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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의 해: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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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447

[경향 돋보기 - 사제의 해]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해요!

 

 

백민관 테오도로 신부는 1924년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52년 12월 사제품을 받았다. 짧은 본당생활을 거쳐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평생을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은퇴하여 가톨릭대학교 사제관에서 살고 계신 신부님을 찾아가 한평생 사제로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그분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식인이 되려면 신부가 되어야겠구나

 

내가 사제가 된 거는 지금 생각해 봐도 아주 상상 외의 길을 걸은 것 같아요. 그야말로 어려서부터 하느님께서 사제의 길로 이끄셨더라고요. 나는 황해도 장연군이라고 아주 산골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뿐 아니라 가족은 모두 외인 집안이에요.

 

시골에서 서당에 다니다가 일곱 살쯤 되니까 아버지가 나를 교육시키려고 읍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때까지 형제는 없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데 달구지를 타고 오십 리쯤 되는 길을 왔어요. 아주 시골에서 읍으로 왔으니까 아무것도 없죠. 그때 읍에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공립학교와 성당에서 운영하는 경애학교가 있었는데, 공립학교는 일본 사람만 받고 한국 사람은 특별한 사람만 받으니 나는 경애학교를 가게 됐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공립학교를 갔으면 내가 신부가 되었을까 싶어요.

 

경애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하면서 4학년 때 나 혼자서 영세를 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내 교육 때문에 평양으로 이사를 갔어요. 숭인상업학교에 들어가서도 성당에 열심히 다녔어요. 아주 구석진 시골본당이었는데, 본당신부님이 애들을 참 좋아했어요. 내가 매일 미사에 나가니까 신부님이 나를 복사를 세우더라구요. 그때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신부님은 못하는 게 없어 보이더라구요. 어린 마음에 나도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어요. 아주 단순했어요. 내가 신부님한테 끌린 것은 그분의 지식이었는데, 지식인이 되려면 나도 신부가 되어야겠구나 하고 조금씩 생각을 했죠. 이렇게 나를 이끄셨더라구요, 하느님이.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을 했어요. 내가 1927년생인데 그때가 45년도였어요. 취직한 다음에 해방이 되었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소련 공산 정권이 들어섰잖아요. 종교인들한테 공산당이 되든가 그만두든가 선택을 강요했어요. 그때 내가 본당신부님한테 은행에 다니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신부님이 거기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라고 해요. 그때 신학교가 덕원에 있었거든요. 독일에서 들어온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신학교를 운영했는데, 지금까지 받던 교육과는 전연 달랐어요. 교육 같은 교육을 받은 거죠. 그러나 공산당에 의해서 신학교가 폐쇄되고 학교에서 쫓겨나 평양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겪어본 사람이야 알지만, 공산당이 사람들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건 굉장했어요. 나는 신학생이라 감시의 대상이었죠. 집에서 지낼 수가 없는 지경이었어요. 나뿐 아니라 가족들도 고통스러워서 집에서 숨어 지낼 수가 없었죠. 내가 이남으로 가야겠다고 하니까 집에서도 할 수 없이 그러라고 하셨어요.

 

이남에 와서 지금 이 학교(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로 들어왔지요. 처음 명동성당에 가서 이북에서 내려온 신학생이라고 하니까 이리로 보내더라고요. 1·4 후퇴 때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또 학교에서 쫓겨나야 했어요. 신학교 마당에 포탄이 터지고 그러니까 신부님이 다들 나가라는 거예요. 상황이 그러니 신학생들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집으로 가는데 나는 집이 없으니 그냥 거리로 나왔지요. (서울) 혜화동 길이 지금은 크지만 그때는 왕복 1차선밖에 없을 땐데, 그 길이 의정부 쪽에서 쫓겨 내려온 사람들로 꽉 차서 그냥 밀려 내려가고 있더라구요. 그 사람들 따라 죽 걸어가는데, 한참 가니까 한강 둑이 나오는데 지금 잠실대교쯤이에요. 우여곡절 끝에 한강을 건너 수원을 거쳐 대구, 그리고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제주도로 신학교가 이주를 해서 제주도에서 신학교 공부를 하게 됐어요. 그렇게 자연적으로 이끌어지더라구요. 신부가 되느냐 마느냐 고민할 겨를도 없었어요. (다른 이들은) 신부가 되어서도 내가 이게 하느님의 성소가 있어서 사제가 된 건가 하는 의심이 있는데, 나는 그게 없었어요. 확실히 하느님이 이끄셨거든요.

