞는 것처럼 천주교는 크게 평등한 것이어서 대인(大人)도 소인(小人)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천주교에서는 열심하기만 하면 신부를 볼 수 있네.”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친구의 눈에는 신태보가 아직도 신분 질서에 얽매여 양반의 때를 벗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 것이었다. 의식 구조가 변화되지 않은 그가 신부의 거처를 알고 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경우 집안에 호랑이를 키우는 격이 될 것이 뻔했다. 다른 교우들이 보는 눈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그런 신태보는 아니었다. 입전에 의하면 그가 예비자일 때의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 마귀가 그에게 나타나서 괴롭히고 심지어는 교리 공부를 하고 있던 방에서 끌어내며 그가 세례받는 것을 단념시키려고 갖은 훼방을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마귀들에게 항거하며 세상 없는 훼방을 다 부려도 천주교를 신봉하는 일만은 막을 수 없다고 했다. 화가난 마귀들이 그를 얼마나 무지 막지하게 내동댕이쳤던지 그때 받은 충격으로 평생을 두고 몸에 고통을 느끼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신부를 만나려고 140리 서울 길을 여덟 번이나 왕래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탕치고 말았다. 그가 주 신부의 소식을 들은 것은 여드레 병풍 친다고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러나 세찬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듯이, 1801년의 박해로 교회가 칼날 위에 서듯 위기에 처하자 신태보의 절개가 나타났다. 그는 수난의 맷돌에 자신을 갈아 역사에 밑줄을 그었다. 하나는 1801년 박해 후 폐허화된 교회를 재건하는 데 지게를 진 일이요, 다른 하나는 초대 교회 시기의 교회의 삶을 기록해 남긴 일이다. 그가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1838년의 일이었다. 그가 전주 감옥에 갇힌 지 12년째 되는 해에 초대 교회 사기의 역사를 수집하던 샤스땅 신부의 요청을 받고 옥중에서 쓴 것이다. 샤스땅 신부는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를 돌아다니며 전교 활동을 해왔던 그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교회를 이끌어 오던 양반 지식인들이나 지도급 인물들은 1801년의 박해로 대부분 처형되거나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특히 신앙의 연조가 일천한 교우들의 냉담 현상은 더욱 심했다. 교회에 남은 사람들은 명문 세가의 아녀자들과 박해자들마저 거들떠보지 않던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빈사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입으로만 배교하고 마음속으로는 신앙을 쥐고 사는 ‘입술 배교자’들은 숨어서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성물과 성서는 거의 파괴되고 땅속에 깊이 숨겨졌다. 뿔뿔이 흩어진 신도들은 외교인들 틈에 끼어서 적대감과 질시와 천대 속에 기가 질려 살고 있었다.

 

신태보는 이 무렵 교회의 상황과 새로이 형성되는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의 실상을 영상처럼 기록했다. 그는 자기 마을에서 40리쯤 떨어진 용인에 순교자들 몇몇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몇 권의 기도서와 복음 해설서의 일종인 “성경직해광익”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그래서 접근했지만 대경 실색한 그들은 손을 내저었다. 대부분이 아녀자들인지라 그들과의 접촉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끈질기게 사주 구령(事主救靈)의 절박함을 호소하며 설득하였다. 그의 진실한 태도와 헌신적인 열의에 여인들은 감격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왕래하며 한가족처럼 정이 깊어지면서 서로 천사들처럼 사랑했다.

 

그들은 모여서 다시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지켰다. 그러나 모두가 살벌한 감시자인 외교인들 틈에서 오래 지탱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공포와 불안의 긴 터널을 빠져 나가기로 작정했다. 목적지는 강원도의 만첩 심산 궁곡이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 하니 하인들까지 40여 명의 식구에게 필요한 노자를 마련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식량도 그러려니와 보행이 불가능한 노파들을 위해서는 말이나 가마가 필요했다. 그는 친구들을 찾아 구걸 길에 나섰다. 근근이 경비는 마련되었지만 중도에 바닥날 것은 뻔했다. 그래서 입 하나라도 덜어야 했다. 희생은 자기가 할 수밖에 없어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 걸 조카에게 맡겼다. 그들은 남부여대하여 스스로 선택한 귀양길에 올랐다. 여정은 적진을 뚫고 가는 패잔병의 형상처럼 참담했다. 저간의 상황은 각설하고 그들은 8일 만에야 천신 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띳집 한 채를 마련해서 그곳에 들었다. 그러나 피전 한 잎 없고 의지가지없이 아무데도 기댈 곳 없는 처지에 당장 40명의 끼니가 걱정이었다. 굶어 본 경험이 없는 그들이 이 지경에 이르자 공동체 안에는 불화가 일어나고 신앙과 하느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터졌다. 중도이폐할 요량이면 당초에 작파할 일이지……. 그러나 그게 별수없는 인간의 꼴이었다. 백척간두에 서른 날에 아홉 끼도 먹어 갈 수 없는 이들을 책임져야 할 신태보의 고뇌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통이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역경과 절망은 그 농도만큼 희망의 강도를 높여 주었다. 그들은 성서의 “가난한 자들”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께 기대하며 그분께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수도자들이 되어 갔다.

