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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영적 독서의 일곱 가지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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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7 ㅣ No.360

영적 독서의 일곱 가지 원칙


우리의 기도가 건조해지고 생기를 잃는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진정한 의미의 영적 독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지 않고서는 절대로 자연스럽게 기도가 흘러나오지 않으며, 기도에 대한 흥미도 차차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기도를 생기 있게 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제일 먼저 가져야 할 단계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과 새로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비록 일정한 시간을 영적 독서에 바치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러한 무미건조함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개 영적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 독서를 하는 방법과 보통 전문적인 독서나, 여가 선용을 위한 독서의 방법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기도를 쉽게 할 수가 없다.

영적 독서란 단순히 영성 생활이나 신학 혹은 성서에 대한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 영적 독서란 주로 주어진 책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방법 때문에 다른 독서와 구별되는 것이다. 아무리 잘 맞는 재료라 할지라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읽는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이 글에서 의도하는 바는 순수 영적 독서와 다른 형태의 독서와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을 상기하는 데에 있다.


원칙 1 : 영적 독서가 의도하는 바는 삶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견해를 확실하게 하고 재 강화하는 데 있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주관적인 세계를 파헤치고 우리의 주관적인 세계를 밖으로부터 영향을 풍부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폐쇄적인 신념과 이념의 한계성 내지는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계시의 완성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내맡기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결코 현재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적 독서란 표현은 처음에 전례적인 성서의 선포와 관련을 맺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었고, 책이 너무 귀하게 되자 일상적인 쇄신의 수단으로서 공적 독서에 점차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에는 어떤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한 가지 이익 되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독서는 개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므로 예견할 수 없는 요소가 항상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취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주어진 시간에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서 독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에 맞게 자신의 사고방식을 적응해 나가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독서에서는 인간과 하느님 말씀 사이에 참다운 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삶을 말씀에 개방할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를 드리는 것과 같다. 한편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독서할 때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은 구원의 심판으로써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모든 영적 독서를 할 때에 우리는 경이로운 마음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는 감명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 때문이다. 단지 잘 아는 성경 구절이나 다른,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독서만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녹음기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에 맞추어 적당하게 그 감정을 풀어 볼 수 있는 편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녹음기만으로는 싫증을 느끼게 될 때, 우리에게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하는 독서는 항상 그 독서에서 모험을 할 수 있는(뜻하지 않은 경험)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독서는 정적이고(static) 진부(stale)해서는 안 된다.

영적 독서가 하나의 수단인 만큼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계시된 진리의 완성을 향해 계속 진보하며 또한 우리의 주관적 세계의 좁은 한계성을 벗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독서는 교회와 더불어 가지는 우리의 친교를 가능케 하는 의미 깊은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불일치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허위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오히려 진리에 대한 단편적인 견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조화는 전체적인 진리를 추구함으로써만이 강력히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어진 영적 독서가 중요하다. 즉 우리의 당면한 요구만을 해소시키는 독서의 선정보다는 좀더 범위가 넓은 안목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서거리를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에 관하여 일정한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이 있다.

교회에 관한 글은 진정한 영적 독서를 위하여 가장 좋은 재료이다. 성서야말로 우리가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책이다. 그러나 성서에 국한시키는 것은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이었다. 수세기를 통하여 성경 말씀을 실천하려는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도와 그들의 노력에 상당한 도움을 주어온 많은 저서가 있었다. 성서를 재발견한 이 시대에 있어서, 이 시대야말로 고전을 형성한 위대한 영적 스승들과의 유대를 새롭게 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고대의 저자들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인 이해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들이는 우리의 노력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굉장히 풍성하게 해주는 원천이 된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관한 글로써 교회의 공적인 문헌들과 율령, 회칙 그리고 그 밖에 관해서도 언급되어야 한다.


원칙 2 : 영적 독서는 오랜 기간이 요구되는 활동인 것이다. 영적 독서는 즉시 만족을 줄 수 있는 근원이라기보다는 삶을 위해서 꾸준히 공급되는 원천이다. 이러한 영적 독서를 위하여서는 충실하고 항구한 것이 가장 가치 있는 보조 수단이다.