 

그냥 밀어서 사제가 된 거예요. 사제가 되고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길을 인도하셨더라구요.

 

 

평탄했던 신부생활

 

1952년 12월에 부산에서 사제품을 받았지요. 사제서품 때는 신부 되려고 마음먹은 거잖아요, 그래서 각오보다도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었어요. 사제는 하느님이 불러서, 하느님의 사업을 맡겨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딴생각은 별로 한 게 없어요.

 

사제가 되고 서울로 올라와서 가회동성당 보좌로 임명받았는데, 그때가 1953년도예요. 가회동성당은 명동성당 공소였다가 신설된 본당이었죠. 성당자리가 옛날에 궁중에서 서당을 하던 자리인데, 기와집으로 기역자로 되어있어 가운데 제대를 두고 한쪽은 남교우 한쪽은 여교우 그렇게 미사를 드렸어요.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공지사항을 써서 붙이려면 신문지에 써서 붙이고 그랬어요. 그해 10월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성신학교라고 소신학교가 있었는데, 거기 선생으로 가라고 해서 갔어요. 몇 년 뒤에 돈암동성당으로 발령받아 2년 있다가 다시 대신학교로 왔다가 1956년도에 유학을 갔어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보면서 ‘아, 이 아이들이 성소에 응해서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애들은 나보다 훨씬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죠. 나는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신부가 되었구나 하고. 하느님이 하필이면 나를 그 시궁창 같은 데서 건져냈나 하는 생각도 해요. 거기에 대한 답은 없어요. 그냥 미스터리지.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조금 희생시키는, 그런데 나는 희생을 해도 되게 희생을 했지요.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했잖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으면 더 불행해졌을지도 모르죠.

 

신부생활은 평탄했어요. 내내 학교에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신부생활이 생존경쟁을 한다든가 가족의 여러 어려움을 혼자서 헤쳐나가는 그런 게 없고, 임명받은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을 하면 되는 거거든요. 다만 받은 직책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그 임무를 잘 수행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죠.

 

 

사제에게 필요한 세 가지 덕

 

신부들은 자기가 받은 직책에서 뭐를 해야 할 건지 정해져 있어요. 그걸 제대로 하면, 양심상 신부로서 할 일을 하면 되거든요. 사제는 내 생각보다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적인 사제상이 있어요. 말하자면 사제상의 중심이 되는 모토인데, 완전한 사제가 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그래요. 첫째, 건강, 건강이 없으면 일을 못하니까. 둘째, 지식, 학식이죠. 셋째는 성덕. 이 셋을 ‘3S’라고 그러는데, 건강은 라틴어로 Sanitas, 학식은 Scientia, 과학이라는 뜻보다 본래 학식이라는 뜻이거든요. 셋째는 Sanctitas라고 3S라고 그래요. 이걸 지켜야 하는데 충분히 지키기 힘든 게, 혼자 살다 보니까 첫째 건강을 잘 돌보지 않고, 둘째로는 학교 나간 다음에 늘 책을 읽어야 되는데 많이 읽지를 않아요. 그리고 성덕은 워낙 힘들고 어려운 거니까. 성덕을 기르는 데는 열심한 기도생활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사회적으로 비쳐지는 데가 없어야 해요.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나쁘게 보이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이지요. 그 셋을 전부 다 완전히 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그 세 가지 덕을 갖추는 일은 꼭 필요해요.

