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Ο’ · 비움(kenosis)과 충만(pleroma)
아직 세상은 고요하고 이슬이 반짝일 뿐입니다. 밤새 세상을 지켜준 별들이 점점 더 엷어져, 민물에 잠기는 해변같이 새벽빛의 물속에 잠겨 점점 더 약해져가는 눈빛을 보내다가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감춥니다. 장밋빛 섬광이 동쪽 하늘의 비취색 비단을 양쪽으로 갈라놓자, 숨결 같은 바람이 산과 들판을 지나며 “잠에서 깨어나라. 새 날이 밝았다” 하고 아르페지오의 선율을 곁들인 찬양을 시작합니다. 밤의 수의 밑에서 꿈틀거리며 세상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되찾고, ‘無’에서 돌아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동쪽의 땅과 맑은 하늘 사이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불덩어리로 인해 일종의 사다리가 놓여있는 듯합니다. 사다리의 양끝에는 침묵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무리 설득력을 가진 말과 글일지라도 그저 중간 계단일 뿐, 거기에는 발을 아주 가볍게 얹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침묵만이 왜곡됨이 없으니, 침묵은 알파요 오메가며 동시에 無와 有일 것입니다. 無를 뜻하는 단어 아인(ain)이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인 아니(ani)와 같은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의미가 깊습니다. 말씀에 의해 無에서 有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의 인자(仁慈)께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과 오직 하나밖에 없는 문을 통해 빈 무덤과 구원이 세상에 주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13세기경,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예수살렘에 당도한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의 무덤이 정말로 ‘비어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합니다. 교회와 서구는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라는 표현과 “그렇게 해서 인류는 죽음의 마비상태에서 깨어났다”라는 훌륭한 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 교황 실베스텔 II세가 도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숫자 ‘Ο’이 서구에 도입됩니다. ‘비어 있는 무덤’을 체험하는 것과 성서의 구절을 일치시키는 것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혁명적인 충격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는 무덤’은 없음과 공백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에 이어 마침내 없음과 공백이 쭉 존재해 왔다는 생각 자체와 일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질서와 無가 의미하는 공백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공포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처럼 ‘없음과 비어 있음’이 가능하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용인된다면 ‘Ο’의 개념 역시 그러할 것이며, 동시에 33과 303을 구별하는 위치적 명수법도 자연스럽게 그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Ο’이라는 기이한 숫자를 더 이상 사탄의 창조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텅 빈 자기 비움(kenosis)과 충만(pleroma)으로서 그리스도의 표상과 일치시킵니다. 2세기경에 순교하신 성 엠마누엘(Emmanuel)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오늘 무서운 것을 보았다. 서재에 들어가니 조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당시 묵독(默讀)은 악마의 독서법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묵독이 허용된 시기는 ‘Ο’가 도입되는 12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합니다.
세상에 아로새겨진 숫자를 통해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난다.(아우구스티누스)
9세기 무렵의 희곡 작가인 간더사임의 로비타(Hrovita) 수녀의 희곡 사피엔티아(Sapientia)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창조주는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 수와 크기, 무게를 알맞게 정하셨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사람의 나이에 알맞도록 정리정돈하셨으며, 더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생생한 기적이 드러나는 수학을 창조하셨다.”
과연 숫자의 속성은 속임수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거짓은 숫자의 본성으로 살펴 볼 때 가장 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를 감지하고, 조화를 규명하며, 섭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라져가는 사물들 뒤에 숨겨진 숫자의 관계와 영원한 조화를 통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숫자는 단순히 미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비밀스럽게 배열되어 있기도 한 창조와 구원의 질서와 필연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Ο’은 ‘없음’을 뜻하지만 역설적으로 ‘영원히 있음’을 상징합니다. 숫자의 개념과 함께 철학적 의미로 존재합니다. 숫자, ‘Ο’ 즉 ‘비어 있는 무덤’이 상기시키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방법에 있어 어떠한 한계와 제약 없이 구원 사업을 완성하십니다.
시간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한 것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남쪽에서 북쪽 끝까지, 즉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까지든지 전파됩니다.
방법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인자(仁慈)이신 하느님의 방식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결코 제약이 없습니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 목자이며 나침반인 복음의 핵심인 숫자 ‘Ο’( ‘비어 있는 무덤’)의 신비를 상기하며, 하느님의 인자(仁慈)와 구원의 바람을 노래해 봅니다.
[평신도, 2013년 여름호(제40호), 명백훈 프란치스코(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