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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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10: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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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12 ㅣ No.119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10) 장하다 순교자여!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1968년, 도약하는 한국을 세계에 알린 국가 차원 경사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은 눈물바다가 됐다.

 

한국에서 전세기로 도착한 한국 신자들은 병인박해 순교자 24위(位)가 복자품에 오르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시복 선언에 이어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 선창으로 '떼 데움'이 울려퍼지자 대성당 정면 막이 걷히면서 복자들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트남과 만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 10년 넘게 복음을 전하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 장 주교, 승지(承旨) 벼슬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남종삼(요한), 혹형과 고문 속에서도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천주를 버릴 수 없다"며 순교의 길을 택한 충청도 출신 이명서(베드로)…

 

-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을 마치고 귀국한 김수환 대주교(왼쪽 두 번째)가 1968년 10월 13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주교단과 경축대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복자 24위 이름을 큰 붓글씨로 써서 만든 제대 뒤 병풍이 눈길을 끈다.

 

 

500명에 달하는 한국 신자들은 자랑스러운 새 복자들을 바라보면서 감격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중에는 독일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는 한국인들과 미국 교포 신자들도 섞여 있었다. 특히 미사 말미에 성 베드로 대성당 소속 성가대의 '복자 찬가' 연주가 울려 퍼지자 너나할 것 없이 흐느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말 기도와 성가가 울려퍼진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교황, "한국교회 표양을 본받으라"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오후 강론에서 "오, 꼬레아! 순교자들이 피로써 신앙을 기록하고 진리를 선포한 땅"이라고 극찬하며 유럽 신자들에게 한국교회의 훌륭한 표양을 본받으라고 말했다.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그리스도교 대륙 신자들에게 아시아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 교회를 본받으라고 한 교황 강론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러자 시복식에 함께 참석했던 유럽인들이 행사 후 여기저기서 한국 신자들을 붙들고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냐?", "병인박해가 뭐냐?"며 질문을 쏟아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시복식의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그날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시복 미사 집전의 영광이 내게 주어졌다. 선조들이 복자품에 오르는 감격스런 장면을 지켜보는 신자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럽에 사는 교포 신자들까지 합쳐 한국인 500여 명이 모인 그날은 바티칸 전체가 한국의 날이었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78쪽)

 

이날 '눈물의 시복식'은 한국교회에 각별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한국교회는 천주교 전래과정에서 100년 동안 신유박해(1801년)ㆍ기해박해(1839년)ㆍ병오박해(1846년)ㆍ병인박해(1866년) 등 4대 박해를 겪었다. 이 가운데 8000명~1만 명이 목숨을 잃은 병인박해가 가장 처절했다.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는 이미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른 상태였다(79위와 24위는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그러나 79위 시복식은 일제 강점기에 파리외방전교회 주도로 이뤄진 까닭에 한국교회는 객(客)이 될 수밖에 없었다. 79위 복자는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탄생했기에 한국 순교자가 아니라 일본 식민지 순교자로 세계교회에 알려졌다. 79위 시복식에 참석한 한국인이라고 해봐야 한 바오로 신부와 장면ㆍ장발 형제 단 3명뿐이었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6ㆍ25 전쟁, 전후 복구사업 등 격동의 세월을 헤쳐 나오느라 79위 복자를 제대로 공경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바티칸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결정 낭보(朗報)가 날아들자 한국교회는 순교자에 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에 '순교자 영성'이란 광맥(鑛脈)이 흐르는 것을 새삼 깨닫고 그걸 캐내기 시작한 것이다. 순교자 영성 연구와 현양운동은 사실 이때부터 본격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순교자 현양운동 불붙기 시작

 

한국 참가단 140여 명이 이탈리아 국적 알이탈리아 항공기를 전세내 로마까지 날아간 것은 두고 두고 화제가 됐다. 박정희 정부가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민간인 해외여행을 극도로 통제하는 상황에서 천주교가 종교 행사 참석을 이유로 외국 항공기를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세계성체대회나 세계청년대회에 몇백 명씩 참석하지만 그때 '민간인 140명 전세기 출국'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한국병인순교자시복경축집행원회가 시복식 전후로 개최한 행사들은 막 불붙기 시작한 순교자 현양운동 열기를 전해준다.

 

집행위원회는 △ 순교자료전시회(절두산 양화진성당) △ 경축대미사(남산 야외음악당) △ 예술제(국립극장) △ 강연회(신문회관) △ 시복일 기념미사 △ 백일장과 사생대회 등을 통해 순교자 현양운동을 확산시켰다.

 

24위 시복은 국가 차원 경사이기도 했다. TBC TV는 5만여 명이 참례한 10월 13일 남산 야외음악당 경축대미사를 2시간 동안 중계방송하며 이 소식을 국민에게 알렸다.

 

홍종철 문화공보부장관은 시복에 즈음한 담화를 발표하고 "선혈을 뿌려가며 영생을 찾아간 순교정신은 곧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의인(義人)정신"이라며 "국내적으로 도약하는 한국이 24위 복자를 통해 전 세계 천주교인에게는 물론 세계 사람들에게 또 한번 빛을 발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24위 시복은 한국교회 순교자 영성을 일깨우고, 한국이 순교자의 땅임을 국내외에 천명했다는 점에서도 의미 깊은 사건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

 

조선조 말기인 1866년(고종 3년)부터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7년간 지속됐다. 규모와 희생자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박해다.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 지배층이 서학(西學)을 배척한 데 있다.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은 윤리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은 안중에도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긴다"며 천주교를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아붙였다. 또 황사영 백서 사건(1801년)을 다시 들춰내 "천주교가 프랑스 군사력을 끌어들이려 한다"며 보수층의 외세배척 감정을 부추겼다.

 

시베리아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南下) 정책도 한 원인이 됐다. 승지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자고 제안했다. 대원군은 처음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잠시 뒤 영불 연합군의 중국 북경함락과 이어 벌어진 양인(洋人)살육 참상 소식이 서울에 도착했다. 이로 인해 고관들이 천주교와 손 잡으려는 대원군을 비난하고, 운현궁에까지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꿔 박해령을 내렸다.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홍봉주, 남종삼, 도리 김 신부 등이 잇따라 체포돼 새남터, 서소문밖 네거리,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했다. 1867년 접어 들어 박해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1868년 일어난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은 박해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됐다.

 

병인박해로 조선교회는 회복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무너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신자들은 산천을 떠돌며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나가야 했다. 천주교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1886년 한불조약 이후다.

 

[평화신문, 2009년 1월 11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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