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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포스트모던 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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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78

포스트모던 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위(定位)

 

 

들어가는 이야기

 

미국 콜로라도 주의 산간 지방에 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러스(Russ)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다 그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자른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곧바로 근처 덴버 시에 있는 전문 병원(Limb Preservation Institute)으로 옮겨져 잘려진 손가락을 이어 붙이는 봉합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인 것이 아니어서 재봉합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족을 재봉합하는 수술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혈관, 신경, 근육, 인대, 힘줄을 본래 상태대로 이어 주어야 하는데 이는 고도의 시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봉합 수술을 받고 육 개월 후에야 러스는 다시 완전하게 오른쪽 엄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완전히 잘린 엄지 손가락이 다시 붙어서 움직인다는 것은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실한 신자인 러스는 이를 하느님의 전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이지만 이 수술을 집도했던 병원의 일반 의사들은 그와 같은 놀라운 성취는 신이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의 열성과 고도로 발달된 현대 의학의 기술로 성취된 것이라고 믿는다. 수술 후 회복기를 담당한 병원의 물리 치료사는 "이 얼마나 놀라운 현대 의학의 개가이며 또 얼마나 대단한 외과 의사들입니까."라고 러스에게 말한다. 그의 이런 찬탄에 신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러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병원의 어느 누구도 이 일에 신을 개입시키거나 신의 은총을 말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러스에게는 이 사건이 기적적인 체험을 경험하는 은총의 시간이었을지는 몰라도 의사들의 눈에는 이런 기적이란 다반사로 있는 일상의 한 작업일 뿐이다.1)

 

 

1. 신 없는 세계 안에서 인간의 실존

 

위의 일화는 현대인의 영적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신의 섭리적 안내나 신적인 개입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의 삶이나 세계는 자연적, 물리적 또는 심리적 법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운행될 뿐이다. 요즘의 현대인들은 신이 없다고 적극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신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 우리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존재로 비쳐진다. 피터 버거(Peter Berger)의 말처럼 세속화는 사회가 종교적 해석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세계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개인들의 수를 증가시켜 왔다는 것이다.2) 위의 일화에서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사에서 종교적 설명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이러한 내면 의식의 세속화는 개인들의 일상 생활 안에서 종교적인 범위가 점점 축소되어 가도록 만든다. 

 

세속주의(secularism)란 단어는 현대 문화의 현주소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신을 제거해 버린, 그래서 어떠한 영적인 차원도 고려하지 않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인생의 모든 질문과 응답을 성서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성서나 신학은 존재에 관한 모든 질문에 응답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현대인은 생각한다. 모든 세상사가 과학의 영역이지 신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위와 전통의 원천이었던 신학으로부터 과학의 독립과 그 과학이 가져다 준 성취는 인간 자신에게 자신감과 자율성을 안겨 주었다. 신의 계시나 섭리에 의지하기보다는 관찰, 경험, 잴 수 있는 것만 확신한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에서 원인 제공자로서의 신의 간섭을 배제한다. 그들의 눈에 우주는 그 자체로 자족과 필요 충분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초자연적 설명을 가미하게 되면 가짜 과학(pseudo science)으로 즉각 매도한다. 현대인은 주변 세계를 과학의 힘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적 자신감을 배양하다 보니 하느님을 특별히 필요로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병이 나면 하느님께 기도하였지만 이제는 약을 찾게 되고 더 이상 병이나 재난을 하느님과 관련시켜 말하지 않는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병기를, 가뭄이 들면 이제는 인공 강우량을 생각한다. 오늘의 과학은 그것의 발생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현대인은 과정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의 영역은 점점 줄어들고 과학이 아직 설명하지 못한 부분에서만 신은 그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순전한 자연적 설명으로만 해설되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이 탈신성화되면서 세속화는 더욱더 기승을 부리게 된다. 르네상스 이후 시작된 인본주의적 낙관주의는 과학적 성취에 힘입어 이성 절대주의로 나아가게 되며, 따라서 성서에 호기심은 있으되 권위의 원천으로 보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간 이성에 최종적 권위를 부여한다. 현대인들에게 신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좌우지간 잘 모르겠고[不可知論], 아무튼 인간사에 아무런 간섭을 하시지 않고 휴가를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은 종교적 무관심주의를 부추긴다.