우리가 약간 시장기를 느낄 때 냉장고로 급히 달려가서 간단한 요기를 하는 것과 같이 영적 독서에 임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영적 독서는 삶의 기초적인 에너지 원(源)을 구성하는 규칙적인 식사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의 끊임없는 친교를 갖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느끼는 필요의 감정이 언제나 이 점에 있어서 정확한 표준이 되지는 않는다. 주님의 말씀과의 친교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하는데 들이는 우리의 모든 효과는 우리 자신이 부패하기 전에 이미 허망하게 된다.

우리가 사도적 활동에 투신하려 한다면 우리는 “초과 수화물”(excess baggage)을 운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 배워 본적이 없는 것을 남에게 전할 수는 없다.

영적 독서는 항상 스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영적 독서가 우리에게 몰두하는 자세를 강요한다. 그러나 영적 독서는 항상 의무적이다. 만일 우리가 규칙적으로 일 주일에 적어도 2-3시간도 영적 독서를 위하여 할애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의 개인적인 친교는 어려움을 당하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최소한의 시간까지도 핑계를 대어 이행하지 않는다면 상식적인 방법을(하느님과의 친교에 있어서) 이탈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우, 우리 자신을 위해 꾸밈없이 대화 할 수 있는 지도자와 의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원칙 3 : 영적 독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소명 의식과 관계를 갖는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목적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현재의 생활에서 명확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듣는 것이다.

영적 독서는 결코 자기 수양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는 초대에 대한 응답이다. 제일 먼저 제자가 지녀야 할 충실은 스승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지시와 안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스승의 감화에 자신을 완전히 드러냄으로써 그 제자는 스승의 태도의 참된 가치에 젖어 들게 되고 점차적으로 그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하는 가에 대해 깨닫게 된다. 영적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소유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며 마침내는 우리가 즐겨 하는 구상이나 우리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관하여도 새롭게 질문을 하며 종래의 나의 사고를 재음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신념이나 계획을 떠나서 잠시 동안이나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지를 심각하게 묵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순복(順服)의 정신으로 영적 독서를 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이니시어티브를 가지시도록 인내롭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참된 영적 독서를 위해서 신뢰, 존경 그리고 순복(順服)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독서할 자료를 선택함에 있어 많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모든 출판물이 완전한 신빙성을 가지고 출판되었다고 믿는 것은 경솔하다. 영적 독서로 사용할 책들은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큼 충분히 내용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내용들이 진리의 일부분에 그쳐서는 안 되며 우리를 전체적인 진리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믿을 만한 책을 가지게 되면 굳이 우리의 비관적인 기능을 발휘할 필요 없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


원칙 4 : 영적 독서는 계시와 중복되는 경험들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생활환경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믿음을 보존시키시는 성령께서는 계시된 진리를 표현하고 기록하는 일을 도와줄 뿐 아니라 이미 기록된 것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성령의 현존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신다. 영적 독서를 통해서 성령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며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의 삶을 의도적으로 형성해 나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생활 즉 과거와 현재의 기쁨과 슬픔, 이익과 손해에 관계없이 영적 독서를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과거에 어떠했다든가 혹은 그렇게 되었을 수 있었던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으신다.

우리는 정보 제공을 쌓기 위하여 읽지 않는다. 추측하건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미 몇 번의 생애를 살 수 있는 충분하고도 맹목적인 사실들을 많이 습득하고 있다. 영적 독서의 목적은 교회의 신앙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빛 안에서 인간의 기복(起伏)있는 인생 경험들을 이해하여 실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영적 독서는 세상과 결별을 택하는 문제가 아니며, 예컨대 우리에게는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꾸미는 것도 아니다. 영적 독서를 잘하기 위하여서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현재의 나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엄청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독서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모든 공상, 장난스러운 행동들을 끊어 버리고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영적 독서를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리적 부족함을 알아내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오직 성서 안에서 능력과 밝힘을 찾으려는 우리의 갈망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어떤 긴박감에 젖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만일 영적 독서가 진지함과 깊이를 결여하고 단순히 장난삼아하는 취미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독서에서는 결코 영구히 지속하는 힘이 생길 수가 없다.


원칙 5 : 영적 독서는 여유 있는 마음과 평화 중에 명상하는 독서로서 어떤 실리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으며 공으로 주어지는 선물(상여금)같은 특성이 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영적 독서는 기도에 의해서 잠시 중단될 수 있다.

