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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4: 4세기 (1) 파코미우스의 공주 수도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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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7 ㅣ No.904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4) 4세기 ① 파코미우스의 공주(公住) 수도 생활


가난과 순명의 수도 생활을 창시하다

 

 

- 이집트 시나이산에서 내려 본 광야. 가톨릭평화신문 DB.

 

 

4세기에 이집트 사막에서 생활하는 은수자들은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를 따라서 은수 생활을 실천했지만, 안토니우스가 실천했던 독거 은수 생활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도 나타났습니다. 한동안 독거 은수 생활을 실천했던 파코미우스(Pachomius, 290/92?~346/47?)는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은수자들과 함께 모여 수도 생활을 실천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결국 공주(公住) 수도 생활은 훗날 수도원 제도가 확립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따라서 파코미우스는 회(會)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이집트 출신인 파코미우스는 유복한 이교도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가량 되었을 때에, 파코미우스는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징집당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복무했습니다. 이 시기에 파코미우스는 그리스도인의 도움을 받고 나서 이웃 사랑 실천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에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년여의 군 복무 기간을 끝내고 자유로워진 파코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일 강 상류에 위치한 세네셋에 살면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코이노니아로 불리는 공동 소유의 공동체

 

먼저 파코미우스는 마을 근처에서 은수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팔라몬(Palamon)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도를 받으며, 안토니우스가 실천했던 금욕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파코미우스는 스승의 곁을 떠나 타벤네로 이주해 은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그의 형도 은수 생활에 합류했습니다. 이즈음에 파코미우스는 환시를 체험하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코미우스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파코미우스 이콘.

 

 

파코미우스가 만든 공동체엔 단기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코미우스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따라 그들을 섬기면서 수도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파코미우스의 품성에 감명받은 선한 수도자들은 정성스럽게 수도 생활을 실천했으나, 때로는 괴팍한 수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파코미우스는 절망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수도자 수가 늘어나자 파코미우스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인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에게 각자 일신을 위해 자급자족할 것을 가르쳤고,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일정한 분량의 양식을 봉헌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파코미우스는 이러한 방법이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와 같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불렸습니다.

 

파코미우스가 설립한 공동체는 나일 강 상류에 인접한 프보우와 트무손에도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집트 사막에서 1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곳에 모여 사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공에도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한 세기를 버티지 못했습니다. 파코미우스가 50대 중반에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수도자들은 청년 그룹과 장년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결국 그 그룹들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파코미우스가 제시했던, 함께 모여 살며 가진 것을 포기하고 공동 소유하는 생활 방식은 오늘날 수도 생활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심의 공동체 수도 생활

 

우리는 파코미우스의 가르침이 담긴 「계명집」(praecepta)을 통해 파코미우스가 추구했던 영성 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파코미우스의 영성 생활 역시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말씀이 중심이었습니다. 즉, 초보자부터 원숙한 경지에 오른 자까지 모든 수도자는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며 가르침을 되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문맹자가 파코미우스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먼저 기본적인 성경 말씀을 암송해야만 입회가 허락됐습니다. “수도원에 처음으로 입원하려는 사람에게 (…) 시편 스무 개나 (바오로) 사도의 서간 두 개나 나머지 성경의 한 부분을 그에게 주어 (외우게 할 것이다).”(「계명집」 139항) 또한 문맹자는 공동체 입회 이후에도 글을 배우면서 계속 성경 말씀을 암송해야만 한다고 파코미우스는 강조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글자를 배우지 못하거나, 성경의 어떤 것, 적어도 신약성경과 시편들을 암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계명집」 140항)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일상이 성경 말씀과 함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자기 방을 나와 집회 장소에 갈 때나, 집회를 끝내고 다시 돌아올 때도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식사하러 식당에 갈 때도 성경 말씀 중에 한 구절을 묵상했습니다.(「계명집」 3항; 28항) 또 식당에서 과자를 나누어주는 사람도, 빵을 만드는 사람도 자기 일을 하면서 성경 말씀을 노래했습니다.(「계명집」 37항; 116항) 게다가 걸어가는 동안에도 모든 수도자는 각자 성경 말씀을 묵상했습니다.(「계명집」 59항)

 

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가르침도 잘 알아듣기를 바랐습니다. 수도자들은 장상이 가르치는 성경 강의 내용을 몇몇이 모여서 되새겼습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평소 들은 강론도 올바로 알아들었는지 그 내용을 동료들과 서로 나누었습니다.(「계명집」 122항; 138항) 파코미우스는 수도자들이 성경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직접 가르치고 그 의미를 해석해 주기도 했습니다.(「파코미우스의 생애」 86항)

 

다만 파코미우스는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성인이 돼 세례를 받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신학을 배우고 다질 기회가 적었습니다. 이런 점이 파코미우스 공동체에 영적 자양분을 더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안토니우스의 독거 은수 생활과 파코미우스의 공주 수도 생활은 여러 면에서 비교됩니다. 안토니우스의 은수 생활은 금욕 생활이 중심이었습니다. 금욕 생활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든 고향도 가진 재산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파코미우스의 수도 생활은 가난과 순명이 중심이었습니다. 파코미우스의 수도 생활은 자신의 뜻과 판단을 포기하는 차원에서 가난을 선택했으며,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순명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생활은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두 형태는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훗날 서방 교회 수도 생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5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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