 

 

2. 현대 문화의 진단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든 종교적 체험은 문화적 코드(code)로 표현된다. 곧 종교는 모든 문화의 한 차원을 이루고 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3)처럼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문화 분석은 동시대의 인간을 이해하는 블랙 박스(Black box)4)와 같다. 종교적 언어가 현대인들의 감수성에 맞게 '통교'되기 위해서는 비록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영감에 넘치는 하느님 말씀이라 할지라도 '번역'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이 기존의 종교적 언어들이 현대인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이해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적 코드들을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의 정신적 지주가 된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그 동안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의존은 아직 계몽되지 못한 무지의 소치라고 몰아붙였으며, 그리스도교를 과거의 잔재로 폐기 처분해 버렸다. 프랑스 혁명 당시 이성의 여신을 노틀담 성당에 안치한 사건은 이러한 시대 풍조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인간 이성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했고 인간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과학적, 합리적, 이성적 노정에 따라 재건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아만이 홀로 이 세계 위에 의미와 질서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300여 년 동안 서구 사상을 장악해 온 극도로 고양된 인본주의적 낙관주의는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그 와중에 있었던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대학살과 같은 참상을 목격하면서 합리적 존재라고 추어올린 그 인간성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야만성과 동물적 폭력성을 다시금 일깨우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이 지상에 지상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공산주의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인간은 자신에게 다시금 이성의 한계와 무력함을 묻기 시작했으며,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부르짖으면서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현대인은 신이 죽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을 목격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5)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 가장 대표적 사례인 공산주의 이념과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는 모더니즘의 붕괴를 보여 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 이전에 이런 이성 절대주의에 기반한 계몽주의에 대한 반격이 있었다. 낭만주의나 실존주의 같은 철학 사조가 바로 그것이다. 18세기 후반 낭만주의(Romanticism)의 발흥은 가장 인간적인 것은 이성이 아니라 바로 심장에 있다는 것과 좀더 전체론적인 인간 이해를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술은 감각적, 서정적이었으며 또한 자연에서 영감을 받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신은 자연과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이며, 감관을 통해 알려질 수 있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가만히 보면 낭만주의의 영성 또한 영이 없는 영성(spiritless spirituality)임이 이내 드러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자아의 추구에만 머무르고 있으며, 그들이 자연 안에서 느끼고자 했던 영들은 다름 아닌 인간들의 주관적 반영 또는 인간 능력의 투사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아만이 홀로 세계 위에 의미와 질서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객관적 영역은 부조리하며 인간적 의미가 전혀 없다. 의미는 객관적 세계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순수하게 인간적인 주관적 현상이다. 삶에 완성된 의미가 없는 반면에 개인들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의지와 신중한 행동으로 인간은 자신의 질서와 삶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현대의 상대주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의미가 똑같이 타당하다. 종교는 여기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는 순전히 사적인 문제가 된다. 실존주의 철학 사조는 현대 대중 문화 속으로 들어왔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이제 모더니즘의 가정들은 무너졌다. 계몽주의는 신뢰를 상실했고, 이성은 그 옥좌에서 퇴위를 강요당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진리를 포기함으로써 계몽주의의 실패에 대응한다. 그 동안 이성과 감정 사이의 깊은 단절이 서로간에 고립을 불러 일으켜 왔다면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단절 사이에 가교를 놓아 주는 새로운 통전적 사고 형태를 추구하고자 하는 모색이다. 이처럼 온전한 통전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추구는 새로운 연계성의 도구로 이런 감수성의 분열(dissociation of sensibility)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지가 지성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성은 정서에 자리를 내어 주며 상대주의가 절대적 도덕성을 대체하는 이런 현실은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영적 갈구가 내재해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과학적 합리주의에 상반되는 예언적, 우주적, 신비적, 그리고 좀더 종교적 경험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후죽순처럼 각종 명상 운동, 기 체험,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종교적 열광주의를 부추긴다. 이런 영적 갈구를 보고 토마스 오든(Thomas Oden)은 포스트모던 시대는 정통적이고 고전적인 그리스도교가 복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였다.6) 그에 따르면 모더니즘의 실패는 초자연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기존의 세속적 비판이 그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의 말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에 대해 적대감보다는 더 우호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자만에 빠지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는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대한 무관심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새로운 세계관은 새로운 모습으로 기독교에 도전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차라리 기존의 그리스도교와는 무관한 영성의 갈구이다. 아니 차라리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필요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근대주의가 인간을 목적 없이 우주 안에 고립된 인간으로 남겨 두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좀더 관계성, 통전성, 우주성, 공동체성을 추구하며, 삶의 궁극적 목적에 관한 대화를 재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모더니즘의 유산인 합리주의, 반종교적인 무신론 등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영적 성숙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미 신이 사라져 버린 세계 안에서 오직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 실리에 입각한 공리주의, 갖가지 불안, 그리고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는 데서 오는 삶의 무의미성과 이에 따른 혼란과 방황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새로운 문화 사조와 그리스도인들의 과제