 

그래도 신태보가 이끄는 교우촌은 다행한 편이었다. 많은 신도들은 고향을 떠나 뿌리 없는 부초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박해의 불길이 숙지자 생사를 모르던 신도들이 하나 둘 만나서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교우촌은 하나씩 늘어갔다. 그들은 서로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박해의 광경을 이야기 나누면서 순교자를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며 순교의 믿음을 되씹었다. 그들은 믿음의 말씀으로 다시 모였다. 그들의 신앙은 이제 자기 도취나 자기 만족을 위한 아편이 아니었다. 박해의 용광로에서 신앙의 노폐물 - 더럽고 사치스런 이기심 - 을 걸러낸 정련된 의지의 신앙인들이었다. 그들은 계산된 천당 영복의 꿈에 미래의 삶을 기대하면서 억지로 고난과 시련을 견딘 사람들이 아니었다.

 

박해의 고통과 환난을 겪으면서 자기의 한을 달래거나 외로운 심정을 의지하기 위한 신앙, 남에게 인정받은 감상에 젖은 신앙은 여자의 입술 연지처럼 언젠가 지워지기 마련이고 얼마나 천박한가를 체험했다. 또한 신앙의 진리를 머리로만 알 때 믿음은 말장난이요 환상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가난하지만 어려운 형제들과 가진 것을 나누었다. 서로의 사이가 어떠하든 위급한 경우를 함께 당하면 서로 도와주게 된다는 심리 작용이 아니었다. 배교라는 한마디면 겪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가난과 고통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가난을 체험한 부자가 더 인색하고 이재(理財)에 혈안이 되는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 삶을 체험하면서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 아는 비결을 터득한 것이다.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이 비결을 적용할 수 있었다. 양반출신들은 화려한 것을 탐하던 과거의 자기가 얼마나 속 빈 인간이었던가 새삼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었다. 가부장제의 그 사회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은 생활의 안정과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사람이었고 고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덕의 실천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됐다. 바느질도 바늘이 들어가는 순서가 있다는 상식을 알고 있었고, 애덕의 실천은 선전 거리의 실적이나 사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학식이 많은 교우들은 무식한 교우들에게 기도문과 교리를 가르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그것을 본분으로 알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 존귀한 까닭이었다. 그들은 배운 사람 가진 사람 행복한 사람끼리 자기의 은총을 끼리끼리 나누는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요, 행복을 방안에서 끝내는 졸자들도 아니었다. 짐승적 세속적 물질적 관능적 행복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쓰레기로 여겼던 자유인들이었다. 의식의 개혁, 삶의 변신(變身)이 없는 신앙은 죽은 자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거룩한 공동체는 재건되어야 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에 책임감과 사명감을 절감하는 헌신적인 인사들은 교회 재건 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그 대열의 앞줄에는 신태보의 얼굴이 크게 서 있었다. [경향잡지, 1989년 4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교회 재건 운동에 지게를 진 신태보 (2)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더니 신유 박해로 말미암아 큰 재목의 지도층 인물들이 떠나 버린 한국 교회가 그 짝 났다. 그러나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고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만은 앞서간 선배들에 뒤지지 않았다. 교회 재건 운동에 앞장선 인물들은 그 씨가 어디 가랴 싶게 신태보, 이여진을 제외하면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희생된 양반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그의 친척인 권노방,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 강진에 유배 중인 정약용(요한),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섭(유스띠노), 면천 땅의 한 토마스 등이었다.

 

신도들은 성사의 은혜 없이는 삶의 희망도 위로도 없었다. 교우들은 죄 가운데 주린 영혼을 해원(解寃)해 줄 고해성사의 은혜와 하느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혜가 밥먹기보다 시급했다. 그래서 성직자를 진실히 그리워하고 신부가 오기를 진심 견망(盡心見望)했다. 그래서 교회 재건 운동은 곧 성직자 영입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과거의 체험으로 봐서 신부를 영입하기가 호랑이 입 안의 고기를 꺼내 오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주 예수를 본받고 치명 성인을 스승 삼기만 한다면 해낼 만하였다.

