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 정하상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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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40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

 

 

정하상(丁夏祥)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의 아들.

-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의 오빠.

-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성녀 김 데레사와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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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사에 큰 획을 그었던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 그는 천주교가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다. 1795년 정하상은 정씨 집안에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양근 땅 마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글 교리서 "주요교지" 두 권을 저술한,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씨 일가에게 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아버지와 형 정철상(카롤로)이 순교했고, 백부와 숙부인 정약전, 약용은 천주교에 입교한 죄로 전라도로 귀양가게 된 것이다. 정하상은 아버지가 순교할 때 일곱 살로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과 함께 풀려났다. 유 체칠리아는 가산이 몰수당해 갈 곳이 없어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마재로 내려갔으나 문중 사람들 모두가 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하면서 냉대하고 멸시했다.

 

곤궁과 천대 속에서도 정하상은 어머니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들으면서 신앙을 키워갔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신앙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키워갔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신앙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키워갔다. 바오로가 총명하고 비상한 재주를 지닌 청년으로 자라자 친지들은 혼인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키라고 권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어머니께 "나에게 앞으로 해야 할 커다란 일이 있습니다. 이밖에는 마음을 쓸 일들이 없습니다."고 말씀드리고 마재를 떠났다.

 

1813년 홀로 서울로 올라온 정하상은 조증이(바르바라) 집에서 머물면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후 바오로는 더욱 깊이 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하였다.

 

그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을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비록 그는 뜻은 못 이루었지만 북경에 왕래하는 길을 튼 것으로 만족하였다. 정하상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신철, 유진길과 함께 아홉 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북경에 있는 주교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였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1827년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독립교구가 설정되었으며, 유방제, 나 모방, 정 샤스탕 신부와 범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내 학자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지 사십여 년이 지났고, 1794년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어 순교한 뒤로 약 사십 년만의 일이었다.

 

앵배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이신규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열심히 사목하였다. 바야흐로 조선교회의 앞날이 밝게 내다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으로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는데, 1839년 7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곧 그가 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대신에게 올려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다. 이 문서는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에 조정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상재상서"는 한국 최초의 호교문으로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바오로는 포청에서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고 배교하라고 강요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며칠 뒤 다시 끌려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나오는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가지 입을 열지 않았다. 정하상 바오로는 포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세 차례에 걸친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1839년 9월 22일, 그의 마흔 다섯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사십팔 년이라는 사이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죄목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경향잡지, 199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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