 

그리스도교 신학은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말대로 '매개(媒介)의 신학'(Theologie der Vermittlung)이다. 그것은 바로 신학이 전승되어 온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그 시대 사람들의 이해 지평에 매개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과 현대 문화를 매개해 주는 것은 신학의 중요한 임무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이 시대의 전망이나 문제점에 관해 아무런 매개 작업을 해 줄 수 없다면 신학은 바로 내용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이와 같은 매개 작업이 불가능해지면 신앙 언어는 고립된 집단의 게토(ghetto) 언어가 되어 버리며 신앙 언어가 가진 생명력과 역동성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천은 모더니즘의 발흥 이후 점점 그 사회와 문화적 맥락에서 격리되어 왔다. 특히 자본주의 문화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금욕적인 문화에서 인간 중심적이고 세속적인 문화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과거처럼 종교나 예술이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대중 문화가 문화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문화를 상업화함으로써 인간과 그의 삶은 거대한 자본의 힘에 예속된 채 급격히 변하고 있다. 상품 논리도 무장되고 고도로 감성화한 대중 매체의 발달은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까지도 지배해 버린다. 대중 문화가 퍼트리는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확산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종교적 가치나 도덕관이 붕괴되어 가는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속수무책임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사회와 종교 사이의 괴리는 그만큼 신자들의 신앙과 실천 역시 상호 분리 곧 신앙과 일상 생활의 분리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오늘날 주일만 신자라거나 그저 명목상의 신자일 뿐(nominal faith) 그들의 일상의 태도를 바꾸기에는 아주 역부족인 매우 경박한 경지에 와 있다. 문제는 현대화 전반 자체가 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풍토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종교는 아직도 아주 인기가 있고 또 갤럽 폴의 결과도 94%가 하느님을 믿고7) 89%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지켜보시며 그들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믿지만,8) 실제로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수는 그보다 훨씬 적다는 점이다. 그들은 역시 자기 의존적이며 독립적이다. 그들이 신앙을 바라보는 태도는 "만일 네가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여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예배를 드려라.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종교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라."9)인데 아마 이런 태도는 대다수 현대인들의 신앙관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교회의 참여 동기는 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의미의 종교적 신앙과 실천보다는, 자녀들의 도덕 교육과 가정 생활의 지침을 제공하려는 욕망 때문에 교회에 다니거나 아니면 단지 그들의 이웃들의 생활 양식의 일부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긴 해도 과거의 경우처럼 죄와 지옥불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열심을 다하는 미국인은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참여율도 늘었지만, '안으로부터의 세속화'(secularization from within)는 날로 더욱 심화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종교 다원주의이다. 곧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이 다양성과 다원성인데 상이한 가치관들의 다양성을 사회적 통합의 역기능적 요소로 보지 않고 좀더 적극적으로 살펴 새로운 경험의 기회와 사회적 역동성의 근원으로 본다는 점이다.10) 과연 다양성과 고유성, 다원성과 유일성은 반드시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문제는 결국 논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방식의 습관에서 근대적 사유 방식과 현대적 사유 방식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야말로 근대와 현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징이라는 점이다.11) 전통적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사도로부터 전래되어 오는 보편 교회의 진리 규범은 오직 하나여야 하고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서 강조되어 온 '단일성', '일치성', '통일성' 같은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아 왔는데 이러한 현대 사조의 도전은 당혹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별다른 성찰 없이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종교이며 자신들이야말로 전세계를 위해 배타적이며 포괄적인 구원의 소식을 담지하고 있다고 믿어 오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위협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금세기 가장 저명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라너(Karl Rahner)는 "이와 같은 종교적 다원화 현상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더 큰 위협과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다른 어떤 종교도 심지어 이슬람교마저도, 자기들의 종교가 살아 계신 한 분이신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 바로 그 종교라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지는 않기 때문"12)이라고 말했다. 