 

신부를 모셔 오기 위해 북경을 왕래하는 일은 이여진이 자청하고 나섰다. 북경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면 동지사 일행에 끼여서 가는 길 외에 다른 묘책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주동자들만 아는 일로 하고 일반 교우들에게는 쉬쉬했다. 지난날에 비밀이 새나가 환난을 당했던 전사가 끔찍해서였다. 어쨌든 각오와 계획은 갖추어졌지만 밀사를 파견하는 데 드는 비용이 큰 문제였다. 그래서 자금 조성 책임을 신태보가 맡았다. 그러나 맡겨 놓은 돈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 모금이 쉽겠는가. 그는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거덜내고 말았다. 그는 별 수 없이 서울과 지방 교우들에게 모금키로 하고 그들의 성의에 호소하고 나섰다. 교우들의 가년스럽기 짝이 없는 살림에서 내는 헌금이 오죽했지만 면천에 사는 한 토마스가 모갯돈을 내놓아 어렵사리 경비를 마련했다. 그래서 미적미적 끌어오던 밀사 파견이 1811년에서야 준비가 되었다.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신부 파견을 간정하는 탄원서는 권기인이 초안하고 프란치스꼬라는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두 장의 편지 내용은 엇비슷했다. 제2의 ‘백서’(帛書)라고 여겨져 오는 이 탄원서에는 신유 박해의 참상과 생존해 있는 신도들의 처참한 생활상과 그들의 신앙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1811년 이여진은 북경 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귀국하면서 여비 마련에 진 빚과 다음 경비에 충당할 생각으로 묵주 성패 상본 등 여러 가지 성물을 가져와 비싼 값에 팔았다. 그러나 그게 교우들에게 불평의 화근이 되었다. 경비를 헌금한 교우들이 조그마한 성물일망정 선물로 받지 못하자 투덜댔다.

 

그런 판국에 1812년 다시 이여진을 파견하려 했으니 모금이 될 리가 만무했다. 신태보는 동으로 서로 뛰어다녔지만 첫 거사에 참여한 교우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무진 애를 먹어 가며 간신히 경비를 마련하여 1813년 이여진을 다시 파견했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그 당시 북경교구 사정이 신부를 파견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렇게 두 번씩 거사가 무산되고 당분간은 성사가 어렵다고 느끼자 성직자 영입 운동에서 물러나 전교 활동으로 교회 재건에 몰두하였다. 그는 경상, 전라, 경기 지방을 두루 다니며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그러다가 1827년 경상도 상주 잣골(이안변 배모기 부근 혹은 함창면 척동리)에 정착하여 바깥 세상과 단절하고 자기 수양에 몰두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이 3월부터 전라도 지방에 박해가 불붙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자기가 무사할 리 만무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정부의 생각이 천주교를 씨 말리려면 천주교 서적을 없애는 게 상책으로 여기고 있으니 전라도에서 교회 서적을 압수하고 그 출처를 캐는 날에는 자기 이름이 들먹여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막 잠적할 준비를 챙기는데 전주 진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이른 새벽에 들이닥쳤다.

 

그는 4월 22일 체포되어 26일에서야 전주 진영에 도착했다. 그리고 앞서 갇혀 있는 교우들의 말을 듣고 그의 예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전주 영장은 그의 행적을 들먹이며 회유했지만 신태보는 순경에는 왕을 섬기다가 역경을 당했다 해서 왕명을 어긴다면 비겁자이듯 배교할 수 없는 이치도 그러하다면서 신념대로 행동하겠다고 말문을 잘랐다. 노기 충천한 영장은 가지가지 형벌을 내렸다. 그는 가위 주리, 팔 주리, 줄 주리, 줄 톱질 등으로 고문의 시험대가 되었다. 고문을 당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영장이 기필코 잡아들이려는 사람은 이여진이었다. 그가 북경을 왕래하며 서적과 성물을 들여와 유포시켰으니 그를 체포하기만 한다면 천주교의 근원이 뿌리뽑힐 줄로 생각한 것이다.

