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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회복지] 자선은 우리 자신을 돕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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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7 ㅣ No.435

[경향 돋보기] 자선은 우리 자신을 돕는 일

 

 

한 해가 저물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세상살이에 지친 무리 틈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마주본다. 날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긴장감이 조금은 느슨해진 탓일까. 이제 나를 둘러싼 세상 사람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기가 이때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1984년부터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금은 ‘해외원조주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1991년에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사회복지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하여 봉사할 것을 권고하였다. 교회는 우리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촉구한다.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중략) …자선은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실천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신앙 행위이다”(“매일미사”, 2006년 12월 17일 해설).

 

 

자신도 모자라 왜 남까지?

 

그런데 우리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찬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을 멈추고, 다른 이들의 고통과 가난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을 도와야 되는 것일까? 어쩌면 교회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하기만 하다. 늘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바쁜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해 선을 베푸는 것일까?

 

사회복지학에서도 오래 전부터 이런 고민들은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 이유를 밝히는 데는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의 제안이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는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돕는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두 가지 원칙을 들어 설명하였다. 그 두 가지 원칙은 ‘평등의 원칙’과 ‘차별의 원칙’이다.

 

우선 그가 말하는 ‘평등의 원칙’이란 “한 사회에서 모든 개별적인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이 가진 것과 양립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기본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말한다. 그래서 이 원칙은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고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지켜야 할 원칙으로 여기고 있다.

 

‘차별의 원칙’은 “한 사회에서 평등의 원칙에 반하여 불평등한 처우가 필요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 두 번째 차별의 원칙에서 ‘불평등한 처우’란 바로 ‘불평등’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경우를 말하며, 그러려면 사회의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정당한 경우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불평등하게 우선시하는 경우다. 차별의 원칙은, 비록 불평등한 차별이지만 이것이 바로 사회정의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 두 원칙에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리가 자신과 타인에게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를 가정한다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런 ‘무지의 상태’에서 추가적인 사회적 부가 발생하였을 때, 당연히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배당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는, 누구든지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우리가 타인의 가난과 소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관심 표현은 결국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돕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선이 필요한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모두는 자연인이기 이전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 관점에 바탕을 둔 롤스의 정의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 사회는 다수의 개인들의 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 속 ‘구성원들의 책임과 의무로 서로 엮인 도덕 실천의 공동체’라고 가정한다.

 

때문에 공동체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과 인간의 정체성은 사회 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하며, 개인의 본성적 우선권을 강조하기보다 자신이 속한 특정 지역사회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송재룡, “성찰적 모더니티의 한계와 새 공동체주의의 대안”, “현상과 인식” 22(3), 1998, 155-174쪽; 김기덕, “사회복지윤리학”, 나눔의 집, 2002).

 

 

자선은 사회적 공공선 실천

 

자선은 무언가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이들이 특정집단을 위해 자신의 몫을 내어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선은 그 대가를 예상하거나 바라고 이루어지는 행위는 더더욱 아니다.

 

자선은 우리의 일상에서 신앙적 권고에 따라 또는 단순히 선행을 베푸는 수준에서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공선을 확대해 가는 중요한 실천행위이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항상 머물러왔고,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도 가난한 이들은 늘 곁에 있었다(요한 12,8 참조). 다른 이들을 돕는 자선행위가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까닭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든 도움을 받는 사람이든 모두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요, 각자의 삶과 운명이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공존하며 서로 나눔으로써

 

올해도 어김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자선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우리 시대에 공존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방법은 다양하게 실천할 수 있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금전적 도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주위의 이웃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자그마한 관심도 훌륭한 자선행위라고 볼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이란 우리 자신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공존하며 서로 나눔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늘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 유영준 시몬 - 한양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전임강사.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서울 서대문 장애인 종합복지관에서 일했다. 같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07년 12월호, 유영준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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