캐논 맥스(Canon Max)도 "그리스도교와 불가지론적 과학과의 대결은,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 간의 만남으로 야기된 교회론의 도전에 비하면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하다."13)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심각한 도전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뭔가 의미 있는 신학적 해답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여러 가지 면에서 심각하게 재점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의 변화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이 계속적으로 타종교들과 관련이 없이 고립적으로 정립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은 타종교들과의 심각한 대화의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14)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종교적 다원화 현상은 피터 버거의 말대로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종교적 세속화에 따른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는 상품으로 신자는 소비자로 전락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이와 같은 상황은 필연적으로 선의의 공존보다는 경쟁 상황을 유발하게 되어 종교가 시장 경쟁의 논리에 지배당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마다 다양한 시장 전략을 구사하고 고객 확보는 치열한 선교라는 명목으로 나타난다. 곧 "종교별로, 교단별로, 교회별로 신도를 확보하기 위한 온갖 전략과 계획, 수고와 노력이 있었고"15)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눈에 띄는 이른바 대형 교회, 대형 사찰과 같은 거대 종교 재벌들을 낳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 다원적 '시장 상황'은 각개 교회의 양적 성장에 이바지하는 바가 있었다 할지라도 마치 개개의 기업들이 선의의 공존보다는 독주를 바라듯이, 각각의 종교들도 공존보다는 배타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종교간의 우열, 선악 등과 같은 이분법적 범주의 잣대를 가지고 상호간에 위화감과 긴장을 조성하여 왔다는 점이다. 특히 성서의 축자 영감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북미의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나 복음주의자(evangelist)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한국의 일부 보수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의 극단적 배타성은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만이 진리이며, 따라서 그 종교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종교적 믿음을 토대로 하여 다른 종교인 또는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적대감을 가지며 편견과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의식 및 행위 성향"16)은 전적으로 타자와의 공존을 부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극단적인 종교적 배타성이 여러 가지 갈등을 일으킬만 한 요인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수많은 사회적 문제점들을 증폭시킨다는 사실이다.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도 간의 전쟁이나 동구권의 종교와 민족 감정이 겹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전쟁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가까이는 한국 안에서도 종교적 편견은 실제로 한 가족 내에서조차도 조상 제사 문제나 결혼과 같은 문제에서부터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종립 학교에서의 특정 종교의 강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이나 신념의 주입으로 '집총 거부', '국기 배례 거부', '수혈 거부'와 같은 개인의 수동적 거부에서부터, 타종교에 대한 적극적 공격으로 나타나는 단군상 목 자르기, 그리고 불상 및 불화 훼손 사태나 근년에 일어났던 사찰들에 대한 연쇄적인 방화 사건,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지역 갈등과 중첩되어 일어나는 각종 종교적 대립과 갈등뿐만 아니라, 몇 년 전 경기도 지방에서 일어난 오대양교 집단 자살 사건과 같은 서구의 인민 사원교의 집단 자살과 비슷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비윤리적, 반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더구나 1990년대 이후 탈냉전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데올로기적 분쟁이 사라진 곳에 종교가 원인이 된 새로운 분쟁들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다.17)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전쟁의 대부분은 편협한 민족주의와 강성적 종교 신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전'이라는 미명으로 일어나는 종교적 전쟁은 인간 사회의 어떤 분규보다도 치열함을 우리는 현재 세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밀튼 잉거(J. Milton Yinger)는 이와 같은 종교의 사회적 역기능 현상에 대해 "종교적 다양성이 발전하면 그것은 사회 조직을 가로지르는 기둥이 되어 사회를 무자비하게 분열시켜 결국 사회적 조화에 필요한 협조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18)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간의 갈등은 또한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사회 계급간의 격차와 갈등, 또는 특정 종교의 권력과 부의 독점에 따르는 반발과 소외 등 다각도적 관점에서 추적해 보아야 한다.19) 