 

신태보와 이여진이 천주교의 괴수로 알려진 것은 줄톱질을 당한 교우들이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서적과 성물의 유포자를 두 사람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신태보는 영장이 광란 들린 사람처럼 잔혹하게 고문을 하였으나 한국 교회와 교우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사건이 확대될 질문에는 침묵으로 버티었다. 주리 트는 밧줄이 살 속으로 박혀 풀 수 없을 지경인데도 고통을 천주의 특별한 은혜로 받아들여 견뎌 냈다. 전주 판관이 심문을 맡으면서 분위기는 진영에서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함께 배석한 익산 군수가 먼저 신태보에게 물었다. 윤리 도덕을 따라 행실을 바르게 하려면 공맹(孔孟)과 성현의 책만으로도 충분한데 왕명을 거스르면서까지 외국 종교를 믿고 죽으려는 까닭을 물었다. 그는 천주교가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라 하여 금지하는 것이 타당치 못한 이유를 제시했다. 그 실례로 고급 관리들의 집에서는 외국에서 수입한 옷과 세간들을 사용하고 있듯이 비록 외국 문물이라 해도 우리에게 유익하고 필요하면 배척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화 개방을 주장했다. 전주 판관은 과학 물질 문명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공맹의 도(道)를 서양의 도와 바꿀 수 없다고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을 들어 말했다. 신태보는 천주교 교리를 이 나라의 구급약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판관의 말에 이런 대답을 했다. 우리가 육신에 병이 들면 우리 나라의 약으로 효력이 없을 때 중국에서 수입한 약을 써서 고친다. 사람에게는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갖고 있고 이것이 영혼의 병이다. 이 병은 천주교의 일곱 가지 덕이 아니고서는 고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교의 선량(選良)이며 국민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양반들의 비인격적인 행태를 꼬집어 들었다.

 

종묘(宗廟)나 공묘(孔廟)나 가묘(家廟) 같은 사당(祠堂)에서는 밥 한 그릇이나 고기 한 덩어리를 가지고 심한 욕설을 퍼부어 가며 싸워서 남우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사당은 덕을 배우는 곳이 못되었다. 겉으로는 자제해서 체면치레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마음속은 역시 시커맸다. 그의 말이 사실인 이상 전주 판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바로잡는 칠극과 천주 십계로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지도한다고 설명했다. 천주교는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종교라고 신내어 호교했다.

 

판관은 천주교 교리의 진위(眞僞)가 어떠하든 왕명으로 금지된 실정법(實定法)을 어기는 것은 죄라고 하였다. 그런 말에 주눅들 신태보가 아니었다. 그는 유일하고 참된 종교를 신봉하는 것은 잘못일 수 없다면서 양심법(良心法)을 들어 맞섰다. 그 당시 공권력을 수호하는 지배 계층에서는 천주교도들을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집과 독선이 없는 백성들이 신선한 판별력을 가지고 있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순교자들의 도덕성과 무죄함을 옹호했다. 마지막으로 전라 감사가 심문했다. 그는 앞선 심문을 반복하고는 신태보가 유교식 제례(祭禮)를 지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심문을 마쳤다. 그러나 선고는 내릴 수가 없었다. 당시 순조 임금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하던 왕세자(익종)는 형벌을 싫어했다. 그래서 형조(刑曹)에서는 전주 감영에서 내린 판결을 재가할 수 없게 되어 무한정 감옥에 버려 두도록 했다. 신태보는 고문을 받아 만신 창이가 된 몸으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형극의 옥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832년 여름 대홍수로 천재 지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천재 지변이 일어날 때면 왕은 자신이 부덕하여 하늘이 꾸짖는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반성하는 한편 죄수들에게 특사령을 내렸다. 천주교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배교를 요구했다. 신태보는 다른 네 명의 동료들과 옥중 생활을 선택했다. 육순의 나이인 그가 생명의 애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늙을수록 생명의 애착이 강하지 않은가.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신앙심은 그만큼 더 빛났다. 옥중은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옥중의 신도들은 복음을 함께 읽고 기도하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선종을 예비했다. 1839년 4월 사학 토치령이 내려지고 기해 박해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13년 동안 옥고를 치른 신태보와 4명의 동료들에게 5월 24일 형조로부터 사형 판결이 내려왔다. 5월 29일은 사형 집행 날이었다. 그날은 서문과 북문 밖 장날이었다. 그들은 장꾼들에게 천주교도가 맞이하는 최후의 모습을 보이면서 숲정이 형장으로 갔다. 신태보는 70세의 나이로 순교의 은총을 받았다. 장꾼들은 그들의 순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그들뿐이랴. 오늘도 주일을 장날로 알고 성당을 장터로 삼아 모여드는 장꾼 같은 신도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순교자의 노래를 성탄절 노래쯤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 [경향잡지, 1989년 5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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