 

내가 50년 넘게 사제생활을 해온 기본적인 힘은 다른 게 아니고 규칙생활을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성덕, 덕행을 닦는 것은 막연해요. 그래서 나는 늘 학생들한테 구체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그래요. 학교에서는 학교 규칙을 따르면 되고, 신부 되어 나가서도 무질서한 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그러죠. 3S를 지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나는 오랫동안 신학교에만 있었기 때문에 규칙생활이 몸에 배서 오히려 규칙생활을 벗어나면 힘이 들어요.

 

3S도 사실 규칙적으로 해야 돼요. 건강도 건강만을 생각하면서 생활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건강만 생각하는 건 육신생활만 중요하게 여기는 건데, 그러면 다른 건 등한시하게 되잖아요. 공부만 계속하는 것도 문제예요. 사람이 공부만 계속하다 보면 둥글지 못하게 되거든요. 그뿐 아니라 내 경우를 봐서는 공부를 하려면 책상에 있게 되는데 그러면 병이 와요. 공부도 규칙적으로 하면 되는데 나는 라틴어사전, 가톨릭백과 사전 낸다고 아침부터 내내 낑낑거렸지요. 나중에 하도 하니까 손목이 아파서 글을 못 써서 컴퓨터를 했는데 그러다한쪽 시력을 잃었지요. 그래서 학식도 너무 과도하게 하면 안 돼요. 규칙적으로 해야 돼요. 성덕도, 자기 생활하면서 자기 생활을 거룩하게 한다는 건데,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라는 건데, 거룩해진다고 하루 종일 성당에서만 산다면 그것도 우스워지는 거죠.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성인들은 내가 따라갈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뽑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하느님, 저는 성인 만들어놓지 마세요.” 그랬어요. 성인 되려면 조건이 있어요. 무지무지한 고통을 겪어야 되는데, 나는 이게 자신이 없어서 성인으로 뽑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냥 보통 신부가 좋은 것 같아요.

 

후배 신부들한테 그래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 때와 크게 다른 것은 없어요.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거든요. 다만 위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위기를 넘기는 건 자기 힘으로 힘들어요. 그건 하느님한테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또 하나는 스스로 신부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워야 해요.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하는 자부심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선 쓸데없는 번뇌가 있을 수 없게 되거든. 자기 맡은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편안하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공격 목표라고 할까, 사회에서는 경쟁을 하고 그러니까 목표가 되고 그러잖아요. 사제는 그런 게 없잖아요. 사제라는 직분 자체가 무슨 경쟁을 하는 그런 게 아니거든요, 사제직 자체가. 그래서 사제직이 거룩하다는 거지요. 본질적으로 사제직이란 것은 하느님의 일을 직접 맡아서 한다는 자각심을 가져야 돼요. 그런 자각심을 가지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공로로 뭐가 되는 게 아니고 시키는 대로 했다는 자각을 하면 겸손해지거든요.

 

요새 젊은 신부들을 보면 강론을 잘하더라구요. 사회적인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고.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혼자 살다 보니까 건강을 제대로 못 챙기는 것 같아요. 내가 신부 되었다는 자체가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인가를 마쳤을 때는 하느님한테 갚았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빚을 다 갚지는 못했지만 내 능력껏 갚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제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사제생활은 단출해요. 다만 책을 더 썼어야 싶어요. 사제로서 보람되게 생각한 것도 책을 쓴 거지요. 요새 나는 낙원에서 산다고 그래요. 낙원에서 살기 때문에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걸로 만족해요.

 

후배 사제들한테 강조하고 싶은 말은, 규칙적인 것에는 중심이 있어야 하는 거고, 그 세 가지를 균형 잡히게 하는 일이 사제로서 일생 동안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봐요. 그게 사제로서 본분에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길이죠. 그것 역시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셔야 하는 거죠.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구술 백민관 · 정리 박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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