 

한국 사회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동서간의 지역 감정이라는 객관적으로 결코 증명될 수 없는 편견으로 여러 가지 불필요한 사회적 소모와 갈등을 경험해 왔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통일 시대에는 그 동안의 분열에 따른 남북간의 여러 가지 사회적, 문화적 편견으로 당분간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종교간의 편견은 위의 두 가지 편견보다도 훨씬 더 뿌리깊고 그 대립의 강도가 전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치열하다는 점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 나가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의 구성원인 한 집단이 타집단을 공존할 수 없는 적대 집단으로 대한다거나 그러기 때문에 자신들의 집단에 개종되어야만 한다는 강제 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깊은 균열을 근본에서부터 제공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스스로 가장 귀하다고 믿는 종교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중한 확신을 타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그러나 종교의 공동체성과 집단적 이기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종교가 과거처럼 한 지역 내에서 부족 종교 또는 국가 종교로서 단일 종교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오늘날처럼 한 사회 내에 여러 종교가 한 사회 안에서 공존하는 다원적 상황에서 이런 구별은 반드시 숙지되어야 한다. 

 

종교의 다원적 상황은 꼭 사회의 역기능을 초래하는 것만은 아니다. 종교사를 보면 세계의 대종교들 또한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환경에서 발생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종교사에서 보듯이 종교적 다원주의가 생산해 내는 창조적 긴장은 기존의 전통에 새로운 삶을 융합시켜 새로운 통찰력과 종교적 발달을 위한 촉매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이다. 확실히 각 종교사에서 다원주의적 도전들이 후퇴된 시기는 각종교의 영적 침체기를 알려 주는 신호였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나 수피즘(Sufism)과 힌두교가 접촉하기 직전의 이슬람교 상황을 보면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은 현대가 직면한 위기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류의 영적 성숙을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열린 종교관이란 각각 개인의 안목이나 생각이 불완전하고 어떤 한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더 넓고 더 깊은 면을 개방적 자세로 추구해 나갈 때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선과 독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국 종교의 전통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협동하는 좋은 모범들을 가지고 있다. 금세기만 보더라도 각 종교들이 연합하여 이루어 낸 3/1 만세 운동 사건이나 1970-1980년대의 민주화를 위한 사회 운동에서의 연대 그리고 앞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환경의 치유를 위한 종교간의 공동 연대는 열린 자세로 서로 함께 성장해 갈 수 있는 좋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인류 전체가 세계 내 다양한 실재와 조화를 이루며 추구하는 자유와 정의에 의거하여 상호 인정과 관용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 안에서 타인과 다른 집단들에 대한 관용을 키워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종교간의 대화는 서로의 성장을 도와 준다는 점이다. 스위들러(Leonard Swidler)의 말처럼 "대화는 서로 상이한 견해를 가진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서 서로에게서 배우는 것을 우선적 목적으로 하는 상호간의 의사 소통"20)이라고 정의한다. 종교적 세속화와 파편화한 개인주의적 경향이 서로 맞물리면서 이루어지는 종교의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 현상의 극복을 위해서도 종교간의 대화는 필요하다. 만일 타인의 신념이나 가치에 대한 공감과 존경이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공감의 확대는 과거와 현재의 사례들이 증명하듯이 우리 모두의 영적 성장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요청은 우리 자신의 특수한 종교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늘 요구해 올 것이다. 종교의 다원주의적 비전(vision)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없이 다른 종교 전통 안에서도 막대한 영적 가치와 통찰을 얻어 올 수가 있다는 점이다. 결과는 서로의 종교 내용이 풍부해진다고 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제각기 위대한 종교 전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열려진다. 우리의 지식, 우리의 신조, 우리의 행동 양식을 그대로 절대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절대화하는 우상 숭배이다.

 

 

맺는 말

 

