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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 사별의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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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7 ㅣ No.434

[경향 돋보기] 사별의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

 

 

위령성월이 되면 대구대교구 교구청 안에 있는 성직자 묘역에 가서 기도하곤 했는데, 방문할 때마다 입구 기둥에 쓰인 글귀에 한참 동안 머무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글귀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너무나 잘 표현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죽음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는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상실의 깊은 고통과 그에 따르는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준비된 죽음을 맞이하거나 고인을 돌보는 기간을 가지고 나서 사별한 경우에도 상실의 고통과 함께 깊은 슬픔이 따르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겪어나가는 과정은 그것을 겪어가는 사람에 따라서 그 내용과 깊이와 길이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좀 더 강하게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겪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약하게 고통과 슬픔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통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겉으로는 비교적 약하게 고통과 슬픔을 겪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겪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처지가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슬픈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각자가 아주 개별적이고 고유한 방식으로 상실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슬픔의 과정을 겪어나가게 된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상실의 고통과 함께 겪게 되는 슬픔은 여러 가지 증상으로 나타난다. 혼자되었다는 느낌, 먼저 떠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한 마음, 다른 사람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 내 잘못 때문이라는 죄책감 등의 감정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기억력, 판단력, 집중력, 그리고 이해력이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 생각에 몰입하거나 부인하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는 등의 정신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심한 수면장애, 식욕부진, 피로함 등의 증상이 육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존재와 신앙에 대한 회의감, 하느님에 대한 분노, 영적으로 혼자된 느낌, 삶의 목적에 대한 혼란, 고통에 대한 강한 의문 등의 영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나타나는 다양한 슬픔의 증상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 자체만큼 강하게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통스럽고 슬픈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에 동반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을 드러내고 표현하기보다는 묻어두고 감추도록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에 주위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반응은 “넌 강하니까 잘 견뎌낼 거야.” “넌 더 강해질 수 있어.” “너무 슬퍼하지 마.” “하느님께서는 견뎌낼 수 있는 고통만 주시는 분이야.”라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당사자가 현재 갖고 있는 감정에 빠져서 슬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충고의 말들이 정작 현재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실 다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슬퍼할 수 있는 만큼 슬퍼하는 것, 그리고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만이 슬픔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슬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이다.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자리

 

사람들은 상실의 상처가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때로는 상실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슬픔이 매우 길고 지루하게 지속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하루빨리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슬픔에 빠져있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실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묻어두고 감추게 된다. 결국 슬픔의 과정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속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끝없이 긴 고통과 슬픔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장 소외받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심연에서 고통과 슬픔에 잠겨있는 그들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더 큰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고통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귀 기울이고 들어주는 것뿐이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슬픔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두려움도 없이 마음 놓고 편안하게 슬픔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원한다.

 

 

사별가족을 위한 사목적 배려

 

외국에는 상실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슬픔의 과정을 잘 겪어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다양하게 진행되는 사별가족 모임의 주된 구조는 동일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자신이 가진 상실의 고통과 그에 따르는 슬픔을 신뢰 안에서 편안하게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올라오면 올라오는 눈물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흘릴 수 있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그에 따른 슬픔의 다양한 증상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나누고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림으로써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슬픈지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또 마음을 다하여 귀 기울여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반추해서 볼 수 있게 된다.

 

교회 안에서 우선적으로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단순하지만 마음을 담아서 들어주는 자리, 편안하게 자신을 나눌 수 있는 자리이면 충분하다. 이런 사목적 배려를 통해서 이들이 상실의 고통과 슬픔에 압도되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슬프지만 그 감정을 자신의 삶에 완전히 통합하고 인생의 의미를 더욱 폭넓고 깊게 이해하며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 내적인 힘을 얻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을 토로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교회는 사별가족들이 스스로 깊은 내적 치유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사별가족 모임 참가기, 20쪽 참조).

 

* 석요섭 요셉 - 예수회 소속 신부. 배우자와 자녀 사별가족을 위한 ‘하늘사랑 & 하늘마음’ 모임 담당자로 인터넷에 카페(cafe.daum.net/lossandgrief)를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7년 11월호, 석요섭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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