영적 독서에 대한 참된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적 독서는 어떤 실리적 가치나,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영적 독서는 특별히 이루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해서 누리는 자유와 소명을 가지고 있다. 영성 생활에 관한 독서나, 신학공부, 거룩한 성서를 연구하는 것을 포함한 이와 같은 실질적인 영적 활동은 별개의 분야이다. 설교는 잘 준비되어야만 하고 종교적 훈련은 잘 계획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 활동 중의 어느 하나도 영적 독서는 아니다. 일을 떠나서 한 개인이 영적 독서와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일정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영적 독서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하며, 하느님의 은총이 강력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일이라기보다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고요함과 정적함이 흐르는 분위기는 독서하는 것을 감미롭게 해준다. 기도는 이러한 환경에서 잘 된다. 영적 독서를 하는 동안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면 그 기도의 감정을 옆으로 밀어 제쳐놓지 말고 전개시켜야 한다. 우리 마음에 불이 붙여지고 우리의 관심이 매혹되어 넋을 잃게 되면 기도의 감정을 방해받을 어떠한 압력도 느끼지 않는다.

영적 독서를 하다가 잠깐 ‘중지’하는 것은 독서 그 자체보다도 늘 더욱 중요하다. 일단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갈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한다면, 받아들인 이 말씀이 제한을 받지 않고 감흥이 계속되게 해야 하며 쓸데없이 흘려버리거나, 방해받게 하지 말고 받아들인 말씀의 영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키워 가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긴장도 배제되어야만 한다.


원칙 6 : 영적 독서는 단순히 ‘내적’ 훈련만이 아니다. 가능한 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영적 독서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 독서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전 인격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열려진 마음으로 몰두해야만 한다. 태도에 대하여서도 약간의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긴장을 푼 편안한 자세이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만큼 단정한 태도라는 것을 드러내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직업적으로 많은 독서를 해야 할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영적 독서를 할 때에는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즉 사무용 책상에서 떨어져 앉거나 혹은 마루바닥에 앉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만일 우리가 혼자 있다면 우리는 영적 독서를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십자 성호를 긋거나 혹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할 수 있기 위하여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독서라 하면 항상 큰 소리로 읽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우리가 실천하듯이 빨리 눈으로 훑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현대인인 우리들도 우리가 읽을 때 말을 발음하기 위해 입을 놀리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서를 천천히 할 수 있으며 좀더 철저히 몰두시킬 때 그 텍스트는 좀더 우리에게 풍부해진다. 어떤 면에서는 입을 놀려 읽는다는 것은 신체적(bodily)으로 우리를 더 바쁘게 하는 점도 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잡념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우리가 영적 독서를 아마추어 연기(演技)처럼 만들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큰 소리를 내어 읽는다는 것은 좀더 강한 인상을 받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는 강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뜻 깊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를 천천히 읽게 한다.


원칙 7 : 영적 독서를 할 때, 특별히 우리에게 말해 주는 어떤 감명을 받게 되면 그 감명의 멋(맛)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기억 속에 그것을 존속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적 독서를 할 때, 때때로 우리는 특별히 마음에 들고, 주어진 그 순간에 우리의 특수한 상황에 아주 적절히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이 여겨지는 것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우리는 그런 기회들을 잘 이용해야 하며 문제의 텍스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인상 깊은 그 구절을 따로 적어서 며칠 동안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곳에 둘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그 구절을 계속해서 되새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하고, 그 구절을 실제로 우리의 삶에 한 부분이 되도록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구절이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끌고 또 아주 짧다면 기도의 기본적 원리로 이용할 수 있다. 그 날의 일과를 보내면서 짧은 기도나 화살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때, 기도의 시작으로서 그 구절을 이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매력적인 은총의 계기가 특별한 타당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제시될 때, 주어진 텍스트에 대하여 더 풍부한 진리의 가능성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편 어떤 구절에 대한 매력이 없어지면 미련 없이 다른 구절로 계속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영적 독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우리는 은총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발전시키게 된다. 처음에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텍스트들은 일반적으로 확증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영적 독서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점차 많아지면 다른 종류의 텍스트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며, 이러한 텍스트들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보다는 도전을 제기할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는 순복하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코이노니아 제2집 45쪽)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글 
Michael Casey, Tarrawarra, 최 메리 다빗 수녀 · 홍성임 돌로레스 옮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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