현대는 문화 범형의 전이(paradigm shift)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다. 포스트모던적 사고를 특징짓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화적 범형들 곧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 포스트 마르크시즘(Post-Marxism), 그리고 대중 문화의 상대주의 등을 살펴보면 참으로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적 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변동의 폭은 인간 역사에 있어 왔던 그 어떤 혁명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그 동안 문화를 지탱해 오던 실재관을 형성하는 사상, 인식, 가치의 총체적 변화이다. 기존의 문화가 기계론적, 분석적, 사변적, 물질적, 개인 위주의 남성적, 양적(陽的)인 특성으로 대변된다면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힘입은 새로운 문화적 특성은 시스템적, 종합적, 직관적, 정신적, 환경에 민감한 여성적이고 음적(陰的)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21) 이러한 변화는 세계를 통전적(統全的)으로 보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이런 시각을 기초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환경 신학,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평화 신학, 여성 신학 등과 동양 종교와 교류하여 신학적 관점을 새롭게 조명해 보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인의 특징은 종교 생활에서도 체험을 중시하고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은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교리를 듣기보다는 하느님, 어떤 궁극적 실재를 체험하고 싶어한다. 성직자들이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신학자들이 전통 교리를 단순히 현대인의 지적인 구미에 맞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듣는 데 지쳐 있다. 그러면 어디에서 종교적, 신비적 체험이 떠오르는가? 그것은 바로 근대 이성이 추방한 환상과 상상력에 대한 요구의 바닥에서 떠오른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종교의 자리가 어디인지 다시 묻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그 동안의 신에 대한 논리적 '말씀 지상주의'나 '교리 지상주의'로부터, 동양의 선과 같은 체험을 중시하는 동양의 명상 방법이 왜 서구에서 그토록 커다란 반향과 인기를 끌고 있는지를 그리스도교 교회는 깊이 천착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이제 통신 수단과 교통의 발달로 지구촌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화 추세에서 더 이상 어떤 종교도 고립주의, 배타주의를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목 특히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이와 같은 추세에 맞추어 포괄적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정신의 유연성과 개방성 등은 열린 사회에서 꼭 필요한 시민적 자질이 된다. 오늘과 같은 다원적 사회에 필요한 시민적 덕성은 철저한 자기 비판 능력과 아울러 감정적 공갈, 모든 종류의 발뺌과 은폐를 간파하는 지성적 세련 위에서 타인들과 변증법적 대화를 함으로써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는 시민적 자질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열린 대화의 자세야말로 서로를 일깨움의 상태로 이끌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다른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 폭을 넓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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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avid W. Henderson, "Shoving God Aside", Culture Shift:Communicating God's Truth to Our Changing World,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98년, 122-123면. 

2) The Sacred Canopy:Elements of a Sociological Theory of Religion, Garden City N.Y., Doubleday, 1967년, 125면. 

3) Die religiose Substanz der Kultur, Schriften zur Theologie der Kultur, Gesammelte Werke, IX, Stuttgart, 1967년, 101면. 

4) 비행기가 추락하였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블랙 박스이다. 왜냐하면 이 박스 안에 추락 당시의 모든 상황이 들어 있기 때문이며 이 박스 안에 기록된 정보로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Kay Milton, Environmentalism and Cultural Theor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6년, 14면 참조). 

5) 길희성, [포스트모던 사회와 열린 종교], 민음사, 1994년, 82면. 

6) After Modernity......What?:Agenda for Theology, Grand Rapids, MI, Academie Books, 1990년. 

7) George Gallup Jr. and Jim Castelli, The People's Religion:American Faith in the Nineties, New York, Macmillan, 1989년, 45면. 

8) George Barna, What Americans Believe:An Annual Survey of Values and Religious Views in the United States, Ventura, Calif., Regal, 1991년, 207면. 

9) Stephen L. Carter, Culture of Disbelief:How American Law and Politics Trivialize Religious Devotion, New York, Basic, Harper Collins, 1993년, 15면. 

10) 김경재, [문화 신학 담론], 대한 기독교 서회, 1997년, 71면. 

11) 위의 책, 59면. 

12) Karl Rahner, Christianity and Non-Christian Religions,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5, Baltimore, Helicon, 1966년, 118면. 

13) Alan Race, Christians and Religious Pluralism:Patterns in the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Maryknoll, N.Y., Orbis, 1983년, 3면. 

14) Harold Coward, Pluralism:Challenge to World Religions, Maryknoll, N.Y., Orbis, 1985년, 13면. 

15) 나일선, "한국 교회의 성장 비결들", [목회와 신학] 8, 성서 연구사, 1992년, 26면. 

16) 이원규, "종교적 배타성과 종교성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연구", 서울 대학교 종교 문제 연구소 편,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윤리], 집문당, 1994년, 175면. 

17) 한내창, 위의 책, 29면 참조 

18) J. Milton Yinger, [종교 사회학](Sociology of Religion), 한완상 옮김, 대한 기독교 서회, 1987년, 77면. 

19) J. Milton Yinge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London, Macmillan, 1970년, 425-430면. 

20) "Interreligious and Interideological Dialogue:The Matrix for All Systematic Reflection Today", Toward a Universal Theology of Religion, Leonard Swidler, ed., Maryknol, N.Y., Orbis Books, 1987년, 26-30면. 

21) F. 카프라, [새로운 科學과 文明의 轉換](The Turning Point), 이성범 옮김, 범양사 출판부, 8면.

 

[사목, 2000년 2월호, 문영석(강남 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환경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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